세종 23년 3월부터 2년반 동안 도승지를 지냈던 조서강(趙瑞康·?~1444)은 우리 귀에 익숙한 이름이 아니다. 세종이 오늘날의 청와대 비서실장인 도승지에 임명했을 정도면 뛰어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어째서 조서강이라는 이름은 낯설게 느껴지는걸까? 그 답은 실록에 있다. 그는 세종의 눈과 귀를 막은 인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국공신 조반(趙·1341~1401)의 아들 조서강은 태종 때 문과 2등으로 급제했는데 당시 장원이 정인지다. 실은 최종 순위까지 두명이 올라가 과거담당관이 태종에게 정인지와 조서강의 답안지 두개를 올리자 태종은 마치 뽑기를 하듯 둘 중 하나를 고른 것이 정인지의 답안이었다. 이런 경우 실력으로 보면 두 사람이 다 비슷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후광인지 조서강의 벼슬살이는 탄탄대로였다. 요직을 두루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잠시 나갔다가 다시 중앙에 복귀해 승정원의 우승지, 좌승지를 거쳐 마침내 세종 23년 도승지에 올랐다.
세종 23년부터 25년 사이면 세종대왕이 한글창제에 마지막 피치를 올리고 있을 때였다. 국정은 훗날의 문종인 세자가 사실상 맡아서 할 때였다. 아마도 세종은 이런 상황에서 지나치게 국정에 민감한 신하를 도승지로 두고 싶지 않았을지 모른다. 고분고분 심부름을 잘해 주는 도승지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세종 21년 11월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 이구가 궁중의 음식물과 물품을 관장하는 내자시의 종 가야지와 간통한 사실이 발각돼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세종도 진노하여 가야지를 제주도로 내쫓으려 했다. 이때 우승지로 있던 조서강은 세종의 마음에 쏙 드는 방안을 제시한다.
“남녀간의 욕심은 인지상정인 데다가 임영대군은 나이도 어리니 크게 문제 삼을 것이 없습니다. 가야지를 제주도로 보내면 말이 밖으로 퍼질 수 있으니 대신 그 아버지에게 죄를 물어 멀리 유배를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아첨’이었다.
세종 22년에는 큰형 양녕대군이 한양에 집을 짓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절대불가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에 앞장선 사람은 다름 아닌 사간원 책임자이자 황희 정승의 아들인 황수신이었다. 그런데 이 상소를 임금에게 전달해야 할 우승지 조서강은 “주상께서 양녕과 관련된 대간의 말은 전하지 말라고 했다”며 상소의 접수 자체를 거부했다. 당시 승지가 이런 이유를 대며 신하들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하들이 조서강을 어떻게 보았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얼마 후에는 세종이 흥천사 재건을 축하하기 위한 잔치에 국고를 지원하겠다고 하자 승지들은 찬성, 대신들은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 승지들 중에 조서강도 당연히 포함돼 있었다. 그래서일까 실록은 조서강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인물평을 남겼다.
“조서강이 왕의 말을 출납하는 데 있어 아첨하고 뜻을 맞추어 조금도 비판적 의견을 내거나 말리지 않아서 임금이 부처를 높이는 행사를 이루게 되었다.”
결국 조서강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고 세종의 치세에 약간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데 그쳤을 뿐이다. 아부와 아첨은 당대에 이득을 줄지는 몰라도 결국은 본인에게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 아닐까?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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