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의 제왕, 전설이 되다

2009.06.30 위클리 공감 최신호 보기


 


1983년 처음으로 TV에서 마이클 잭슨이 ‘빌리 진(Billie Jean)’을 부르며 유연하게 뒷걸음질 댄스를 했을 때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도대체 저걸 어떻게 추는 거지?” 마치 달 위를 걷는 것 같다고 해서 ‘문 워크(Moon Walk)’라고 불린 그 춤은 순식간에 전 세계 젊은이의 모방 본능을 자극했다. “왜 마이클 잭슨의 얼굴이 하얗게 바뀐 거야?” 하고 의심할 여유가 없었다. 필자도 방에서 몰래 문 워크를 흉내 내다가 뒤로 넘어져 다치는 봉변을 겪었다. 아마도 그 시대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을 것이다.
 

하긴 전설적인 춤의 배우 프레드 아스테어가 ‘경이적 춤꾼(Wonderful Mover)’이라고 격찬한 사람의 동작을 어찌 쉽게 재현할 수 있겠는가. 여배우 제인 폰다는 “마이클 잭슨의 음악에 맞춰 춤출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섹스할 수 있고, 노래할 수 있다. 그의 음악을 듣고 가만있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춤만이 사람들을 홀린 것은 아니었다. 천재적인 감정표현과 비트 감각에다 가창력 측면에서도 그는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1958년 태생으로 열 살 때 형제그룹 ‘잭슨 파이브’의 리드싱어가 되어 1970년대 개막과 함께 ‘I want you back’ ‘ABC’ 그리고 지금도 널리 애청되는 명곡 ‘I'll be there’를 히트시키며 스타덤에 올랐다.

그룹을 나와 열네 살에 발표한 곡 ‘벤(Ben)’도 빌보드 1위를 차지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이미 대스타였던 것이다. 이 모든 영광은 춤이 아니라 천부적 음악재능, 즉 가창력이 동반됐기에 가능했다. 그는 비트 감각이 요구되는 빠른 댄스곡에도 능했지만 풍부한 감정표현과 정확한 음 구사능력으로 발라드에도 실력을 발휘했다. ‘She’s out of my life’, ‘Heal the world’, ‘You are not alone’과 같은 곡들이 이를 말해준다.

춤과 노래만이 아니라 나중에 성인이 되어 발표한 기념비적인 앨범 <오프 더 월(Off The Wall)>과 <스릴러(Thriller)>로 알 수 있듯 앨범의 녹음기술 측면에서도 그의 음악은 언제나 유행을 선도했다. 모든 점에서 완벽해 앨범을 살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서도 <스릴러>가 LP시대에 무려 50만 장 이상 팔려나가는 기염을 토했다. 세계적으로는 1억 장 판매고를 수립해 지금도 단일 앨범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전통 흑인이라고 할 수 없는 말끔하고 준수한 외모와 춤 잘 추고 노래 잘하는 그의 출중한 역량은 1980년에 시작된 음악 전문채널인 MTV시대와도 맞물렸다. 마이클 잭슨과 함께 음악의 중심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이동했다. ‘비주얼 댄스’ 시대가 열린 것이다. 마이클 잭슨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1980년대 중·후반 소방차, 박남정, 김완선 등의 댄스가수가 속출했다. 서태지도 어릴 적에 마이클 잭슨을 동경하면서 댄스음악의 무한 파괴력을 가슴속에 담아뒀을 것이다.



 

마이클 잭슨은 성인이 된 후 30년간 활동을 하면서 겨우 여섯 장의 독집앨범을 낼 만큼 과작(寡作)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완벽을 추구하는 자세 때문인데, 그럼에도 무려 17곡이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비틀스의 20곡에 근접했고 앞으로의 활동으로 충분히 능가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솔로 가수 가운데 1위곡 최다 보유자’의 기록만을 갖는 데 그치게 됐다. 평단에서 꼽는 최고의 앨범은 단연 <스릴러>와 <오프 더 월>. 1987년의 <배드(Bad)> 앨범은 열혈 마니아들이 선호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 이래로 전 세계 키드들은 마이클 잭슨을 팝의 제왕(King of Pop)으로 여기며 그의 음악과 공연을 찬미하는 법을 배우며 성장했다.‘팝의 제왕’이라는 타이틀은 그의 열혈 팬인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붙여주었다. 한국도 이전엔 댄스음악, 댄스가수라는 수식이 없다가 마이클 잭슨 시대를 맞아 일반화됐다.


 

 
 

그는 또한 음악적 현상을 넘어 사회적 현상이었다. 그의 슈퍼스타덤에는 백인지배사회에서 신음한 흑인들의 비상 욕구와 자긍심이 저류하고 있다. 그와 같은 흑인스타들의 분발로 설움과 차별에 시달려온 흑인들은 자신감을 획득했고 그 결과 우리 생애 어려울 것 같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보게 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어린이 성추행 파문, 성형수술 부작용, 결혼 실패, 재정적 파산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면서 마이클 잭슨의 인기는 추락했다. 그에 따른 장기간 칩거로 2001년 <인빈서블(Invincible)> 앨범 이후 8년간 신보 한 장 내지 못했다. 이제는 마지막이 된 그 앨범마저 발표 당시 ‘무적’이라는 제목답지 않게 2백만 장의 판매고에 그쳤다. 싱글도 부진을 거듭하는 참패를 당했다. 음악 관계자들은 “이제 마이클 잭슨은 끝났다”고 했다.

10년간 마이클 잭슨 관련 소식은 온통 우울하고, 때에 따라서는 비참한 것들이었다. 예정된 영국 공연으로 화려한 재기를 꿈꾸었지만 아마도 이에 대한 강박이 더욱 건강 악화를 재촉한 것으로 보인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전 공연에서 당한 부상으로 약물을 복용한 것이 사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와 같은 높이를 자랑하는 그의 음악사적 위상이 견고하다는 점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1980년대의 음악계는 마이클 잭슨의 것이었다. 그 이상으로 백인들의 사랑을 받은 흑인은 없다. 그의 급작스런 사망은 아마도 전설의 지평을 더 위로 올려줄 것이다. 벌써부터 그와 함께했던 즐거운 순간들에 대한 그리움이 시작됐다.
 

글·임진모(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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