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 따로 없이 “온몸 연 채 식재료와 하나”

2019.12.03 공감 최신호 보기


▶정관스님이 잘 발효된 메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배고프다. 승영아, 네가 점심 준비해라.”
11월 21일 만추의 햇살을 받으며 볏짚 위 메주를 뒤집던 정관(63)스님이 큰 소리로 지시한다. 검푸른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메주를 코에 대고 깊숙이 숨을 들이쉬는 스님의 표정에 큰 만족감이 퍼진다. “아! 이 냄새가 너무 좋아.” 스님은 직사각형의 메주를 사랑스럽게 어루만진다. 메주 특유의 뜨는 내음이 정겹게 다가온다.

▶강원도의 한 스님이 보내준 더덕을 다듬던 정관스님이 더덕을 사랑스럽게 보듬고 있다. 3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백양사의 아름다운 풍경

“넵, 스님. 시장 보고 오겠습니다.”
젊은 셰프는 즉시 바구니를 들고 나선다. 백양산 중턱에 있는 천진암에서 장을 보려면 차를 타고 읍내까지 가야 하나?라는 의문이 순간적으로 든다.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백양사의 아름다운 풍경

“장 보러 어디까지 가나요?” “바로 옆입니다.” “따라가도 되나요?” “그럼요.”
호기심에 따라갔다. 셰프가 향한 곳은 암자 바로 옆에 있는 대형 저온 냉장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층층 선반에 잘 정리된 식자재가 마치 사열을 기다리는 병사들처럼 선택되길 기다린다. 수백 개의 용기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오늘 점심 메뉴는 뭔가요?” “카레를 하려고 합니다.”
바구니에 식재료를 담기 시작한다. 신선한 감자, 호박, 버섯…. 장승영(24) 셰프는 능숙한 칼질로 채소를 다듬는다. 소리가 경쾌하다.

▶정관스님의 보물창고인 장독대. 7년 묵은 옻된장의 맛을 보여주었다.

암자 옆 저온 냉장고 수백 개 용기 빼곡
“현이는 밥을 지어라.” 스님은 주방 한쪽에 서 있던 또 다른 젊은 셰프에게 지시한다. “넵, 스님. 밥물 양은 어느 정도로 할까요?” “6대 4로, 충분히 넣어.” “넵, 스님.” 지시와 대답이 시원시원하다. 왕현(26) 세프는 정성스럽게 쌀을 씻기 시작한다.
스님은 더덕을 다듬기 시작한다. 작은 과도를 잡고, 강원도의 한 스님이 재배해서 보내준 실한 밭더덕을 손질한다. 젊은 셰프 한 명이 스님 옆에서 일을 거든다.
“헤이! 캔. 비 케어풀(Be careful).” 스님이 짧은 영어로 지시한다. 홍콩에서 온 셰프 캔(31)은 순간 당황한다. “소리, 소리(Sorry, sorry).” 캔이 더덕의 머리 부분을 다듬으며 크게 잘라낸 것. 스님은 더덕 머리 부분만 조심스럽게 잘라야 한다고 설명한다. “중간 부분은 잘 다듬어 장아찌로, 뿌리는 갈아 먹으면 돼. 머리와 껍질은 말려서 차로 마시면 좋아. 더덕은 한 부분도 버릴 것이 없지.”

▶도라지 고추장 장아찌를 만들기 위해 조청을 고추장에 부어 맛을 더한다.

스님은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사찰음식의 대가다. 전 세계 1억 4000만 명이 가입한 유료 동영상 서비스인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에 한국 사찰음식의 대가로 소개됐다. 그의 출연분은 2017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컬리너리 시네마 부문에 초청됐고, 에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15년 <뉴욕타임스>는 ‘정관스님, 철학적 요리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음식을 만들고 있다”고 썼다. 전 세계 유명 셰프들이 스님을 만나러 천진암에 왔다. 국내 요리사들과 요리사 지망생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17세에 출가해 1975년 사미니계를, 1981년 구족계를 받은 스님은 대구 홍련암, 전남 망월사, 강원 신흥사 주지를 거쳐 현재 전남 장성 백양사 천진암 주지로 있다.
“스님은 어떤 마음으로 요리를 하시나요?” “음…, 온몸을 연 채로 음식을 하지. 온전히 나를 내려놓고 식재료와 하나가 돼야 해.” 우문(愚問)에 선답(禪答)이다. 자연과 하나 된다는 말을 쉽게 들었는데, 식재료와 하나가 된다니….

▶젊은 셰프가 만든 카레의 맛을 조절하는 정관스님

고정관념 파괴, 배추 넣은 카레 찬탄
“식재료를 보면 무슨 음식을 만들지 금방 알아차려야 해. 생각이 일어나는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치 착착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요리를 조화롭고 치밀하게 해야 해. 특히 식재료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
스님은 채소의 어떤 부분도 버리지 않고 모두 식재료로 쓴다. 몇 년 전 대학에서 스님이 요리 강의를 할 때 학생들이 식재료의 중간 부분만 사용하고 나머지를 생각 없이 버렸다. 스님은 수업 도중 쓰레기통을 모두 조리 테이블 위에 쏟아놓고 학생들에게 이 재료만으로 요리를 하라고 했다. 당황하던 학생들이 자신이 버린 식재료만으로도 훌륭한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라지 고추장 장아찌가 입맛을 돋운다.

천진암에 들어와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지 6개월이 지난 장승영 셰프는 궁중음식이 전문이다. 홍콩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그는 요리만 하고 싶어 대학 진학도 포기했다. 궁중음식연구원에 들어갔고, 20세 때 한 요리 경진대회에서 대상도 받았다. “스님은 수행하는 자세로 요리를 해야 진정한 사찰음식이 만들어진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산으로 들어왔어요.” 젊은 셰프의 표정이 좋다.
“지난여름, 수박을 반 통만 먹고, 나머지는 버리려고 했어요. 싱싱함이 사라진 수박이니까요. 스님은 그 수박 반통을 팔팔 끓여 맛깔스러운 수박차로 만드셨어요.” 스님이 준 감동은 이어진다. “양배추를 다듬으며 곁잎은 버렸어요. 스님은 버린 양배추 곁잎을 다시 거둬 채 썰어 절임 반찬을 만드셨어요. 너무 맛있는 양배추 절임을 만났어요.”

카레 냄새가 진동하자, 스님은 카레 맛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린다. “맛이 왜 이리 밍밍해. 카레는 맛이 강해야 해. 강황 가루를 가져와.” 스님은 강황 가루를 듬뿍 넣더니 배추 한 포기를 가져오라고 한다. 그리고 배추를 듬성듬성 손으로 잘라 카레에 넣기 시작한다. “원래 닭고기를 넣으면 카레가 맛있는데 절에서는 고기를 안 먹으니 배추를 넣는 거야.” 젊은 셰프는 옆에서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모은 채 스님이 시원하게 젓는 국자의 움직임을 바라본다. “카레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시네요. 카레에 배추라…. 그런데 카레 속 배추는 시원하고 씹는 식감도 좋고, 너무 맛있네요.”

▶스님의 수행은 더덕을 다듬으면서도 계속된다.

같이 밥 먹으며 깨알 같은 밥상머리 교육
소박한 밥상이 차려졌다. 스님이 직접 밥을 푸고, 배추 카레를 듬뿍 얹어준다. 스님은 식사를 하며 가지 요리를 예로 들어 사찰음식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어리고 풋풋한 부드러운 가지를 요리할 때는 밑간으로 소금만 쳐도 맛이 있어. 영근 지 9일이 지나 젓가락이 살짝 들어갈 정도로 단단해지면 밑간 소금에 집간장을 넣어. 조금 더 단단해진 가지를 요리를 할 때는 밑간 소금, 집간장에 깨소금을 뿌려야 하고, 완전히 껍질이 단단해지면 여기에 참기름을 넣어. 씨가 완전히 아문 가지를 요리할 때는 씨앗 5~6개는 남기고 요리를 해야 해. 그것이 자연과 하나 되는 자세이지.”

▶천진암 주방

덩치가 크고 수염이 인상적인 왕현 셰프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스님에게 “따뜻한 차를 준비할게요. 무슨 차를 내올까요?”라고 공손히 이야기한다. 스님은 “알아서 줘”라고 대답한다. 왕현 셰프의 표정이 난감하다. 왕 셰프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요리를 전공했다. 각국의 다양한 요리를 접해보고 싶어 세계 일주에 나서 독일의 한 식당에서 주방 일도 했다. 왕 셰프가 고심 끝에 끓여낸 차는 석류차. 한 모금을 마신 스님이 “아직 때가 안 된 차야. 담근 지 얼마 안 됐어.” 왕 셰프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친다.
점심 공양을 마친 스님은 도라지 고추장 장아찌를 만든다. 6년째 스님 곁에서 시봉을 하며 사찰음식을 배우는 박송희(56) 셰프가 장아찌 만드는 것을 돕는다. 박 셰프는 늦은 나이에 궁중음식을 배우기 시작했고, 큰 국제 행사에서 쿠킹 클래스를 진행한 사찰음식 전문가다.

▶정관스님이 장독대에서 된장을 꺼내담고 있다.

곳간 통째로 내주며 마음껏 쓰게 

“스님은 젊은 셰프들에게 곳간도 통째로 내주세요. 된장, 간장과 수많은 발효음식이 가득한 그곳을, 배우러 오는 셰프들이 마음껏 활용하게 허용하시는 거죠.
정관스님은 레시피가 없다. 스님은 사찰음식 책도 안 쓴다. 그때그때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식재료 상태에 따라 변화무쌍한 사찰음식이 그의 손에서 창조된다. 스님은 홍콩에서 온 캔에게 묵직한 돌을 구해 오라고 한다. 용기에 담긴 도라지장아찌를 눌러 보관하기 위해서다. 홍콩 시내 중심가에서 7년 전부터 채식 전문 식당 요리사로 일해온 캔은 일주일 전에 천진암에 스며들었다.

▶정관스님과 제자들이 점심 공양에 앞서 기도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송희 셰프, 정관스님, 왕현 셰프, 장승영셰프

“식물도 생명이야. 이 귀한 생명을 다루려면 존중하고, 그 성품을 이해해야 하지.” 장아찌를 담그기 위해 예쁘게 토막 내 말리는 어른 주먹만 한 무가 지는 햇살을 붙잡는다.

글·사진 이길우 자유기고가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 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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