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바이로 음식이나 물품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배달기사(라이더)는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권을 누릴 수 없다. 현행 노동 관련 법령의 울타리 밖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배달 대행업체와 근로계약이 아니라 업무위탁계약을 맺었다는 이유로 ‘개인사업자’(자영업자)로 분류된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사업자처럼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고객 평가 등을 바탕으로 배달 대행업체가 주문 물량(콜)을 주지 않으면 언제든 퇴출 위기에 놓인다.
배달기사와 같은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이하 특수고용직)는 노동시장에서 대표적인 취약계층이다. 노동 관련 법령에 따른 보호나 사회적 안전망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기본급이나 법정 수당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채 상시적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일하는 현장에서 사고가 나도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이처럼 ‘노동권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특수고용직 종사자들에게 최근 희망적인 소식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우선 여러 노동관계법상 지위에 대한 정부와 법원의 판단이 전향적으로 달라졌다. 특수고용직의 노동권 강화를 위한 입법 및 제도 개선 논의도 활발하다.
▶산재보험 확대 적용 방안을 홍보하는 고용노동부의 카드뉴스 | 고용노동부
음식 전문 배달앱 ‘요기요’의 배달기사 5명은 2019년 8월 앱 운영업체 플라이앤컴퍼니를 상대로 고용노동부 서울북부지방노동청에 임금 미지급 진정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서울북부지방청이 내린 결정이 10월 28일 나왔다. 결과는 해당 진정을 낸 배달기사는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배달기사들이 플라이앤컴퍼니와 위탁계약을 맺어 일을 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업무 형태나 계약 내용을 살펴볼 때 일반 임금노동자와 다를 바 없다고 고용부가 판단한 것이다. 정부가 배달앱을 통해 일하는 배달기사에게 노동자 지위를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1월 15일 서울행정법원이 CJ대한통운 택배기사 노조의 단체교섭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것도 반향이 크다. 앞서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택배노조)은 2017년 11월 고용부로부터 노조 설립 신고필증을 받고 CJ대한통운과 대리점주들에게 단체교섭을 신청하고 중앙노동위원회로부터도 교섭권을 인정받았으나, 대리점주들이 오히려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법원이 ‘택배기사는 노조법상 노동자에 해당하며 당연히 택배노조는 노조법에서 정한 노동조합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원고 패소 판결을 한 것이다.
실제 권리 행사하기까지는 먼 길
배달 플랫폼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할 다른 합법적인 노동조합도 서울에서 처음 탄생했다. ‘배달의민족’ ‘부릉’ ‘쿠팡이츠’ 등 배달 플랫폼 운영업체를 통해 일하는 노동자들이 5월 1일 결성한 라이더유니온은 11월 15일 서울시에 노조 설립 신고서를 제출했는데, 3일 만인 18일 서울시로부터 노조 설립 신고필증을 받았다. 이에 따라 ‘서울 라이더유니온’은 공식적인 법적 노조로서 지위를 얻고, 교섭권과 쟁의권 등 노동3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앞서 서울시는 대리운전과 퀵서비스 기사에게도 각각 2018년 11월과 올해 4월 노조 설립 신고를 수용해 신고필증을 교부한 바 있다. 특수고용직 종사자들이 노조 인정 등으로 노동관계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췄지만 실제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기까지는 상당히 멀고 험난한 여정이 예상된다. 무엇보다 합법적 노조가 결성되더라도 명확한 교섭 상대방을 찾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다. 특히 디지털 플랫폼을 매개로 노동의 수요와 공급이 이뤄지는 경우 임금, 노동조건, 산업재해 예방, 각종 사회보험 부담 등에 대한 사용자 책임 범위를 명확하게 설정할 수 없다. 플랫폼 운영업체들은 ‘필요한 일감과 일자리를 중개할 뿐이지 직접 고용의 당사자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할 가능성이 크다. 직종이나 플랫폼에 따라 업무가 표준화되어 있지 않아 임금 결정 방식이나 임금 산정 기준이 되는 노동시간과 대기시간 구분, 휴가 부여 방안 등에 대한 집단적 교섭은 거의 불가능하다.
정부도 특수고용직의 이런 특수성을 전제로 법적 보호장치 강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 국내 실정법에서 특수고용직이라는 개념이 명확하게 적용되는 법률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뿐이다. 산재보험법에 따라 특수고용직으로 인정받아야 다른 법령에 따른 보호 대상에도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산재보험법으로도 특수고용직에 대한 문턱이 높은 편이다. 산재보험법 제125조(특수형태근로종사자에 대한 특례)에 따르면 ‘계약의 형식에 관계없이 근로자와 유사하게 노무를 제공함에도 근로기준법 등이 적용되지 아니하여 업무상의 재해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는 자’ 가운데 ‘주로 하나의 사업과 그 운영에 필요한 노무를 상시적으로 제공하고 보수를 받아 생활’하는 등의 요건을 갖춘 경우, ‘시행령으로 정하는 직종’에 한해 특수고용직으로 분류된다. 현재 산재보험 가입 대상인 특수고용직 종사자는 골프장 경기보조원(캐디), 건설기계 종사자,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택배 기사, 퀵서비스 기사, 대출 모집인, 신용카드회원 모집인, 대리운전 기사 등 9개 직종의 약 47만 명(2019년 8월 기준)이다.
산재·고용보험 확대 등 사회안전망 강화
정부는 특수고용직의 산재보험 적용 직종을 더욱 확대하는 내용의 산재보험법 시행령 개정안을 10월 8일 입법 예고하고 내년 7월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내년 7월부터 방문판매원 등 5개 직종, 2020년부터는 돌봄서비스 종사와 정보통신(IT) 업종 자유계약자(프리랜서)에게까지 산재보험 적용 대상을 확대한다. 고용부는 새롭게 산재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될 특수고용직 종사자는 모두 27만 4000명으로 추정한다. 가정이나 사업체를 방문해 화장품·건강기능식품 등을 판매하는 방문판매원 11만 명, 정수기·공기청정기 등을 관리하는 대여제품 방문 점검원이 3만 명, 장난감·피아노·미술품을 활용해 아동이나 학생을 가르치는 방문교사 4만 3000명, 가전제품을 배송·설치하고 시운전하는 단독작업 설치기사 1만 6000명이 산재보험 적용 대상에 추가된다. 화물자동차법상 공정운임 적용 품목을 운반하는 화물운송 사업자(지입차주) 7만 5000여 명도 내년 7월부터 산재보험법상 특수고용직에 포함된다. 고용부는 또 특수고용직 가운데 소득수준은 낮고 재해 위험은 큰 직종에 대해 한시적으로 보험료 부담을 줄이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정부 재정으로 보험료를 지원해 보험 가입률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산재보험 적용 대상이 확대되면서 다른 경제 관련 법령으로 보호받는 특수고용직 종사자도 늘어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미 ‘특수고용직에 대한 거래상 지위 남용 행위 심사 지침(특고 지침)’을 개정해 10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공정위 지침 개정안에 따르면, 사업자의 불공정 행위 감시 대상 직종이 기존 여섯 가지에서 대출모집인, 대리운전 기사 등 네 가지가 추가돼 모두 열 가지로 늘어난다. 공정위는 직종 추가와 함께 앞으로는 산재보험법 시행령이 개정되면 별도 지침 개정 없이도 적용 직종을 자동으로 넓히게 했다. 공정위는 또 사업자의 불공정 행위(갑질)로부터 특수고용직 종사자를 사전에 보호할 수 있도록 직종별 표준계약서와 모범거래 기준도 마련해 보급한다. 표준계약서는 다른 경제 부처에서도 소관 업무를 반영해 마련 중이다. 예컨대 퀵서비스 기사와 대리운전 기사는 국토교통부, 대출 모집인과 신용카드회원 모집인은 금융위원회, 소프트웨어(SW) 개발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웹툰 작가는 문화체육관광부 등에서 추진하고 있다.
개념 정립과 정확한 실태 파악도 시급
특수고용직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 구축으로는 사실 고용보험 확대 적용이 더 시급하다. 문재인정부는 출범 첫해부터 특수고용직 종사자를 포함한 고용보험 적용 대상의 확대를 국정과제로 선정했다. 이에 따라 2018년 8월 고용부 고용보험심사위원회 의결을 통해 ‘특수고용직 종사자의 고용보험 단계적 확대 방안’을 마련하고, 11월에는 이를 반영한 고용보험법 개정안을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 발의로 국회에 제출했다. 또 올해 3월에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해당 법안이 상정돼 논의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로 국회 심의 절차에 진전이 없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는 문희상 국회의장 앞으로 의견서를 보내 계류 중인 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요구하고 나섰다. 인권위는 의견서에서 “특수고용직 종사자는 고용의 안정성이 가장 취약한 계층인데도 현행 고용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실업 위험에 노출된 특수고용직 종사자가 고용 형태에 따라 차별받지 않고 사회적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고용보험법 개정안을 조속히 심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울러 인권위는 “특수고용직에 대한 고용보험 적용은 산재보험 대상 직종을 중심으로 시작하되 보험료 적용에서는 일반 근로자와 같이 사업주와 반씩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급여는 실업급여와 출산 전후 휴가급여부터 시작해 점차 확대하는 것이 현실적일 것으로 판단된다”는 의견까지 덧붙였다.
특수고용직에 대한 일치된 개념 정립과 정확한 실태 파악도 법·제도 개선 못지않게 시급한 과제다. 우리나라의 특수고용직 규모에 대해서는 통계청이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 결과를 통해 해마다 발표한다. 올해 부가조사에서는 52만 8000명(2019년 8월 기준)으로 집계됐다. 2018년 50만 6000명보다 소폭 증가했지만, 전체 취업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로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통계청 부가조사는 ‘과소 추정’이라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통계청은 ‘임금근로자’만을 대상으로 “귀하의 일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고 실적에 따라 소득을 얻는 형태에 해당합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답이 나오면 특수고용직으로 판별한다. 이와 달리 고용부 추정으로는 2018년 기준 특수고용직 규모가 166만~221만 명에 이른다. 고용부가 노동연구원에 연구용역을 의뢰해 새로운 방식으로 대규모 샘플 조사를 해서 나온 결과인데, 통계청 부가조사 방식과 가장 큰 차이는 사실상 특정 사업자에 종속돼 일하는 1인 자영업자를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특수고용직 종사자가 최대 221만 명이라면 전체 취업자의 8.2%에 해당하는 규모다. 취업자 12명 가운데 1명꼴에 이른다는 얘기다.
사람보다 물건 파손 더 경계하는 사회
특수고용직은 노동 관련 법에 따른 권리가 거의 없거나 이제 막 권리 행사의 희미한 실마리를 확보한 취약계층이다. 4대 사회보험 혜택에서도 대부분 소외되어 있다. 법적으로 당연 가입 대상으로 되어 있는 아홉 가지 특수고용 직종의 산재보험조차 올해 7월 현재 가입률이 13.4%에 머물고 있다. 산재보험법에 특수고용직 종사자는 원하지 않을 경우 ‘적용 제외’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 가입률 저조의 원인으로 꼽힌다.
올해 제19회 만화의 날 행사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한 <까대기>는 택배 현장에서 일하는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애환을 그린 만화책이다. 까대기란 화물차에 무거운 짐을 싣거나 내리는 일,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택배 현장의 은어다. 저자인 이종철 만화가는 자신이 6년 동안 체험한 까대기 생활을 그림과 글로 담았다고 한다. 책에서 그는 “개인사업자인데 개인사업자의 자율성은 없고, 노동자인데 노동자의 권리는 없는 게 바로 특수고용직”이라고 썼다. 작가는 노동을 하면서 힘든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몸도 마음도 파손주의!”다. 그가 택배 시장의 현장에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던 말도 ‘파손주의’다. 특수고용직이 일하는 현장은 사람이 다치는 것보다 물건 파손을 더 경계하는 세상이다. 일하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더 소중히 여기는 세상으로 언제 바뀔 수 있을까?
박순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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