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먹고 놀고 쉬고 서촌이 하나의 호텔로

2019.11.14 최신호 보기


l▶서울 종로구 누하동에 있는 한옥 스테이 ‘누와’ 방 한가운데에 호두나무로 만든 테이블이 있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호텔이 되는 동네가 있을까? 호텔 내 사우나가 없는 대신 동네 목욕탕 이용권을, 레스토랑이 입점하는 대신 동네 맛집 지도를 주는 호텔이 있다. ‘낡고 허물어진 걸 다시 닦으면 예술이 된다’는 철학을 일본 도쿄 다이토구 야나카 마을에 있는 하나레 호텔은 보여준다. 1955년에 지어진 2층 다세대 임대주택 ‘하기소’는 도쿄예술대학 학생들의 손길과 더불어 2013년 새 건물로 탈바꿈했다. 도쿄예술대학 출신인 미야자키 미쓰요시 씨는 하기소를 운영하며 한정된 건물 안 이벤트로는 동네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주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마을 전체가 하나의 호텔이 될 수 있는 커뮤니티 호텔이다. 백화점처럼 모든 것을 수직 건물에 갖춘 호텔이 아니라, 골목길이 로드 숍이 되는 수평적인 호텔이다. 머무는 여행, 그 지역을 살아보는 진짜 여행이 골목길에서 펼쳐진다.
한국에서도 이런 실험이 시작되고 있다. 숙소 큐레이션(추천) 플랫폼 회사인 스테이폴리오가 진행하는 ‘서촌 유희 프로젝트’다. 서촌은 한국적인, 그러면서도 서울의 매력을 품은 동네다. 인왕산 수성동계곡에서 내려오는 물길과 함께 조선시대에 형성된 마을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누적된 곳이다.

l▶스테이폴리오 이상묵 대표

젠트리피케이션 광풍 이겨내고 꿋꿋이
서촌으로 일컬어지는 동네는 한때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으로 몸살을 앓았다. “서촌 지역의 사업체 수 및 업체 증가로 주거 공간에서 상업 공간으로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지가 상승으로 인한 원주민의 전출과 외부 인구가 유입되는 등 인구 변화와 상업화가 심해져 부정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고 있다.” 시흥시도시재생지원센터의 도혜원, 변병설 인하대 행정학과 교수가 2017년 국토지리학회지에 게재한 ‘서울 서촌의 젠트리피케이션 요인 분석 연구’ 내용의 일부다. 이들은 서촌을 도심 재활성화(2003∼2008년), 지역경제 활성화(2009∼2011년), 상업화(2012∼2014년) 등 시기별로 구분해 젠트리피케이션을 분석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한 차례 휩쓸고 간 동네에 빈 가게가 늘고 급격히 활력이 떨어지는 것과 달리, 서촌은 광풍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와 도시재생의 비결을 듣기 위해 서울 자하문로에 자리한 서촌창작소에서 스테이폴리오 이상묵 대표를 10월 28일 만났다. 이 대표는 서촌을 “정주(定住)의 힘을 가진 동네”라고 설명했다. 주민들이 완전히 빠져나가고 카페, 식당으로 가득 채워진 익선동과 달리 서촌은 마을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주거 블록은 지나친 젠트리피케이션을 막는 방어막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 청와대가 있어 개발이 쉽지 않은 측면도 있고요. 여러 규제가 있어서 한탕 하고 빠져나가기는 어렵죠. 서촌에 있는 분들은 임대료를 너무 올려선 안 된다는 자각이 이미 있는 것 같아요. 2016년부터 서촌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고 있습니다.”

이 대표는 대학 선후배와 어울려 2014년 기획, 브랜딩, 건축을 아우르는 ‘지랩’을 만들었다. 누하동의 약 18.2㎡(5.5평) 차고에 세 명의 친구가 사무실을 연 것이다. 이후 머무는 것 자체가 여행이 된다는 개념으로 2015년 숙소 플랫폼인 ‘스테이폴리오’ 법인을 따로 세웠다. 스테이폴리오는 다른 숙소들을 추천하는 것과 동시에 자체 숙소 브랜드인 누와, 일독일박 등을 알리고 있다. “3명에서 시작한 회사가 시간이 지나면서 직원이 늘어 30명이 됐어요. 직원들이 동네에서 식사를 해결하면서 단골이 되고, 제가 가면 서비스가 나오기도 해요.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됐죠. 단골 가게가 그 정도 서비스를 우리 (숙소의) 손님들한테 해주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l▶서촌창작소에서 내다본 서촌의 오후

공방 작가들과 협업해 ‘서촌도감’ 열어
그렇게 서촌의 숙소, 카페, 음식점 등을 잇는 수평 호텔이라는 개념이 자연스레 시작됐다. 수평 호텔은 지방자치단체와는 결이 다른 방식으로 젠트리피케이션에 대응하는 모델로 꼽힌다. 이 대표는 “저성장의 시대가 오면서 대규모 개발이 아닌, 조그마한 개발로 갈 수밖에 없다. 마이크로(극단적으로 작은)하게 재생하고, 수익률을 맞춘다는 점에서 저희가 주목을 받는 게 아닌가 싶다”고 설명했다.
수평 호텔은 지역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과 함께하는 가치를 지향한다. 동네에 큰 건물을 지어 손님을 독식하지 않고, 지역의 빈집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이런 방식의 개발이 한국 사회에 줄 수 있는 시사점이 뭘까. 그는 ‘공생’이라고 답했다. “같이 잘산다는 점에서 ‘상생’보다는 ‘공생’이 맞는 것 같아요. 상생은 뭔가 도와주거나 해야 할 것 같잖아요? ‘자기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주변의 네트워크와 함께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하나가 독식하려고 하면 다양성도 사라지고 문제가 생기겠죠.”

이 수평 호텔에는 서촌만의 매력을 드러낼 수 있는 가게들이 자리한다. 지랩이 자체적으로 만든 숙소, 상점도 포함된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가게는 ‘한권의 서점’. 수없이 진열된 책 가운데 한 권을 골라야 하는 일반 서점과 달리 한 권의 책만 판매하는 서점을 연 것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동네, 서촌의 매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권의 서점은 매달 하나의 단어, 한 권의 책을 선정한다. 7월에 처음 문을 연 한권의 서점은 서촌의 문화 공간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탐구하겠다는 뜻에서 ‘1㎜’를 첫 단어로 선정했다. 11월에 선정한 단어는 ‘한 번쯤’. 모든 게 복잡하고 마음처럼 안 될 때 한 번쯤, 되돌아보는 시간이라는 의미다. 열두 달의 끝자락에 서는 11월, 한권의 서점은 이경미 영화감독의 <잘돼가? 무엇이든: 각본집과 그림책>을 이달의 책으로 선정했다. 최근 문을 연 ‘서촌도감’은 흙, 나무, 천연섬유 등 친환경 소재로 만든 생활용품, 선물용 상품 가게다. 서촌에서 알고 지내는 공방 작가들과 협업해 제작했다. 23㎡(7평) 규모의 현대식 한옥 스테이 ‘누와’는 올해 말까지 예약이 모두 찼다. 정부 지원금을 받아 비슷한 형태의 한옥 스테이가 늘어나는 가운데 누와는 지원금을 받지 않고 만들었다. 지원금을 받으면 가이드라인이나 규제에 따라 한옥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현대적인 감각을 드러내기 어려워서다.

l▶서촌 ‘한 권의 서점’

크라우드펀딩으로 한옥 살리기 나서
이 대표는 서촌에서 한옥을 되살리는 프로젝트도 벌이고 있다. 그는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빈집을 가리켰다.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돼 보였다. 방치된 집에서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저렇게 비어 있는 집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됐어요. 상속세, 증여세 때문인지 어르신께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갖고만 계세요. 월세가 싸긴 하지만 저런 공간에 누가 들어가겠어요?” 그는 IBK투자증권과 손잡고 낙후된 한옥을 재생하는 크라우드펀딩에 나섰다. 1년 만기 채권을 발행하는 것으로 투자자에게는 5.5%의 이자를 지급한다. 투자 금액은 서촌 한옥 재생에 쓰일 예정이다. 벌써 1억 원이 모금됐다.
서촌 유희 프로젝트는 계속 업데이트될 예정이다. 사람이 늙고, 상점이 바뀌는 것처럼 시간에 따라 새로이 변하는 서촌의 매력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건축, 디자인 등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도시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왜 집을 휴대폰처럼 개통할 수 없을까? 왜 집은 원룸, 빌라, 아파트로밖에 못 만들지? 왜 책 한 권만 파는 서점은 없을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되죠.”

5.5평 차고에서 시작해 서촌의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그에게 ‘서촌스러움’이란 무엇일까? “촌스러움까지는 아니겠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는 공방 작가들의 상품이 진열된, 은은한 향이 퍼지는 서촌도감을 빠져나가 바로 옆에 자리한 슈퍼마켓을 가리켰다. 수십 년간 이 동네에 있는 가게다. “이것과 저것이 공존하는 게 서촌스러움 아닐까요?” 낡은 것과 새것이 어울려 나아가는 미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 이것이 서촌의 도시재생이다.

글 박유리 기자
사진 곽윤섭 기자

관련기사

페이지 맨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