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공혜진 씨가 참가자의 바느질 작품을 돌봐주고 있다.
공예 ‘손을 움직여 마음을 엮다’
10월 15일 저녁 강원도 춘천시 전원길에 자리한 서점을 겸한 독립문화공간 책방마실에서 이색적인 바느질 수업이 열렸다. 이날 수업 진행을 맡은 일러스트레이터 공혜진 씨는 8명의 참가자 앞에서 영상을 틀어놓고 ‘손을 움직여 마음을 엮다’ 프로그램 2기 첫 수업을 시작했다. 무엇을 만들지, 무엇을 바느질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공 씨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내레이션하듯 차분하게 풀어나갔다.
“바느질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입니다. 하나하나의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일이라 순식간에 빨리 할 순 없죠. 하지만 이렇게 여럿이 모여서 같이 하면 힘이 합쳐지는 기분이 들 거예요. 천천히 해요. 여기서 오늘 바느질 프로그램을 한다고 해서 방법이나 기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뭘 만들지를 이야기할 겁니다. 예쁘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것이 뭔지를 찾을 겁니다.”
공 씨는 2003년부터 4년 정도 국립수목원 표본관에서 식물의 세밀화 작업을 했는데 그 과정 덕분에 대상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자연물뿐만 아니라 일상 속 자신의 모습과 주변 환경으로 대상이 확대되었다. 기록하는 방법으로 그림 말고도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어서 청소년들과 숲이나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캠프를 열었고, 직장인들이나 가족 단위 참가자들과 예술 캠프도 해왔다. 공 씨는 2015년부터 엄마와 함께 ‘모녀공작소’라는 이름으로 인형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바느질도 자연물, 그림, 사진 등 다양한 매체 중의 하나다. 집에 있으면서 나의 주변을 내 손이 닿은 것으로 채우고 있다. 옷, 가방, 이불…. 그림 그리는 것과 매한가지다. 바느질은 천천히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세밀화와 같은 면이 있다. 하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도움이 된다. 바느질 한땀 한땀…. 손으로 내가 내 땀을 만질 수가 있다. 상징적이잖아요?”
▶참가자들이 천에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내가 바느질한 건 그 안에 내가 들어간 것”
화면에는 바싹 마른 풀잎이 자갈밭에 붙어 있는 사진이 떠올랐다. 설명에 따라 사진이 점점 바뀌면서 새싹이 나기 시작했고 꽃이 피더니 열매를 맺었다.
“어느 날 표본관 뒤편 자갈밭에서 얘를 보게 되었어요. 그러곤 계속 보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이었어요. 수목원에 가면 매일 이 제비꽃부터 봤죠. 봄이 되니까 얘들이 나왔어요. 다 죽은 것 같았는데 하루하루가 달라졌어요. 매일 찍고 관찰했죠. 나중에는 제비꽃과 대화까지 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차츰 주변의 다른 식물까지 모두 보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느꼈어요. 죽어 있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미운 모습도 제비꽃이라는 것을. 크게 위안이 되었어요. 한순간 한순간이 모여야 제비꽃이 되는구나. 내가 지우고 싶은 것도 모아야 내가 되는 것이구나. 처음에는 예쁘게만 그리려 했는데 잘 그리고 싶으면 더 자주 가서 시간을 많이 보내야겠더라고요. 지금도 그 제비꽃이 떠올라요. 얘를 보면서 나를 비춰봐요. 얘를 보듯 나도 나를 기록하면 어떨까? 의미 없다고 생각되는 시간들, 내 삶을 기록해보면 어떨까?”
▶참가자들이 첫날 중간 단계까지 진행한 작품들
수목원 작업을 끝낸 공 씨는 집에서 샐러드를 먹다가 파프리카 조각에서 숫자를 찾아봤다. 매일 다른 숫자가 나왔고 흘려보내지 않고 기록했다. 아무것도 아닌 순간을 차곡차곡 쌓으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공 씨는 이런 식으로 주변의 사소한 것들을 모을 수 있는 것은 모으고, 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찍고 그리면서 기록했다. 하루에 하나씩 길을 가다가 뭔가를 모았다. 김이 서린 유리창은 찍어두고, 먹고 남은 수박 씨앗으로 형체를 만든 것도 찍었다.
공 씨는 “이게 다 순간이다. 우리의 하루하루 순간이 모여서 우리가 되듯이 짧은 순간의 나를 챙기듯 쌓으면, 재미있는 순간을 모아두면 내 삶이 좀 더 풍성해질 것이라 생각했다”라며 강의를 이어나갔다.
공 씨는 사람들이 쉽게 지나치거나 흘려보낸 것들을 모아서 그림도 담고 사진도 넣어서 수필 형식의 책 일곱 권을 펴냈다. 학생들이 흘린 빗, 1회용 라이터, 비비탄, 무당벌레 날개 한 짝, 나뭇잎도 모았다. 처음엔 예쁜 잎만 모으다가 벌레 먹은 잎에서도 어떤 모습이 떠오른다는 것을 알았다. 살짝 덧그림을 그리기도 하면서 창작으로 이어졌다. 영상을 보기 위해 책방마실의 불을 꺼 어두웠지만 참가자들이 수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지갑입니다. 오래되어 헐었지만 버릴 수가 없어요. 내 손으로 바느질한 것은 결국 그 안에 내가 들어간 것입니다. 내 손이 닿은 것이 주변에 많이 있으면 나에게 힘이 됩니다. 좋아하는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됩니다.”
▶수업의 첫 과정은 영상을 보는 것이다. 참가자들이 강사 공 씨가 식사하다가 양배추 조각에서 찾아낸 숫자를 보고 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먼저”
바느질 작업 도구들이 있는 방으로 옮겨 다 같이 바느질을 시작했다. 춘천시 장학리 만천로에서 온 구연주(47·피아노 강사) 씨는 9월에 시작된 이 프로그램의 1기 수업을 다 듣고 2기에 또 참석했다. “아이가 지금 열두 살인데 임신했을 때 태교로 퀼트를 했다. 배냇저고리, 인형, 이불 등을 만들었다. 바느질할 줄 알면 응용이 되어 프랑스자수, 패턴 같은 것도 할 수 있다.” 잘하는데 이 프로그램에서 무엇을 더 배우려 하는지 물었다. 구 씨는 “예전에 바느질 배울 때는 하나부터 열까지 선생님을 따라 하는 수업이었다. 그런데 여기 이 선생님은 질문을 먼저 던졌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을 한 뒤 바느질을 한다. 전혀 새로운 수업이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해서 선생님이 가르쳐준 패턴으로 고양이를 새기고 있다. 가방에 달아도 되고 여기 자석을 넣어 냉장고에 붙여도 된다. 기성품에다 내가 만든 패치를 붙이면 세상에서 하나뿐인 가방이나 옷, 필통, 지갑이 되는 것이다”라며 바느질에 몰두했다.
▶강사 공 씨가 만든 바느질 소품│공혜진
무두동에서 온 이명숙(65) 씨는 “친구와 함께 왔다. 오늘 처음인데 곰돌이 같은 조그만 인형을 만들고 싶다. 바짓단 정도나 줄일까, 이런 바느질은 처음이다. 수업이 3회라서 너무 아쉽다. 내년에도 꼭 생기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김명훈(24) 씨는 이날 유일한 남자 참가자다. “여긴 아니지만 친구가 바느질 한번 해봤다고 이곳을 추천했다. 고등학교 때 인형 만들기, 뭐 이런 수업이 있었다. 잘하는 편은 아니고 노력하는 쪽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를 새기려고 한다. 생애 첫 작품이 될 텐데 받침대로 쓸 수도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참가자들의 바늘에 실도 꿰어주고 작품 과정도 살펴주던 강사 공 씨에게 이 프로그램은 어떤 사람에게 적합한지 물어봤다. “바쁜 일상에 지친 사람이나 나를 챙길 시간이 없는 사람, 혹은 나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생각 없이 손을 움직이며 마음을 풀고 싶은 사람, 내 손으로 내 공간을 채울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사람, 지루하고 고된 작업을 똑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 권한다”라고 말했다.
글·사진 곽윤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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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