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표, 진예, 원해아 씨(왼쪽부터)가 각자 깎던 숟가락을 들어보이고 있다.
목공 ‘나무를 깎고 시간으로 쓰다’
10월 14일 저녁 7시 충남 천안시 서북구 두정동 ‘공간사이’에 마련된 우드카빙(Wood Carving) 교육장으로 퇴근한 직장인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이들은 10월 7일에 이어 이날 두 번째로 ‘나무를 깎고 시간으로 쓰다’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문화체육관광부가 교육진흥원과 함께 9월부터 시범 운영하는 ‘2019 직장인 문화예술교육 지원 사업’ 중 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기획 프로그램으로 남머루 씨가 진행을 맡았다. 남 씨는 “서울 성미산 마을에서 ‘어제의 나무’라는 공방을 운영하면서 우드카빙 워크숍도 진행하는 나무 작업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참가자들이 모두 모이자 남 씨는 본격적인 작업을 하기에 앞서 손과 팔, 어깨 위주로 스트레칭을 하고 연필을 한 자루씩 깎으며 손을 풀 것을 권했다. 2시간이 넘도록 칼을 쥐고 나무를 깎는 일이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곧이어 숟가락 깎기에 돌입했다. 남 씨는 숟가락 깎기에 대해 “우드카빙의 시작이다. 숟가락을 깎아내는데 덜어낸 만큼 비워지고 담기더라. 숟가락은 밥과 나를 이어주는 동그랗고 기다란 선이다. 밥을 먹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고, 숟가락을 깎는 동안 밥을 먹는 나를 상상하게 하는 도구다. 또 숟가락은 생애 최초의 도구이자, 생애를 관통하며 계속 쓰는 도구다. 그런 숟가락을 ‘깎아 쓴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나를 더욱 깊이 들어가게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숟가락 깎기에 필요한 재료와 도구. 후크 나이프, 블랭크, 카빙 나이프(왼쪽부터)
“우리 삶에 나를 더욱 깊이 들어가게”
대학 친구와 함께 우드카빙을 배우러 온 원해아(33) 씨는 “아빠가 목수였다. 침대 등 가구를 만들어 팔기도 했는데 오빠는 목수 일을 배웠지만 나는 다칠까 봐 하지 말라고 한 기억이 난다”며 후크 나이프를 들고 숟가락의 앞머리를 파내기 시작했다. 왼손 약지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원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 이거? 조금 다쳤는데 집중해서 칼질하다 보니 금세 잊어버렸다. 아프지 않다. 어릴 때 연필을 잘 깎지 못했는데 아빠는 몇 초 만에 뚝딱, 그것도 예쁘게 깎았다. 지금 이 숟가락을 다 만들면 아빠에게 선물로 드릴 생각이다. 우드카빙의 가장 큰 매력은 집중할 수 있다는 점. 스트레스 해소에 그만이다. 맨날 집과 회사만 오가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상도 큰 스트레스인데 칼질을 하고 있으면 내가 뭔가를 이뤄낸다는 성취감이 들어서 너무 좋다. 진정한 자유는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걸 거절할 수 있는 것인데, 우드카빙은 남이 시켜서가 아닌 내가 선택해서 온 것이니 좋다.”
옆에서 재빠른 손놀림으로 작업을 하던 원 씨의 친구 진예(31) 씨도 직장인이다. 해외영업부에서 일하고 있다는 진 씨는 “인터넷 검색을 하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오게 됐다. 집에선 아이 엄마, 밖에선 회사원이라 나라는 존재감이 작았는데 이걸 하는 시간에는 집중이 되면서 자아를 찾는 기분이 든다. 지인 중에 탁구를 잘 치는 사람이 있는데 ‘핑팡’ 하는 소리가 좋다고 했다. 나는 나무를 깎는 ‘사각사각’ 소리가 너무 좋다. 나무 향기도 좋고. 남편이 열심히 배워 오라고 했다. 익숙해지면 집에서 쓸 국자도 만들 생각이다. 그런데 작품이 너무 잘 나오면 아까워서 못 쓸 것 같다”면서 웃었다.
남 씨는 2018년에 나무 작업을 하면서 떠오른 생각을 모은 책 <카빙노트, 나무로 살림-느린 시간으로 나무를 깎다>를 냈다. ‘어제의 나무’ 누리집에 그가 올린 소개 글이 있다.
“나무로 살림은 나무를 살림이고사람을 살림이기도 합니다.
나무로 살림은 숲에 기대어 사는모든 생명의 살림이기도 합니다.
나무를 깎아 살림을 만드는 모순된 이 행위 역시살림입니다.
우리가 깎는 나무들이 다시 살림이 되어숲이 되기를 바랍니다.”
▶남머루 강사가 우드카빙의 재료인 나무의 강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남 씨는 이날 참가자들에게 숟가락을 계속 깎으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듯 강의도 병행했다.
“오늘은 2일 차. 결과물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 예쁜 숟가락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확한 한 칼이 쌓이고 쌓여… 칼과 나무 중에 하나만 움직이는 것이다. 지난주에 칼 이야기를 했고 오늘은 나무 이야기를 할 거다. 깎으면서 이야길 들으면 좋겠다. 이게 나이테인데 의미심장하다. 봄과 여름엔 쑥쑥 자라 춘재가 되고 가을과 겨울엔 추재가 된다. 넓은 면과 진한 선이 합쳐져 한해살이가 되는 것. 이걸 좀 인문학적으로 보면 시간이다. 시간의 집합체로 읽어볼 수 있다.
한 해 한 해의 시간, 우리는 지금 숟가락을 깎고 있다. 숟가락 하나는 적어도 10여 년의 시간을 갖고 있는데 그 시간의 덩어리. 그 덩어리를 깎으면서, 3시간 동안 작업하며 시간을 들어내는 거다. 이런 재미가 나무를 깎는 재미다. 멋있게 깎는 게 아니라 이런 재미. 누구나 할 수 있다. 숟가락 결 방향으로 칼을 쓰면… 여기 먼저 안쪽을 깎고 바깥으로 나오면서, 칼을 내려 쓰는 방식이다. 이런 식으로 들어 올리고. 옛날에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고 아들을 낳으면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오동나무는 성인들이 쉽게 다룰 수 있고, 빨리 자라고 가벼워서….”
▶남머루 강사가 한 참가자에게 후크 나이프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재미”
참가자들은 인문학이 녹아든 우드카빙 강의를 들으면서 어느새 익숙해진 손으로 칼질을 이어갔다.
또 다른 참가자 김영표(30) 씨는 뒷머리 깎기에 이어 앞머리 깎기를 하고 있다. 김 씨는 “평소 관심이 있었지만 미술, 음악 같은 분야와 달리 우드카빙은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너무 좋은 프로그램을 만났다. 무엇보다 잡념이 없어져서 좋다. 반복 동작을 계속하다 보면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른다. 회사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참여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았다. 앞으로도 이런 프로그램이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한 칼, 한 칼이 쌓이면서 나무 조각이 숟가락으로 바뀌고 있다.
남 씨에게 초보자도 우드카빙을 배울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누구든지 가능하다. 다만 여기 와서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를 검토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잘하면 재미가 생기겠지만 그 잘함이 재미를 지속시키진 않는다. 잘하지 못해도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지금 칼로 나무를 깎고 있어!’ 소질…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재미다. 아이들 놀이, 숨바꼭질에 재능이 있어야 하나? 잘 놀면 된다. 손에 힘이 없다면? 힘없으면 없는 만큼만 깎으면 된다. 작가들이 95%의 완성도에 이른다면 초보자라도 75%까진 올라간다. 다만 누구는 두 달 걸리고 누구는 석 달 걸릴 뿐이다. 숟가락을 깎을 수 있으면 주걱, 도마 등 웬만한 살림 도구 모두 가능하다. 크기와 소요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곽윤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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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