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전 속으로 ‘어슬렁’, 그때 그 삶이 ‘오롯이’

2019.11.04 최신호 보기


l▶양동 한옥마을은 언덕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기와집과 초가집을 지었다.

왜 우리는 생활하는 공간을 ‘집’이라고 부를까? 이리저리 생각해본다. 문득 한자 ‘모을 집(集)’이 떠오른다. 가족이 뭉쳐서 산다는 의미에서 우리 조상들이 그리 붙이지는 않았을까?
한민족의 고유한 집을 한옥(韓屋)이라고 부른다. 현대의 한옥은 서양의 아파트 같은 구조물에 밀려 관광의 대상이거나 보존 가치가 있는 공간 혹은 복고 분위기 나는 생활공간으로 구분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편적인 우리의 집이었다.
우리 조상의 의식은 살아가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런 의식의 흐름이 우리의 문화이고 사상이며 정체성이다. 그리고 의식이 응축해 구체적으로 발현된 공간이 바로 한옥이다.

한옥의 특징을 보자. 우선 구들과 마루다. 구들과 마루가 공존하는 집은 전 세계에서 한옥이 유일하다. 구들은 북쪽 추운 지방의 난방시설이다. 그래서 지극히 폐쇄적이다. 마루는 고온다습한 남쪽 지방의 더위를 견디기 위한 시설로 매우 개방적이다. 이렇듯 이질적인 구들과 마루는 오랜 시간 조금씩 부딪치고 양보를 하며 적절히 접합했다.
한옥의 마당을 보자. 안마당은 나무나 화초를 심지 않고 비워뒀다. 그곳에서 아낙네들은 김장도 하고, 고추도 말리는 등 집안 살림에 필요한 노동을 했다. 때로는 잔치하는 공간이 됐다. 뒷마당에는 화원을 꾸렸다. 마당은 단순한 열린 공간이 아니었다. 지붕이 없는 실내 공간이었다. 여름에 안마당과 뒷마당 중간에 있는 대청마루에 앉으면 시원하다. 시원한 이유가 있다. 그냥 열린 공간이라 바람이 불어 시원할 수도 있지만 여기엔 과학이 숨어 있다. 여름에 아무것도 심지 않은 안마당의 땅은 햇빛에 뜨겁게 달아오른다. 공기가 상승한다. 그 빈 공간에 뒷마당 그늘의 시원한 공기가 자연스럽게 채워진다. 인위적으로 공기의 흐름을 만든 것이다. 거기에 뒷산에서 부는 시원한 산바람도 가세하니 금상첨화다.

l▶‘널리 배우고 뜻을 굳건히 한다’는 <논어>의 글귀를 쓴 액자와 태극기를 걸어놓은 고택

양옥은 용도 따라, 한옥은 사용자 기준
처마도 한옥의 과학이다. 처마는 서까래가 기둥 밖으로 빠져나온 부분이다. 처마의 깊이는 건물 규모나 채광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한옥은 대개 기둥뿌리에서 처마 끝을 연결하는 내각의 크기가 28~33도다. 이 각도는 한여름 70도 각도로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을 막아내고, 한겨울 30도 각도로 내리비추는 따뜻한 햇빛을 받아들이는 최적의 각도다. 재미있다.
내친김에 조금 더 한옥의 마력(魔力)에 빠져보자. 추녀의 양쪽 끝부분이 버선코 모양으로 살짝 휘어 오른 것을 ‘앙곡(昻曲)’이라고 한다. 지붕을 멀리서 보면 양쪽 끝부분이 무겁게 처진 듯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안구 구조 때문이다. 추녀 끝을 살짝 올려 지붕의 육중한 무게감을 없앤 것이다.

l▶양동 한옥마을 곳곳에는 식수를 공급하던 우물이 있다.

안쏠림도 한옥의 특징이다. 안쏠림은 기둥을 똑바로 세우지 않고 중심을 향해 약간 안쪽으로 기울여 세우는 기술이다. 시각적으로 건물이 바깥으로 벌어지게 보이는 것을 막는다. 기둥의 중간을 위아래보다 약간 굵게 만들어 안정감을 주는 배흘림 기법과 비슷하다.
귀솟음도 있다. 바깥쪽 기둥을 안쪽 기둥보다 높게 만들어, 중앙에서 바라볼 때 멀리 있는 기둥의 양 끝이 처져 보이는 현상을 방지한 지혜다.

l▶영화 <취화선>에서 주인공 장승업(최민식 분)이 올라갔던 고택 지붕

주춧돌도 특이하다. 자연석을 전혀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주춧돌로 사용했다. 덤벙주초다. 불안해 보인다. 하지만 불규칙한 돌의 표면과 목조 기둥의 바닥을 서로 맞물리게 가공해서 붙여놓아 미끄러지지 않고 안전하다.
서양의 집은 거실·침실·식당 등의 용도로 구분된 집 공간이라면, 한옥은 안채·사랑채·행랑채처럼 사용자를 기준으로 공간을 나눈 특징이 있다. 신분과 남녀노소의 구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도 구분했다.

l▶세운 지 500년이 지난 서백당은 아직도 살림집으로 쓰이고 있다.

위인 세 사람 탄생 전설 품은 서백당
이런 한옥의 특징을 직접 보고 싶으면 한옥마을로 가자. 경주 양동 한옥마을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한옥 집성촌이다. 지은 지 500년 된 한옥에 실제 후손들이 살림집으로 산다. 신기하다. 500년 된 목조건물이 아직도 건재한 것이다.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두 가문이 만든 양반 마을이다. 마을 북쪽에 위치한 설창산의 산줄기가 물(勿)자 모양으로 내려와 능선을 이루고, 능선이 만나는 세 골짜기 사이사이에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다. 두 가문은 서로 다른 골짜기에 자신들의 종가와 서당, 정자 건물을 두고 있다. 신분의 차이에 따라 지형이 높은 곳에 양반 가옥이 위치하고 낮은 곳에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 가옥을 에워싸듯 형성되었다. 마을 가옥의 대부분은 ㅁ자형이며 부엌은 ㄱ자형, 서당은 ㅡ자형이 대부분이다.

l▶녹이 슨 철제 문고리가 지난 오랜 세월을 이야기한다.

2010년에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1992년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방문하기도 했다. 100년 이상 된 기와집 54호와 초가집 110여 호가 마을을 이루고 향단, 관가정, 무첨당, 서백당 등 국가 민속문화재 12점, 여주 이씨 수졸당파 문중 고문서 등 도지정문화재 8점이 있다.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1491~1553) 선생을 배출한 여주 이씨, 이조판서와 대사헌, 대사간을 지낸 청백리 우재 손중돈(1463~1529) 선생을 배출한 경주 손씨가 500년 동안 경쟁과 협력을 하며 마을을 이어오고 있다. 1984년 국가 민속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두 가문은 경쟁적으로 자손을 공부시켰다. 조선 500년 동안 경주부윤 관내에서 과거시험 문과 급제자가 59명인데, 양쪽 가문에서 29명이 급제했다고 한다. 진사과에는 87명이 배출됐는데, 이 마을 출신이 35명이었다. 이 마을에는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 이전에 건축한 가옥이 네 채 있다. 그중 세 채는 보물이다.

l▶뒷마당으로 통하는 작은 문

경주 손씨의 종택인 서백당(書百堂)에 가보자.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제23호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자리 잡았다고 전해지는 양민공 손소 선생이 1454년에 지은 집이다. 이 집터는 설창산의 지맥이 응집된 곳으로 여기서 위인 세 사람이 태어날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두 위인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 첫 번째 위인은 손소의 둘째 아들 손중돈 선생이다. 또 손소의 딸이 친정에 와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동방오현의 한 분으로 불리는 이언적 선생이다. 이 가문에서는 마지막 한 위인이 손씨 집안에서 태어나길 바라는 뜻으로 딸이 시집간 후에는 친정에 들어와 출산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서백당의 ‘서백’은 하루에 백 번 참을 인(忍)자를 생각하며 살면 행복이 오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뜻의 편액이다. 선비의 정신적 여유와 사상의 깊이가 묻어난다.

l▶양동 한옥마을 뒷동산

영화 <취화선> <내 마음의 풍금> 등 무대
마당 끝에는 커다란 향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가 서백당의 역사와 함께한다. 그 크기와 기품에 눈길을 뗄 수가 없다.

l▶양동 한옥마을의 문화해설사 10명은 모두 토박이 주민들이다. 그중 최고 연장자인 이지휴 씨가 두루마기를 입고 고택을 걷고 있다.

여강 이씨의 종가댁인 무첨당(無添堂)은 서백당과 함께 풍수지리학적으로 가장 길지인 터에 지어져 있다. 무첨당 사랑채에 걸려 있는 편액 좌해금서(左海琴書)는 흥선대원군이 죽필(竹筆)로 쓴 글씨다. 좌해는 영남을 의미하고, 거문고와 책은 무첨당의 풍류와 학문을 높이 평가해 하사한 편액이라고 한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거대한 회화나무 옆에 멋들어지게 생긴 누마루 한 채가 있다. 심수정(心水亭)이다. 심수정은 벼슬길을 마다하고 형인 이언적을 대신해 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농재 이언괄(1494~1553)을 추모해 지은 정자다.

l▶양동 한옥마을에는 외국 관광객도 많이온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관광객들이 전통 한옥을 구경하고 있다.

양동 한옥마을은 여유 있는 마음으로 양반처럼 천천히 거닐며 이리저리 보는 맛이 좋다. 실제로 아직 전통 한옥에 사는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고, 초가집의 정취도 느낄 수 있다. 고택에 걸려 있는 편액의 의미를 살펴보아도 힐링이 된다. 훌쩍 조선시대 중기로 타임머신을 타고 간 기분이다. 영화 <취화선> <내 마음의 풍금> <혈의 누> <스캔들> 등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이 마을의 문화해설사는 10명. 모두 토박이 주민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고참인 이지휴(71) 씨는 젊은 시절 은행원을 하다, 사업도 하다가 귀향했다. 그의 집은 우향다옥(054-762-8096)으로 민박과 식당을 겸한다. 하루 묵으라고 우향다옥의 사랑채를 소개한다. 좁은 방이지만 정갈하다. 구들장이 뜨끈뜨끈하다. “화장실이 밖에 있어 불편하지만, 그래도 대원군이 이 마을 유람 왔을 때 10일간 머물렀던 방입니다.” 느낌이 좋다.

글·사진 이길우 자유기고가

l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 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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