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정부 전략
소재와 부품, 장비 산업은 제조업 생산 활동의 기반이다. 소재·부품·장비의 공급 기반이 튼튼해야 제조업의 안정적 성장과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 조립가공형 완제품의 수출 중심으로 성장해온 우리나라 제조업은 이제 바탕에서부터 새로운 자양분을 찾아야 한다. 소재·부품·장비 산업이 그 자양분의 원천이다.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투자에 국가 자원을 집중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소재·부품은 완제품 제조의 구성 요소로 사용되는 중간재를 뜻한다. 장비는 다양한 원자재와 소재·부품 중간재를 결합해 새로운 기능이나 형상을 갖추게 하는 기계적 장치를 뜻한다. 유엔(UN) 산업 통계와 한국표준산업분류(KSIC) 기준을 적용하면, ‘소재·부품’에 속하는 품목 수는 828개에 이른다. 이들 품목을 생산하는 국내 사업체 수는 2017년 기준 2만 5869개로 전체 제조업의 37.2%, 종업원 수는 131만 6000명으로 44.5%를 차지한다. 소재·부품 산업은 국내 제조업의 허리이자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한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다른 산업에 대한 파급효과도 크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소재·부품 산업은 기업 투자나 정부 정책 지원 대상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 있었다. 선진 제조업을 따라잡으려면 완제품 양산 기술과 설비 확충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 주요 제조업이 세계시장 경쟁에서 선발 주자 대열에 올라선 2000년 이후에는 소재·부품의 기반 강화가 국가적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01년 ‘소재·부품 전문기업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소재·부품 특별법) 제정과 함께 연구개발(R&D) 투자를 확대하는 등 정책 지원을 강화해오고 있다. 반도체, 자동차, 무선통신기기, 전기전자, 석유화학 등 주력 산업의 소재·부품 투자도 민간 대기업을 중심으로 크게 늘었다. 그 결과 2001년 230조 원 규모이던 국내 소재·부품 생산액은 2017년 743조 원으로 3.2배, 수출은 620억 달러에서 2828억 달러로 4.6배나 늘었다.
외형적 성장과 달리 구조적 취약성 여전
이처럼 소재·부품 산업이 외형적으로는 크게 성장했지만 몇 가지 구조적 취약성은 그대로 안고 있다. 수입에서는 일본과 미국 등 기술 선진국 의존도가 여전히 높은 가운데 수출은 중국 시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게 한국 소재·부품 산업의 현주소다. 일본과 소재·부품 교역에서는 만성적 적자다. 특히 첨단 기술이 적용돼 수익성과 부가가치가 높은 품목일수록 기술 자립도와 자체 조달률이 낮다. 핵심 원천기술의 개발, 전문인력 양성, 생산 기술에 대한 산업 현장의 경험 지식 축적 등에서 한국은 아직 후발 주자에 머물러 있다.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구조적 취약성은 국내 전체 제조업 생산과 거시경제 안정에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다. 일본 정부의 한국에 대한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규제가 바로 그런 위기의 신호탄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특정 국가에 의존하는 산업구조에서 탈피하는 데 경제주체들이 다 함께 힘을 모은다면 위기는 기회로 바뀔 수 있다. 이를 위한 정부와 업계의 대책 추진이 본궤도에 올랐다.
정부는 10월 11일 개최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위원회’ 1차 회의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이후 100일 동안의 대응 성과를 살펴보고, 중장기 과제의 추진 전략과 일정을 조율했다. 대통령 직속으로 9월 17일 출범한 경쟁력위원회는 민관합동 기구다.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혁신을 위한 주요 대책과 민관 공통 과제를 심의·조정하는 컨트롤타워 구실을 맡고 있다. 위원회의 핵심 의제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전기·전자, 기계·금속, 기초화학 등 6대 주력 산업 분야의 100대 핵심 전략품목(100+α)의 공급 안정망 확보와 경쟁력 강화다.
정부는 수급 불안에 따른 위험이 커 기술 확보가 시급한 20개 품목은 기술 개발 및 공급 안정화를 위한 투자가 본격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등 일본 정부가 7월 초부터 포괄허가에서 개별허가 대상으로 전환한 3개 품목도 포함된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계에서는 3개 품목의 수요 기업과 공급 기업 간 긴밀한 협력체제가 구축된 가운데 일본산 제품을 대체할 미국과 중국, 유럽산 제품의 공정 테스트가 8월 초부터 진행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테스트가 마무리되면 곧바로 국내 생산라인 신·증설 투자가 이뤄질 예정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불산액 공장 두 곳은 신·증설 라인 투자가 마무리 단계이고, 불화수소와 폴리이미드 신설공장도 각각 한 곳씩 내년 상반기 중으로 완공될 예정이라고 소개했다.
원천기술 외국기업 유치·인수합병 유도
업종별 국내 공급사슬은 취약한데 자립화에 다소 오랜 기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80개 품목에 대해서는 연구개발(R&D) 투자를 강화하는 동시에, 관련 기술을 보유한 외국 기업의 국내 투자를 유치하거나 인수합병(M&A)을 통한 기술 확보를 병행하기로 했다. 반도체 장비와 소재 분야에서는 외국 기업의 투자 프로젝트가 벌써 3건이 확인됐다. 반도체 장비업체로 ‘세계 톱 3’에 들어가는 미국 램리서치는 최근 이사회를 통해 본사 R&D센터의 한국 이전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위해 램리서치는 1차로 국내에 최소 1억 달러(약 1192억 원)를 투입하고, 300~400명의 전문인력 확보도 추진 중인 것으로 안다고 산업부 관계자는 전했다. 램리서치의 R&D센터 한국 이전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고객사와 협력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소재를 생산하는 또 다른 미국 회사와 독일계 기업도 한국 내 생산시설 투자 프로젝트를 곧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런 외국 기업의 투자가 소재·부품·장비의 공급 안정화 효과와 함께 국내 중견·중소기업의 기술력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2조 5000억 원 규모의 투자금융 조성을 목표로, 14개 단체 및 기관이 9월 초에 발족한 ‘해외 M&A·투자 공동지원 협의체’의 행보도 눈길을 끈다. 협의체의 기업 단체로는 대한상공회의소와 중소기업중앙회, 중견기업연합회, 반도체·자동차·기계·디스플레이·석유화학 협회가 손을 잡았고,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코트라)와 한국소재부품투자기관협의회(KITIA)가 지원기관으로 참여한다.
금융기관에서는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중소기업은행, 농협은행 등이 함께한다. 기업 단체와 지원기관은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원천기술을 보유한 외국 기업 가운데 투자 유치와 M&A 대상을 발굴하고 국내 관련 업계와 협력 생태계 구축을 지원한다. 금융기관들은 기업 인수나 시설 투자에 필요한 자금 공급을 맡는다. 협의체에는 특히 JP모건, 골드만삭스, UBS, 크레디트 스위스 등 세계적인 투자은행들도 자문단으로 참여해 M&A와 투자 유치 관련 정보를 제공할 계획이다.
소재·부품·장비의 기술 개발과 투자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전방위 지원은 앞으로 더욱 강화된다. 우선 정부는 핵심 기술의 조기 확보를 위해 R&D 투자 지원을 중심으로 내년부터 2024년까지 매년 2조 원 이상의 재정을 투입하기로 했다. 핵심 전략품목의 생산설비 신·증설 투자나 해외 기업 M&A와 기술 도입, 외자 투자 유치 등에 대한 세제 혜택을 확대하고, 대학과 연구기관이 보유한 원천기술의 상용화를 위한 산·학·연 협력도 촉진하기로 했다. 또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다양한 상생협력 모델에 대해서는 경쟁력위원회 승인을 거쳐 예산·세제·정책 금융·규제 특례 등을 종합한 맞춤형 패키지 지원을 적용한다.
특별법 만들고 맞춤형 패키지 지원
정부는 이런 전방위 지원 정책을 뒷받침할 관련 법령의 개편 작업을 끝냈다. 이를 반영한 핵심 법률안이 여당 소속 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9월 말 국회에 발의된 ‘소재·부품·장비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특별조치법’이다. 기존 소재·부품 특별법과 달리 적용 범위에 ‘장비’까지 들어가고, 기업 단위의 ‘전문기업 육성’이라는 목적이 산업 단위의 ‘경쟁력 강화’로 바뀌었다. 기존 특별법의 일몰(2021년까지) 조항을 삭제해 상시법으로 전환하고, 정책 추진 체계와 방식 등에도 개편 내용이 많다.
정부·여당은 특별법 개정안이 내년 3월부터 시행될 수 있도록 연내 국회 본회의 통과를 추진키로 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소재·부품·장비 경쟁력위원회에서 주요 대책의 가시적 성과를 강조했다. “20개 핵심 전략품목은 2년 이내, 나머지 80개 품목도 5년 안에 산업 현장에서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날 수 있게 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박순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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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