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청년에 의한, 청년을 위한 ‘소확행’ 공간

2019.10.24 위클리 공감 최신호 보기


l▶무중력지대 영등포 외관

청년 정책에 청년이 존재하는가? 많은 곳에서 청년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실제 청년의 목소리는 반영돼 있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서울 영등포구의 행보가 눈에 띈다. 영등포구가 최근 문을 연 청년 활동 공간 ‘무중력지대 영등포’는 공간의 목적부터 콘셉트, 디자인, 프로그램 구성까지 모든 과정에 지역 청년들이 참여했다.
영등포구는 청년 70여 명을 모집해 세 차례의 워크숍을 진행했고 실제 그들의 의견을 반영해 공간을 구성했다. 사단법인 청년과미래는 청년 정책과 관련 사업, 소통 등을 평가하는데 올해 ‘청년친화 헌정대상’으로 영등포구를 기초자치단체평가 소통부문 대상으로 선정했다.
청년들의 목소리가 담긴 무중력지대가 어떻게 구성됐는지 보기 위해 10월 1일 당산역 2번 출구를 찾았다. 출구를 나오자마자 보이는 노란 불빛의 상호는 커피숍을 연상케 했다. 50년이 넘은 옛 당산2동 주민센터를 리모델링한 건물이다. 이곳에서 공간 조성 워크숍에 참여한 영등포구 청년 임국인(23), 최지원(35) 씨와 무중력지대를 운영하는 이지영(33) 센터장, 이혜연(28) 총괄매니저를 만나 참여 과정과 앞으로 계획에 대해 들었다.

-워크숍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임국인: 청년정책위원회를 통해 참여하게 됐다. 영등포구청에서 청년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청년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만든 단체가 청년정책위원회다. 공무원, 구의원, 청년들이 모여 청년 정책의 개선 방향이나 다양한 의견 등을 내고 함께 고민하는 자리다. 영등포구청이 청년 공간을 만든다고 하기에 젊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길 것 같아서 참여했다.
=최지원: 영등포구는 노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지역이어서 지금까지 청년보다는 노년 대상의 정책이 더 많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가구 디자이너이자 목수로 활동 중이고 내년에 사회적 기업을 준비하고 있는데, 지역 기반으로 활동하다 보니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많았다.

l▶무중력지대 영등포 1층에 자리한 ‘모두의 지대’

“이야기 나눈 것과 비슷하게 만들어져 뿌듯”
워크숍은 청년정책위원회뿐만 아니라 영등포구의 청년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2018년 11월 공간 사용 목적과 콘셉트 도출(1회), 디자인 제안(2회), 도출된 안을 바탕으로 구청이 만든 계획 설계안 공유 및 공간 이름 제안(3회) 등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당신의 다음을 창조하는 공간’이라는 뜻에서 ‘Create your next’라는 슬로건을 내건 무중력지대 영등포는 카페, 멘토링 공간, 강의실, 청년 창작 및 공예 활동을 위한 배움 지대,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제작할 수 있는 미디어 공간, 공유 부엌 등으로 구성된다. 영등포구는 이곳에서 청년 문제의 현안을 논의하는 정책 포럼을 열고 커뮤니티 활동과 취미, 문화 활동 지원 등에 주력할 예정이다.

-낯선 청년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는 어떠했고 실제로 그들의 의견이 반영됐나?
=임: 청년들이 조별로 나눠 토론을 진행했는데 정말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옥상을 도시 텃밭으로 활용하고, 관련 동아리 활동을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고구마나 감자를 재배해서 하루 다 같이 구워 먹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이런 얘기였다. 실현되진 않았지만 재밌는 제안이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최종적으로 공간이 완성된 후 찾았는데 우리가 이야기한 것과 비슷하게 나와서 되게 뿌듯했다.
l▶2층 강의실│오픈놀

=최: 리모델링하기 전에 이 공간에서 토론을 했다. 이곳을 돌아보면서 어느 정도의 공간이 나오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이야기했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는데 취합 과정에서 중복되는 것을 중심으로 조성한 거다. 공유 부엌, 유튜브를 제작할 수 있는 미디어실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고. 유튜브를 하고 싶지만 스튜디오나 장비가 없는 친구들도 있지 않나.

-공공 정책에 대한 젊은 층의 관심이나 참여는 저조한 편이다. 왜 그럴까?
=최: 청년들이 원하는 게 반영되지 않으면 실망하거나 그에 대한 피로도가 높다. 몇 번 참여해서 안 되면 ‘아니면 말지, 뭐’ 이렇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이번 경우처럼 선례들이 쌓여서 ‘영등포구는 청년 정책이 잘되어 있다’는 소문이 나면 주변 청년들도 동참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중력지대가 그 시작인 만큼 잘돼야 한다.

l▶2018년 11월 16일 옛 당산2동 주민센터에서 열린 워크숍에 참여한 영등포구 청년들이 디자인 제안을 위해 다양한 사진을 검토하고 있다.│ 영등포구

“가장 인상 깊은 말은 ‘쉬고 싶다’”
-공간 사용 목적과 콘셉트를 도출할 때 내놓은 청년들의 바람은 무엇이었나?
=최: 가장 인상 깊게 들은 말은 ‘쉬고 싶다’는 얘기였다. 밖에서 치열하게 살다 보니 내려놓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지 않나. 사실 지인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고려해야 할 게 많다. 완벽하게 쉬면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모여서 밥을 먹는 모임이 생긴다면 앞으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생길 거고, 새로운 분들이 오실 수도 있다. 요즘 서로가 서로를 기피하는, 불편해하는 현상이 있지 않나. 사람들에게 치여 사는 일상이라 피곤함을 겪고 싶지 않아 사람들과 관계망에서 빠져나가는 이들이 많다.

-청년들은 왜 쉼이 절실할까. 노동 강도의 문제도 있겠지만, 불평등에 대한 정서적 요인도 있지 않을까.
=최: 기회의 평등은 없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면서 어느 지역에 사는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그것부터 출발이 달라진다. 사회가 급성장하면서 행복의 기준이 획일화됐는데 그 행복에 진입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 좋은 혜택을 본 청년들은 또 자기 자식에게 그런 혜택을 주고 싶지, 남에게 주려 하진 않을 거다.
1980년대 출생으로 돌이켜보면 우리가 자랄 때는 대기업, 공무원, 의사, 변호사 이런 직업만 부모님들이 원했다. 사교육이 발달했고. 그런 직업에만 (선호가) 몰렸고 그 직업군이 안 되면 낙오자 취급을 받는다. 누군가 낙인을 찍지 않아도 나 스스로 불편한 거다. 중소기업을 다니면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각자의 직업을 서로 존중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게 없지 않나.

l▶2019년 10월 1일 이지영 센터장(왼쪽)과 이혜연 매니저가 ‘무중력지대 영등포’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서울시가 청년들의 커뮤니티 활동과 연구를 지원하는 복합문화공간인 무중력지대는 2015년 금천구 가산동에 자리한 ‘무중력지대 G밸리’를 시작으로 8곳에 문을 열었다. 무중력지대 운영은 민간 기업이 담당하는데, 영등포는 진로 교육 컨설팅 업체인 ‘오픈놀’이 맡았다. 오픈놀 소속인 이지영 센터장과 이혜연 매니저는 청소년과 청년을 돕는 데 관심이 많아서 무중력지대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지영 센터장은 “과거 대방동 무중력지대에서 운영을 맡기도 했는데 영등포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노량진이랑 가깝다 보니 공부하러 오는 청년이 많다. 고시 공부를 하다 보면 고립감도 생겨서 한 달에 한 번 이용객들 대상으로 같이 라면도 끓여 먹고 전도 부치는 등 별도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네트워킹 프로그램을 통해 참여를 유도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혼자 살거나 부엌이 없는 고시원 등에서 생활하는 청년들을 고려해 무중력지대는 식생활을 개선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자는 취지로 ‘빛타민 데이’를 준비하고 있다. 간편식, 도시락 위주로 식사하는 청년들이 샐러드나 과일을 나눠 먹는 날이다.

l▶영등포구 청년정책위원인 최지원, 임국인 씨(왼쪽부터)

함께 라면 끓여 먹고 전도 부쳐 먹고
청년들의 불안과 쉼에 대한 갈증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혜연 매니저는 안정성 없는 사회를 불안의 이유로 꼽았다. 그는 “평생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안정적으로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확신이 없다. 평생직장을 다닐 수 있었던 부모님 세대와는 다르다. 청년들이 재테크에 관심이 많은 이유도 평생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지금 벌어들인 돈을 굴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2017년 1인 가구가 전체 인구의 27.9%다. 1인 가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청년층이 고립되지 않고 연결망을 형성하며 살아가는 데 이젠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함께 라면을 끓이고 과일과 채소를 나눠 먹는 일이 무중력지대에서 중요한 프로그램인 이유다. 공간 조성 워크숍에 참여한 두 명의 청년은 무중력지대에서 초콜릿과 도마 만들기를 하며 이웃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l▶2층 공유 부엌│오픈놀

청년 주거, 취업 문제도 정책의 영역이겠지만 청년들이 공유 공간에서 함께 차를 마시고 요리하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하게 실현할 수 있는 행복) 또한 정책의 연장선에 있다.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청년 정책을 공간으로 구현한 곳이 무중력지대다. 영등포구는 이 공간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더 빠른 방법을 택하는 대신 청년들의 얘기에 일일이 귀를 기울였다.
무중력지대 영등포는 평일 오전 10시~오후 10시, 토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에 문을 연다. 일요일과 공휴일은 휴관하며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궁금한 사항은 무중력지대 영등포(02-2671-2225)에 문의하면 된다.

글·사진 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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