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파는 ‘구독의 시대’

2019.10.28 공감 최신호 보기


l▶다양한 디바이스에서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네이버 뮤직 ‘바이브’

얼마 전, 큐아르(QR)코드를 만들 일이 있었다. 검색해보니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대거 찾을 수 있었다. 그중 상단에 있는 서비스에 들어갔더니, QR코드를 만드는 것뿐 아니라 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QR코드를 스캔했는지 온라인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능도 있었다. 막연하게 생각만 하던 기능이라 그곳에서 QR코드를 만들어 테스트해봤더니 아주 훌륭하게 작동했다. 그런데 다시 그 서비스를 찬찬히 살펴보자, 이 기능은 10일 정도의 기간에 무료로 제공되고, 그 뒤에는 요금을 내야 쓸 수 있었다. 매달 1만 5000원 정도를 내면 자유롭게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다는 안내가 보였다.
QR코드 트레킹 서비스도 월정액으로 구독하는 시대다. QR코드뿐 아니라 가구도 구독하는 시대다. 엄밀히 말해 월세도 집을 구독하는 개념이니 지금을 ‘구독의 시대’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애플뮤직, 넷플릭스, 퍼블리, 유튜브 프리미엄, 리디셀렉트, 아웃스탠딩, 바이브(네이버 뮤직), 여성 생활 미디어 ‘핀치’ 그리고 올레TV의 월정액 상품 등 내가 정기 구독하는 서비스는 대략 이 정도다.
개인적으로 일하는 분야가 분야이다 보니 엔터테인먼트 쪽에서 겹치는 서비스들도 있지만, 아이클라우드나 구글 G슈트, 어도비 등 업무용 유틸리티나 커피, 식재료 등의 영역으로 확장하면 구독 서비스 종류는 더 많아질 것이다.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사용하는 서비스가 조금 많을 수도 있겠지만, 전체 지출의 규모를 보면 대략 10만 원대이므로 큰 차이가 나진 않을 것 같다.

l▶여성 생활 미디어 ‘핀치’

‘디지털화된 정보’가 ‘재화’로 정의
애초에 정기 구독은 오래된 수익 모델이었다. 매일 아침 현관 앞으로 배달되던 신문이나 매달 발송되던 잡지 같은 인쇄 매체가 대표적이다. 심지어 매일 배달되던 우유도 마찬가지. 이런 구독 모델은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해준다. 대체로 정보를 다루는 사업은 특히 미래가 불투명하다. 얼마나 팔릴지 예측이 어렵고, 그래서 신문이든 잡지든 얼마를 찍어야 할지도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기 구독은 시장의 수요를 파악하고 적절히 대응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치였다.
이런 맥락에서 디지털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의 산업구조를 20세기와 21세기로 나눠서 살펴보자. 핵심은 ‘디지털화된 정보’가 ‘재화’로 정의된다는 점이다. 20세기에는 물성과 가치가 사실상 분리되지 않았다. 음악을 예로 들면 20세기 음악 산업의 주 수익원은 음악이 아닌 음반이었다. 음악의 가치는 음반 가격으로 치환되었고 엘피(LP), 이피(EP), 카세트테이프, 시디(CD)에 이르는 미디어 변화에 따라 수익을 좌우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디오가 등장했을 때 영화사들은 비디오 제조사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 소송을 걸었지만, 비디오가 보편화되자 극장 개봉 수입이 전부였던 시절보다 더 많은 부가 수익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비디오테이프와 레이저 디스크, DVD와 블루레이가 영화사의 주요 수익원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책도 마찬가지였다. 지식·정보도 책이라는 상품을 통해서야 수익화될 수 있었다.
그런데 21세기에 이 모든 구조가 깨져버렸다. 사실상 20세기 ‘콘텐츠’ 산업의 본질은 제조업이었는데, 디지털로 변환된 정보는 가격을 책정하기 애매하다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나마 ‘다운로드’라는 개념이 유효했던 시절, 그러니까 파일을 하드디스크에 저장하는 게 일반적이던 시절에는 디지털 파일에도 이전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었지만, 낮아진 제작 단가 덕분에 디지털 콘텐츠의 양이 급속하게 늘어난 2010년 이후, 그리고 스트리밍이 주류 미디어 환경으로 자리 잡은 2015년 이후에는 콘텐츠에 가격을 매기는 것 자체가 곤란해졌다.

l▶마음껏 즐길 수 있는 ‘넷플릭스’

서비스를 이용하는 시간이 돈
이런 이유로 나는 구독 모델이 새삼 주목받는다고 본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정기 구독’은 오래된 수익 모델이었다. 다만 그게 작동하는 방식은 상당히 달라졌다. 일단 소비자 입장에서는 구독을 해도 이전처럼 음반이나 잡지가 집에 쌓이지 않는다. 물성화된 제품을 통해 읽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읽고 보는 것의 본질적 기능에만 집중하게 된다.
한편 콘텐츠 제작자 입장에서 유료 구독은 현재로서는 광고를 제외하고 거의 유일한 수익 모델이다. 이때 ‘무엇을 파는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진다. 콘텐츠?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21세기에는 그걸로만 먹고살기 어렵다. 유통? 예나 지금이나 유통은 규모의 영역이다.

그래서 이들은 뭘 팔고 있을까? 내가 볼 때 이들은 ‘신뢰’를 판다. 이때 신뢰는 곧 브랜드 가치다. 신뢰를 팔기 위해 개인화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신뢰를 팔기 위해 콘텐츠나 서비스의 퀄리티를 높인다. 이렇게 서비스에 대한 신뢰가 보장될 때 고객은 자신의 시간을 쓴다.
맞다. 사용자는 제품이나 콘텐츠가 아니라 서비스를 이용하는 시간에 대해 돈을 낸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는 시대에는 말 그대로 ‘시간은 돈’이다. 콘텐츠 비즈니스에서 유료 구독 또한 고객의 시간을 점유하는 대가다.
이 관점으로 보면 콘텐츠뿐 아니라 식품, 생활, 의류, 공간에 이르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정기 구독 모델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새삼스럽다. 바야흐로 콘텐츠가 백화점과 경쟁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l차우진_ 음악평론가. 미디어 환경과 문화 수용자들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청춘의 사운드> <대중음악의 이해> <아이돌: H.O.T.부터 소녀시대까지…> <한국의 인디 레이블> 등의 책을 썼고, 유료 콘텐츠 플랫폼 ‘퍼블리’에서 <음악 산업, 판이 달라진다> 리포트를 발행했다. 현재는 ‘스페이스 오디티’라는 스타트업에서 팬 문화, 콘텐츠, 미디어의 연결 구조를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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