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와 부마, 40년 만에 서로를 향해 가는 길

2019.10.21 위클리 공감 최신호 보기


l▶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민·학생 시위대 행렬│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5월 광주’가 ‘10월 부마’에게
1979년 10월 16일, 1980년 5월 18일. 부마민주항쟁과 광주항쟁은 시기상으로 7개월밖에 차이 나지 않지만 서로에게 가기 위해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부마는 독재정권을 붕괴시켰지만 10·26 박정희 사망사건과 12·12 쿠데타로 항쟁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내세울 수 없었고, 광주는 도시 전체가 항쟁에 뛰어들었지만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어 다른 도시 사람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손잡아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부마는 독재자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대항한 항쟁이었고, 광주는 전두환과 신군부 쿠데타 세력의 폭력에 맞서는 항쟁이었습니다. 부마와 광주는 7개월의 시차를 두고 일어난 항쟁인데 국민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대상은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겉으로 보면 별개의 사건처럼 보입니다.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신군부 쿠데타
1997년 4월 29일, 2019년 9월 17일. 부마민주항쟁과 광주항쟁은 그 의미를 인정받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도 광주는 17년이 지난 1997년인 데 비해 부마는 40년이 되어서야 가능했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이 광주항쟁보다 일찍 일어났지만 국가기념일 지정은 광주가 더 빨랐고, 부마는 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1979년에서 40년이 지난 2019년에야 부마는 제대로 조명받기 시작했으며, 광주도 이제야 부마와 관계를 진지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광주는 광주가 겪은 상처에만 집중했고, 광주가 이룬 성취만을 강조해왔습니다. 부마는 잊고 지냈습니다. 광주는 부마의 아픔을 잘 알지 못했고, 부마는 광주의 깊은 상처를 보고 차마 자신들의 고통을 꺼내놓을 수 없었습니다. 광주는 이제야 부마의 헌신과 희생을 마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두 항쟁을 내적인 연관 속에서 파악하고 위치 지으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만족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부마에서 광주까지’라는 표어도 있고 “부마민주항쟁이 없었다면 광주항쟁은 가능하지 않았고, 광주항쟁이 없었으면 부마민주항쟁도 잊혔을 것”이라는 주장과 연구 결과도 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전히 부마와 광주는 서로를 절실히 원하지 않았습니다. 간혹 부마와 광주는 자기들 것만 강조하느라 서로의 존재를 놓치기도 했습니다. 부마와 광주는 시간상으로는 단절되었고 공간상으로는 분리돼왔습니다.
더구나 1987년 이후 한국 정치 상황은 부마와 광주를 내적 연관성이 아닌 경쟁 관계, 우열 관계로 보도록 부추겼습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영호남으로 분열되면서 부마와 광주는 서로의 연관성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항쟁이라는 본래 의미와 긴밀한 상호 연관성은 적극적으로 부각되지 못했습니다. 1979년과 1980년의 긴박함과 역동성은 하나의 연속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박정희는 시해당했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법적인 처벌을 받았으며, 민주적인 정부도 구성되어 역사의 큰 진전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수상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국민의 힘으로 구속시켰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국민 화합과 용서라는 명분으로 슬그머니 사면하더니, 다른 한편에선 독재자 박정희가 부활하고 있었습니다. 부마민주항쟁 자체가 부정되는 일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광주항쟁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북한 특수군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확산되더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부마와 광주의 치열한 저항의 역사, 이를 통해 이루어낸 민주주의와 성과가 하나둘씩 부정되는 상황에 부딪혔습니다. 부마와 광주를 단절적으로 이해한 결과였습니다. 지만원은 더 기세등등하고, 전두환은 회고록을 써서 역사적 평가를 모두 부정하려 했습니다.

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난 부마와 광주
다행스럽게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국민의 촛불항쟁과 박근혜 탄핵을 거치면서 박정희 부활 시도는 좌절되었습니다. 전두환도 회고록에 의한 명예훼손과 5·18진상규명특별법이 제정되어 제대로 된 진상규명의 심판대에 서야 할 상황입니다. 우리는 역사 부정이라는 일련의 상황을 겪으면서 부마와 광주는 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서로의 연관성을 놓치면 광주는 끊임없는 왜곡과 고립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마 또한 광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으면 잊히고 맙니다. 비로소 부마와 광주는 서로를 절실히 원하며, 상대방이 없으면 제대로 설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마와 광주는 홀로 서려고 했을 때 제대로 설 수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부마와 광주는 그런 점에서 예전과 다릅니다.
시간을 40년 전으로 되돌려보면 부마민주항쟁과 광주항쟁은 시간과 장소만 다를 뿐 모두 민주화를 위한 절박하고 격렬한 항쟁입니다. 시기적으로는 7개월, 공간적으로는 200~250km 떨어져 있을 뿐입니다. 올해는 부마민주항쟁 40년이 되는 해로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고 정부 주관의 첫 기념식도 열렸습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전국민주시민 합창축전, 상황 재현 문화제, 기념표석 건립 제막식, 국제학술대회, 민주대동큰잔치, 음악회, 뮤지컬 공연, 중등교재 전달식, 부마민주음악제 등 다양하고 풍성한 행사가 열려 부마민주항쟁의 의미를 더합니다.

부마와 광주는 서로의 지름길을 애써 외면하다 넘어지고 상처를 입으면서 서로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부마와 광주는 그동안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지름길로 가지 않다가 지구를 한 바퀴 빙 돌고 나서야 절실한 마음으로 다시 만나는 느낌입니다. 아래의 시처럼 우리는 빙 둘러서 가는 멀고 굽은 길인 에움길을 걸어 서로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40년 만에 비로소.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중략) //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나희덕, ‘푸른 밤’)

이기봉 5·18기념재단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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