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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 공원에도 어느새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 화살나무보다 단풍나무의 빨간 빛깔이 유독 눈에 띈다. 왜 가을이 되면 빨갛게 단풍이 드느냐고 궁금해하던 우리 아이도 지금쯤은 그 까닭을 알고 있겠지. 겨울이 되면 녹색의 엽록소가 줄어들다 보니 그 안에 숨어 있던 ‘안토시아닌’이라는 빨간 색소가 나타나면서 진딧물 같은 벌레들에게 ‘나는 이렇게 독한 성분을 내년에도 많이 만들 수 있으니 절대로 나에게 알을 낳지 말라’고 신호를 보내는 일종의 경고란다.
어느 시인은 ‘초록이 지쳐서 단풍이 든다’고 했는데 과학자나 시인이나 모두 그럴듯한 생각이라고 공감하면서,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빨간 단풍잎과 노란 은행잎 하나를 주워 누군가에게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다.
빨간 단풍처럼 한 벌뿐인 원색의 옷을 입고 동네 우체국 앞에 단정하게 서 있는 우체통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는 청마 유치환 시인의 고즈넉한 연민처럼 다산 정약용의 글 한 구절도 덩달아 떠오른다.
‘객 창 한등 잠 못 이뤄 외로이 앉았더니/ 첫닭이 홰를 치며새벽 소식 알릴 무렵/ 집에서 보낸 편지 내 손으로 뜯어보네/ 이 어찌 상쾌하지 않을쏘냐.’
타향에서 귀양살이 중에 받아보는 편지에 대한 다산의 마음이 어쩌면 명절날 자식을 기다리는 고향집 부모의 마음이나 군대 간 아들의 첫 편지를 받아보며 목이 메는 어머니의 애틋한 가슴앓이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을 것만 같다. 누군가에게 안부를 전하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음성과 영상으로 듣고 볼 수 있는 스마트폰이라는 디지털보다는 그래도 가끔은 단 한 문장, 한 줄일망정 자필로 안부를 전하면 어떨까 싶다.
쓰는 이의 체취와 마음까지 느낄 수 있어 언제고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서 다시 읽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전화보다도 어느 면에서는 편지라는 아날로그가 더 친근하면서 소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편지를 한자로 ‘편할 편(便)’과 ‘조각 편(片)’을 써서 ‘편지(便紙)’와 ‘편지(片紙)’라고 함께 쓰는 것은, 생각날 때면 아무 때나 작은 종잇조각에라도 부담 없이 편안하게 마음을 담으라는 의미일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했으므로 행복했다’는 청마 유치환은 불혹의 나이에도 한 여인에게 20여 년간 2000여 통의 연애편지를 보내다 보니 통영우체국 1위 고객으로도 유명했다는 일화에 혼자 웃는다. 그가 죽고 난 1년 뒤에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책도 남겼다고 하니 청아한 이 가을 하늘처럼 순수한 시인의 마음이 참으로 하얀 박꽃처럼 아름답게 느껴지는 가을이다.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이었지만 청마가 그토록 사랑했다는 연서(戀書)의 주인공 이영도 시인의 모습이 파란 통영 앞바다에 단풍잎처럼 곱게 투영되는 시간이다.
‘여자는 편지의 추신 외에는 본심을 쓰지 않는다’는 어느 분(R. 스틸)의 말이 있긴 하지만, 빨간 단풍잎이나 노란 은행잎 하나 얹어 그동안 못다 한 나만의 본심을 편지에 꾹꾹 눌러 보내는 가을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도 지나고 보면 모두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박경섭 경기 화성시 동탄중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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