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아우라 미술관의 아우라

2019.10.21 위클리 공감 최신호 보기


l▶영화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 포스터, 디자인: 솔 배스, 1955년. 이 포스터는 복제 예술품으로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컬렉션했다. 포스터에는 솔 배스의 사인이 있다. 사인이 없는 포스터와 있는 포스터는 사실 똑같은 복제 예술품일 뿐이다. 복제 예술품에는 원본이 없다.

미술관이라는 근대의 제도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예술품을 수집하고 연구하고 전시하는 구실을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아주 중요한 역할은 미술관이 소장한 예술 작품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숭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이 미술관에 들어가서 작품을 볼 때 갖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자. 관객은 그곳에 전시된 작품을 이해하건 말건 그것이 어떤 탁월한 성취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미술관의 전시품에 대해서는 면밀하게 따지고 자기의 주관을 세워 판단하기보다는 믿고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놀라운 태도다. 자신의 주관적 판단을 약간 보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때 사람들은 자신의 주관적 판단을 굳건하게 믿고 선택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상품을 구매할 때뿐 아니라 영화를 볼 때, 노래를 들을 때, 소설을 읽거나 인터넷에서 기사를 볼 때도 예민한 감각과 촉수의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그런데 미술관에만 들어가면 그러한 감각과 촉수가 무뎌지는 이유는 왜일까?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 많아서일까? 그러면 영화나 노래, 기사를 이해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의 태도는 어떨까? 대개는 그냥 무시하고, 나아가 혐오하고 경멸하기까지 한다. 반면 이해할 수 없는 미술관의 작품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자신의 이해 부족을 교양 결핍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예술품에는 어떤 ‘아우라(aura)’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그의 유명한 논문인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아우라에 대해 설명한다. 역사적으로 예술 작품은 제의(신에 대한 숭배와 제사)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즉 예술 작품은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신을 대신하는 상(조각 또는 이미지)으로 탄생하게 되는데, 사람들은 그 상에서 아우라를 느낀다. 아우라를 느낀다는 것은 그 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맹목적으로 그 상을 숭배하게 된다. 그런데 베냐민은 아우라가 원래 그 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실체가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대하는 ‘심리적 태도’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l▶고대 그리스 제우스 신전의 상상도. 고대인들은 현대인과 달리 신을 묘사한 조각상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숭배했다.

고대인과 현대인이 보는 차이
예를 들어보자. 예전에 모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TV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방송 진행자가 당선인을 보면서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그 아우라는 그 당선인에게 정말 존재하는 아우라인가? 결코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아우라가 없다고도 단언할 수 없다. 그 당선인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아우라가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아우라는 심리적인 태도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제의적 기능을 수행했던 조각이나 이미지로 돌아가보자. 그것을 보는 현대인들은 그 조각에서 신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그 상의 형식적 특징에 눈을 돌리게 된다. “눈이 너무 큰 거 아닌가? 상체가 지나치게 크고 하체가 빈약하네. 콧날이 날렵하네.” 뭐 이런 반응일 수 있다. 현대의 관객은 고대의 제의적 기능을 담당한 상에서 아우라를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그런 상을 숭배하므로 아우라를 느끼면서 그 상의 형식적 특징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대인과 현대인이 상, 즉 예술 작품을 보는 태도의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최고 권력자를 보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거의 임금은 물론 지금의 대통령도 주관적으로 냉정하게 논리적으로 판단하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최고 권력자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므로 임금에게서도 아우라를 느낀다. 따라서 아우라는 존재한다고 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l▶루이 14세 초상, 이아상트 리고, 1701년. 왕의 초상은 관객으로 하여금 왕이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 왕의 아우라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다. 이초상을 보는 당대의 관객과 우리는 전혀 다르게 작품을 감상한다.

고대에 제의적 기능을 했던 예술은 근대 이후에는 전시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이제는 예술 작품이 신의 숭배라는 기능에서 탈피해, 즉 순수한 예술 작품으로서 숭배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아우라는 바로 예술 작품 자체에 붙어 있게 된다. 하지만 이 역시 정말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마치 그런 게 있는 것처럼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을 수행하는 기관이 바로 미술관이다.) 그런 태도를 유발해내는 방법 중 하나가 그 작품의 유일무이성이다. ‘모나리자’는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루브르미술관에 있는 것이므로 그 가치가 엄청나다. 베냐민은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예술 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 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다.” 예술 작품은 반드시 그것이 있는 장소, 그 시간에만 유일하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고귀하고 유별난 성격이다. 그것이 ‘진품성’의 개념이다. 진품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아우라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주관적 비평을 멈추게 만든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주관적 비평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아우라의 존재를 무시해야 한다.)

l▶샘, 마르셀 뒤샹, 1917년. 뒤샹은 대량생산된 변기를 전시장에 갖다 놓는 행위를 통해 순수 예술작품의 숭배를 조롱했다. 그가 전시한 진품(?)은 사라졌다. 하지만 미술관은 복제품을 찾아내 그 복제품에 희귀성을 부여해 기어코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복제 예술품의 진품성?
그런데 복제 예술 작품은 어떨까? 복제 예술이란 현대의 복제 기술, 즉 사진이나 인쇄를 통해 만든 예술 작품을 말한다. 포스터가 대표적인 사례다. 수천 개, 수만 개로 복제되는 포스터는 그야말로 진품성, 원본 따위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아우라는? 당연히 없다.
나는 얼마 전 어떤 미술관에서 이 복제 예술의 컬렉션 심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 이때 심사위원 중 한 명이 그 포스터의 진품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내 생각은 이렇다. 포스터 등의 기술복제 예술 작품에서 진품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런데 왜 그것을 따질까? 미술관이라는 제도가 갖는 본질적 성격 때문이다.

아우라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포스터에는 그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면 방법이 있다. 예를 들면 그 포스터에 디자이너의 사인이 들어가 있다든지, 그 포스터가 수만 장의 복제품 가운데 첫 번째로 인쇄된 것이라든지… 참 억지스럽지 않은가? “그냥 복제 예술품은 컬렉션을 하지 마세요. 의지도 없고 욕망도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싶다.
마르셀 뒤샹은 예술 작품을 우상화하고 숭배하고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게 역겨워서 대량생산되는 변기를 전시장에 내놓았다. 그랬더니 미술관은 그것에 아우라를 씌워 다시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어놓았다. 미술관이란 그런 곳이다.

l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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