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정부 예산안 국회 심의를 앞두고 확장적 재정정책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뜨겁다. 정부는 9월 초 국회에 제출한 내년 예산안에서 총지출 규모를 올해 본예산보다 9.3% 늘어난 513조 5000억 원으로 짰다. 또 재정지출의 연평균 증가율을 6.5%로 추정한 중기(2019~2023년) 재정운용계획도 함께 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올해에 이어 재정지출 증가율이 2년 연속 9%대를 유지하고 있다. 경상성장률과 재정지출 증가율의 차이 등 여러 기준으로 모두 따져봐도 확장적 재정 기조로 볼 수 있다”며 “우리 경제의 어려운 대내외 여건을 엄중히 인식하고 경제의 하방리스크가 커졌다는 우려에 따라 적극적 재정정책으로 최대한 경기를 뒷받침하겠다”고 밝혔다.
경기침체 국면에서 재정지출을 늘려 경기회복을 촉진하는 것은 역대 정부에서 늘 봐온 거시 정책이다. 하지만 내년 정부 예산안과 중기 재정운용계획의 목표는 단순한 경기부양을 넘어선다. ‘국민 중심, 경제 강국’을 표방하며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의 가속화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적극적 소득재분배와 사회안전망 강화를 통한 국민 삶의 질 개선, 새로운 성장 동력 발굴과 경제체질 개선 등에 초점을 맞춘 지출 예산이 크게 늘었다.
한 나라의 경제주체를 기업·가계·정부로 나눈다면, 문재인정부 출범 뒤 경제 활력을 지탱하는 정부(재정)의 힘이 기업과 가계보다 커지고 있다. 2018년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7%, 정부 지출의 성장기여도는 0.9%포인트를 기록했다. GDP에 대한 정부 지출의 성장기여도가 0.9%포인트라는 것은, 재정지출 규모가 전년도 수준(성장기여도 0%포인트)이었다면 2018년 경제성장률은 1.8%에 그쳤다는 뜻과 같다. 2017년에는 3.2% 경제성장률에 정부 지출 기여도가 0.7%포인트였다. 경제성장률은 3.2%에서 2.7%로 떨어졌지만 재정의 성장기여도는 올라갔다. 경기하강을 방어하는 데 재정이 그만큼 기여했다는 얘기다.
재정지출의 확대가 둔화하는 경기에 그나마 활력을 불어넣는 흐름은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7월 발표한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2.5%에서 2.2%로 낮췄다. 민간소비 증가율이 2018년보다 떨어지고, 설비투자와 건설투자는 감소하며, 세계 교역의 둔화와 반도체 업황 부진 등으로 상품 수출은 제자리에 머물 것이라는 전망이 성장률을 하향 조정하게 된 이유다. 성장 전망을 밝게 하는 요소는 확장 기조가 유지되는 재정지출뿐이라는 게 한은의 진단이다.
경기 침체-소비 감소-실업 증가 악순환 제동
경제 규모나 발전의 성숙도를 기준으로 적절한 비교 대상과 견줄 경우, 사실 한국의 재정 비중과 역할은 ‘적극적’이라는 평가를 받기에는 미흡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인구수 1000만 명 이상이면서 2018년 기준 1인당 GDP가 2만 달러 이상인 국가는 15개국이다. 여기서 한국의 2018년 경제성장률 2.7%는 미국, 체코, 호주에 이어 네 번째로 높다. 그런데 GDP에 대한 정부 지출(최종 소비)의 비중은 15.9%로 회원국 평균 19.8%보다 훨씬 낮으며, 미국 빼고는 꼴찌다. 재정지출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이유는 재정의 수입이나 조달 창구가 그만큼 좁기 때문이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한국의 조세부담률은 OECD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조세부담률은 GDP에서 정부가 기업과 가계로부터 걷는 조세수입의 비중이다. 2015년 기준 조세통계를 작성한 OECD 33개 회원국의 평균 조세부담률은 25.0%인데, 한국은 이보다 6.5%포인트 낮은 18.5%였다. 한국보다 조세부담률이 낮은 국가는 터키(17.8%), 멕시코(14.0%) 두 곳뿐이다.
수출 의존도가 높고 내수 기반은 약한 한국 경제는 대외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다. 실제로 2018년 하반기부터 미중 무역갈등의 심화, 보호무역주의 확산, 중국을 비롯한 신흥 경제권의 투자수요 정체 등으로 세계 경기의 둔화가 본격화하자 우리 경제의 성장 활력은 더욱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일본의 수출규제는 생산의 국제분업 질서에 기반을 둔 성장 모델의 취약성까지 확인시켜주고 있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정부가 통제하기 힘든 대외 변수 때문에 경제의 변동성과 불확실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완화하려면 좀 더 크고 튼튼한 재정의 힘이 필요하다.
생산가능인구의 감소와 급속한 고령화 추세의 사회·경제적 파급 영향까지 고려하면 재정을 동원한 정부의 선제적 대응은 더욱 긴요하다. 경기 침체와 성장 잠재력의 저하가 지속되는 가운데 미래에 대한 불안감까지 확산되면 기업과 가계의 예비적 저축 동기가 커진다. 즉 불안한 미래에 대비하려고 투자와 소비를 더욱 줄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기 침체를 더 가속화해 실업 증가 등으로 경제적 손실과 사회적 비용은 계속 증가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런 악순환을 막는 게 재정의 기본적인 역할이다. 경기 침체의 늪에서 조기에 탈출하고 성장 잠재력을 높이는 것은 장기적인 재정 건전성 확보에도 도움이 되는 길이다. 경기 침체에 대한 선제적 대응 수단으로 완화적 통화정책도 동원할 수 있다. 하지만 통화정책은 이미 완화적이며 추가 여력이 거의 고갈 상태에 있다. 한은이 7월 경제성장률 전망치 하향 조정과 함께 기준 금리를 1.75%에서 1.50%로 내려 역대 최저 수준에 근접해 있다. 대내외 금리 차이에 따른 금융과 환율 불안 가능성, 가계부채 문제의 악화 우려 등을 고려하면 통화정책의 추가적인 완화에는 신중론이 우세하다.
경제 전반 구조개혁 함께 추진해야 효과
‘중앙은행들의 중앙은행’으로 통하는 국제결제은행(BIS)은 최근 내놓은 금융안정 보고서에서 “미국과 중국 간 무역갈등이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상황에서 각국 중앙은행이 과도한 경기부양 부담을 지고 있다”며 “중앙은행들의 통화정책 조정 여력이 갈수록 줄어 경제에 또 문제가 생기면 이번에는 경제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진단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4월부터 9월까지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 경제권은 물론이고 신흥국 중에서도 75%가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또 미국과 독일 같은 주요 선진국의 국채 금리는 8월을 전후해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이며,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금리가 마이너스인 국공채의 거래 규모는 8월 말 기준으로 17조 달러에 이른다. 독일을 비롯한 유로존에서는 마이너스 금리의 국공채 거래 비중이 50%를 넘어섰고, 일본은 40%에 육박한다. BIS 보고서는 “투자와 소비 진작을 위해 취해진 주요국의 금리 인하가 금융시장에는 오히려 경기 악화의 신호로 통하는 바람에 안전 자산인 국공채 투자에 돈이 과도하게 쏠린다”며 “이에 따라 경기 둔화는 지속되는 가운데 물가는 좀처럼 오르지 않고 금융의 불균형과 불확실성만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BIS 보고서의 결론은 각국 중앙은행이 기준 금리를 더 내리기 힘든 초저금리 상황에서는 결국 정부가 재정을 풀어 경제를 떠받쳐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확장적 재정정책은 민간 부문에서 투자나 소비 확대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경제의 침체 국면은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 민간소비와 투자가 살아나려면 기업과 가계의 재정에 대한 신뢰가 높아져야 한다. 재정 건전성의 일시적 악화를 감수하더라도 정부가 과감하고 지속적인 재정확장정책을 펴겠다는 의지와 능력을 보여야 기업이나 가계가 반응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OECD는 올해 초부터 우리 정부에 재정정책의 중기적 확장 기조를 권고하거나 지지한 바 있다. 재정 활동을 통해 단기적인 경기회복이나 경제 안정 효과에 머물지 말고 꾸준히 경제 전반의 구조 개혁과 생산성 향상, 노동시장 참여율 제고, 사회안전망의 강화 등을 함께 추구해야 성장 잠재력까지 다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2020년 정부 예산안은 바로 그런 중장기 목표까지 염두에 둔 정책 구상이다.
성장과 분배 선순환 위해 재정 확보 필수
총지출 예산 513조 5000억 원은 ‘혁신성장 가속화’ ‘경제활력 제고’ ‘포용국가 기반 공고화’ ‘국민 생활의 편익·안전 증진’ ‘튼튼한 국방·외교’를 5대 중점 투자 방향으로 설정해 편성됐다. 유엔(UN) 기준에 따라 구분한 12대 분야별 지출 증가율(2019년 본예산 대비)에서는 산업·중소기업·에너지 분야가 27.5%로 가장 높고, 이어 환경과 연구개발(R&D) 분야가 각각 19.5%와 17.7%씩 늘어 뒤를 이었다. 핵심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자립화, 시스템 반도체 등 3대 핵심산업 육성, 인공지능(AI) 사회 전환을 위한 플랫폼 투자 확대, 주력 제조업의 투자 및 수출 활력 제고 등에 필요한 재정 투입이 크게 확대된다.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지출 증가액 규모에서는 보건·복지·노동 분야가 압도적이다. 이 분야의 내년 지출 예산은 올해보다 20조 6000억 원(12.8%)이 증가한 181조 6000억 원으로, 전체 예산의 3분의 1가량을 차지한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의 부양 의무자 기준 추가 완화, 청장년층 근로소득 30% 공제, 고용보험 사각지대에 놓인 20만 명의 구직자를 대상으로 최대 6개월 동안 월 50만 원씩 지원하는 ‘국민취업지원제도’ 시행, 고교 무상교육 대상 확대, 노인 기초연금 인상, 청년추가고용장려금 대상 확대, 청년층과 신혼부부 대상 임대주택 공급 확대 등이 내년 지출 예산의 증가 요인이다. 산업 경쟁력 강화와 R&D 투자, 복지 확대, 고용 활성화, 사회안전망 강화, 생활밀착형 SOC(사회간접자본) 투자 등을 위한 재정 투입은 중기(2019~2023년) 재정운영계획에서도 확장 기조가 유지된다. 계획 기간 동안 전체 지출 예산의 연평균 증가율이 6.5%인데, 산업·중소기업·에너지는 12.4%, R&D는 10.8%, 보건·복지·노동 분야의 재정지출은 9.2%씩 늘리는 것으로 정부가 계획을 짰다.
확장적 재정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적자 재정’이다. 정부 수입보다 지출 규모를 더 늘리는 게 확장적 재정 운영이다. 정부는 중기 재정운영계획에서 앞으로 5년 동안 재정 총지출의 증가율을 연평균 6.5%로 잡았는데 총수입 증가율은 3.9%이다. 또 총수입 대비 총지출 증가율을 5년 평균으로 2.6%포인트 높게 잡았다. 이는 직전 중기 재정운영계획상의 (총지출 증가율-총수입 증가율) 차이(2.1%포인트)보다 더 확대한 것이다. 이에 따라 통합재정수지가 2020년부터 적자로 돌아서 계획 기간 내내 적자 운영을 지속하는 것으로 추계했다. 통합재정수지를 4년 동안이나 적자로 계획한 것은 2006년 국가재정운영계획 수립 이후 최초다. 재정 적자가 해마다 쌓이면서 올해 기준 37.1%로 예상되는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2021년에는 40% 선을 넘어서고, 2023년에는 46.4%까지 높아진다. 수입보다 지출을 많이 늘리는 재정 운영은 적자 국채 발행을 통해 이뤄진다. 채권 발행으로 4~5년 재정 확장은 가능할 수 있지만, 부채를 통한 재원 조달을 무한정 지속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튼튼한 재정을 뒷받침할 재원 확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재정지출의 확대에 대한 논의만 활발할 뿐 재정 확보에는 모두 소극적이었다.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위해서라도 세출 구조조정과 같은 중장기 재원 확보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박순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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