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기와 최갑순과 옥정애는 77학번 동급생에다 시위 계획도 함께 모의했던 사이,’ (‘강남 유치장’)
‘윤정오는 가야백화점에서 신발장사를 했다 검거된 사람 가운데 제일 나이 많았다’ (‘슬픈 후일담’)
우무석(60)의 시집 <10월의 구름들>은 1979년 부마민주항쟁에 나섰던 마산의 정성기, 최갑순, 옥정애, 박인준, 윤정오, 정인권의 모습을 던져 놓는다. ‘삐라’ 살포를 말로만 계획하다 고향집에서 아버지와 점심 먹다 연행되고, 밤중에 자기 집 유리창이 깨져 밖에 나갔다가 돌팔매질 한 번 했다는 이유로 잡혀가고, 경남대학교 앞마당에서 욕설을 섞어가며 분통을 터뜨리고, 다음주 예정된 중간고사 준비를 하지 않던 대학생은 휴교령 방송을 듣고 좋아하다가 강의실에서 쏟아져 나온 학생들과 어울려 10·18마산항쟁 대열에 합류한다. 우 시인의 시집은 정념이나 이념이 아닌 1979년 10월 마산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상을 기록했다. 부마항쟁을 그린 몇 편의 시는 나왔지만, 시집으로서는 2014년 발간한 <10월의 구름들>이 처음이다. 2014~2016년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을 지낸 우 시인은 부마민주항쟁 특별법 발의와 ‘국무총리소속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출범에 힘썼다. 1979년 부산과 마산 등 경남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인 부마민주항쟁이 최근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가운데 10월 7일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의 카페에서 우 시인을 만나 소회를 들었다.
▶비가 내리는 10월 7일, 경남 마산 경남대학교인근에서 만난 우무석 시인은 뜨거움과 혼란, 좌절과 패배감을 오롯이 겪어낸 이들이 가진 단단함과 담담함으로 지나간 시간을 말했다.
“부산-마산 기억 따로여서 연결점 필요”
-우 시인은 당시 경남대 2학년이었고, 학보사 기자였다. 경남대에서 시위가 있을 거라는 인지는 했지만 1979년 10월 18일 터질 거라는 예상을 못했다는 회고를 읽은 적이 있다.
=경남대 국어교육과 최갑순, 옥정애 등 선배들이 10월 22일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학보사 편집장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학내 문제를 꼬투리 삼아서 시위를 시작하고 방송실을 통해 시위를 알린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4일 앞선 10월 18일, 학교 측에서 미리 휴교 방송을 한 게 촉매제가 됐다. 어쩌면 교수들 쪽에서도 시위 정보를 미리 접했을지도 모른다. 경남대 연못 주변에서 얼쩡거리는데 휴교 방송이 나왔고 도서관 옥상에서 애들이 올라가서 구호를 외쳤다. 노인정이라고 불리는 전나무가 있는데, 정인권 학생이 선동 구호를 외치고 일부 학생들이 학장실을 점거하겠다고 했다. 그러다가 나는 어영부영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그렇게 흥분한 상태로 18일 마산의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됐다.
-<10월의 구름들>은 현대사를 관통하는 역사 시집이며, 기록이고 기억이다. 일반적인 시를 쓰는 과정과 어떤 점에서 달랐나?
=이런 시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사명감은 없었는데 해마다 기념식 때 축시 정도만 매번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 시위에 참여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인지가 되는데, 그렇지 않은 시민들의 경우 피상적으로밖에 알 수가 없지 않나. 지금도 틈틈이 부마에 대해 이어서 쓰고 있는 중이다.
-부산과 마산의 학생에게 부마민주항쟁은 집단 기억으로 남아 있겠지만, 한국 전체의 그리고 미래 세대의 공통 기억으로는 남아 있지 않다.
=일단 공통의 기억이 되기에는 지역이 나눠져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부산은 부산의 기억으로만, 마산은 마산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책에서 기록된 것들을 통해서 알지만 겪지 않은 것은 기억이 아닌 인지일 뿐이다. 제가 겪은 것도 있고, 마산만큼은 함께 했던 친구들을 모을 수가 있다. 그러나 부산의 기억은 요원한 부분이 있고 이렇게 연결점을 찾기 위해 학술이라는 부분이 필요하다.
“진상 조사하러 나와 그냥 휙 훑고 지나가”
-‘정곡 탑리에서’를 보면 시인에겐 부마민주항쟁을 거친 뒤의 부채의식이 남은 것처럼 보였다. ‘얇따란 흙밥더미 이랑사이 서툴게 그어진/서너 고랑 그마저도 삐뚤빼뚤/일한 것도 아니고 아니한 것도 아닌/헐수할수 없는 사태에 난감해 했지’ 이런 대목들이 그랬다.
=부채의식이라고 할 것은 없다. 제 친구 남기제가 피해야 할 것 같다고, 자기 집으로 같이 가자고 해서 1979년 10월 19일 친구를 만나 농사 짓는 아버지에게 갔다. 보리 파종을 하던 때였다. 친구 아버지가 소를 데리고 밭을 갈라고 했는데 소를 몰 줄 몰랐다. 소가 이리 저리 휘몰고 다니는데, 그 당시 공화당의 상징이 황소였다. 황소에 휘둘려서 다니는 그런 의미로 썼는데 독자들은 부채의식으로 보더라. 내가 한 상징은 황소가 말을 안 듣는다는 것, 공화당 상징이 황소이고, 우리가 휘둘리고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 우리가 한다는 짓거리가 겨우 엉망으로 선을 남긴 것 밖에 없지 않느냐는. 실패담을 적은 것일 수 있다. 그 시를 쓸 당시에는 국가기념일이 될 거라고 생각 안 했다. 유치준 씨의 경우 사망자로 인정 받을 거라 생각 안 해 봤고(부마민주항쟁 당시 주검으로 발견된 유치준 씨는 최근 국가로부터 사망자로 인정받았다). 조사조차도 안 되는 부마항쟁, 뭐 그런 심정이었다.
-2014년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 심의위원회가 출범하긴 했지만, 독재 미화 의식이 보이는 인사가 포함되는 등 심의위 구성이 편파적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당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진상 규명 과정은 어떠했는가?
=그 분들이 유치준 씨 문제를 조사하러 왔는데 그냥 휙 훑었다.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 (실무)위원인 정인권 씨가 유치준 씨 문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만든 자료집을 다른 위원에게 나눠주는 일조자 못하게 했다더라. 정인권 씨가 위원장에게 크게 항의했고 끝내 조사위원들 자리에 올라가지 않았다. 유치준 씨의 죽음, (국가에 의한 사망이라는) 근거를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보고 제시하라고 하는데 벌써 그분 시신을 검시했던 의사는 십 년 전에 돌아가셨고 목격했다고 하는 분을 찾아갔더니 기억이 오래돼 진술을 못하겠다고 했다. 여러 가지 논리적 정합성을 만들려 노력했는데 (조사위원은) 허투루 듣고 그랬다. 이야기를 해도 ‘아, 예, 그런가요’ 해놓고 보고서를 엉망으로 쓰고. 돌아가신 유치준 씨 부인이 있는데 기념사업회에서 설 명절이 되면 조그만 선물 들고 인사를 간다. 갈 때마다 벌 받으러 가는 기분이었다. 그때 우리는 박근혜정부 때 특별법을 만들어 진상조사팀을 꾸린 것, 그 자체가 우리의 잘못이라고 자탄을 했다. 심의위 2기도 박근혜정부까지 일부는 ‘이상한’ 사람들로 구성이 됐는데 문재인정부 들어서 급물살을 타게 됐다. 저는 개인적으로 (문화계) ‘블랙 리스트’에 올라가기도 했다.
“국가기념일 지정보다 더 큰 건 진상규명”
-부산에서 시작된 부마민주항쟁이 다른 경남 지역도 아닌, 마산으로 불이 붙었다. 마산만의 특유한 정서적, 정치적인 영향이 있었나?
=3·15의거의 전통이 있었다(1960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반발하여 마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3·15의거 정신이 학생들에게 자부심으로 남아 있었고 공간은 떨어져도 부산이 저러는데 우리도 함께 해야 한다는 연대 의식이 작용했다. 3·15의거에 대해 마산 사람들은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부마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을 때 어떤 감정이 들던가?
=우리 동기, 친구들, 이런 분들에겐 독특한 슬픔이 있다. 사실 저는 (경찰에) 잡혀 가지 않아서 정신적으로는 성하고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고 시를 쓸 수도 있다. 그런데 시월 바람이 불면 자기가 입고 있는 옷조차도 아프게 느껴질 정도로 떠는 여인들이 있다. (국가기념일 지정으로) 그 분들을 치유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분노를 쉽게 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아무데서나 성질 안 부리겠구나, 이들을 위해서 잘된 일이다, 싶었다. 또 하나, 새롭게 분열하면 안 되는 거다. 그때의 용기, 작은 자기의 공명심을 찾는다거나 명예를 추구하거나 그런 것들로 분열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더 중요한 것은 진상조사위원회가 법률적으로 12월 말이면 끝난다. 국가기념일 지정보다 남아 있는 (진상 규명에 대한) 일이 더 크다. 진상조사위원회가 끝나 버리는 것에 대한 대책은 있어야 한다.
-10월만 되면 아프다는 피해자들은 시위 당시 경찰에 잡혀가서 어떤 일을 당한 것인가?
=이야기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성적인 대목이 있어서. 성적 학대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가혹한 구타는 기본이고 여성으로서 특별하게 겪는 것들이 있지 않나. 생리 같은. 잡혀 갔는데 생리대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이 갖고 있는 절망적인 수치심, 부끄러움. 여성에게 잔인한 짓이었다. 어떤 남성은 완전히 알몸으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경찰이) 삼십 센티미터 자로 국부를 때려가면서. 그 사람은 이빨을 간다. 만나면 죽이고 싶다고.
-시인으로서, 또 부마항쟁을 겪은 증인으로서 살아갈 날들은 어떠할까?
=부마 시편을 완결시켜야 할 것 같다. 시집 한 권은 작은 분량이지만, 제대로 된, 마산만의 부마민주항쟁에 대해서라도 어느 정도 완성된 시편들은 있어야 되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
“화려한 수사나 표현 없이 아무렇지 않게 서술해놓은 듯한 무기교와 무형식의 수사학은 10·18의 풍경을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로 그려내는 데 기여한다.”
김문주 영남대 교수가 <10월의 구름들>에 대해 쓴 문학평론이다. 1979년 10월 마산 사람들의 겪어야 했던 시간은 눌변의 시학을 통해 드러난다. 스무 살 대학생은 40년이 지나 예순 살의 시인이 되었다. 비가 내리는 10월 7일, 경남대 인근에서 만난 우 시인은 뜨거움과 혼란, 좌절과 패배감을 오롯이 겪어낸 이들이 가진 단단함과 담담함으로 지나간 시간을 말했다. 어떤 미화나, 영웅감도 드러내지 않은 마산의 보통 사람으로서 말이다.
글·사진 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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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