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한국에 대한 일본 수출규제의 위법성 여부가 결국 세계무역기구(WTO)에서 가려지게 됐다. 우리 정부가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 수출규제를 정치적 동기로 이뤄진 협정 위반 행위로 판단해 WTO에 제소했고, 일본 정부는 절차에 따라 한국 정부와 협의 하겠다고 통보해왔다. 꽉 막혀 있던 두 나라 정부 간 공식 협의 창구가 WTO 제소를 계기로 열리는 셈이다. 양자협의는 이르면 10월 초 시작해 두 달여 동안 진행된다. WTO 분쟁 해결 절차에서 펼쳐질 한일 간 ‘통상 격전’에 전 세계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우리 정부가 일본에 대한 WTO 제소를 공식화한 것은 9월 11일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의 기자회견을 통해서다. 유 본부장은 “일본 수출규제의 부당성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추가적인 수출규제 조치를 사전에 예방할 필요도 있다고 판단해 WTO 제소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제소장 효력을 지닌 한국 정부의 협의 요청서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WTO 사무국과 일본대사관에 전달됐고, 일본 정부 역시 9월 20일 같은 창구를 통해 양자협의 수락 의사를 공식 서한으로 통보했다. 이에 앞서 스기와라 잇슈 신임 일본 경제산업상은 자국 기자들과 간담회에서 “세계 각국은 국제 합의를 근거로 수출관리를 해오고 있다. 일본은 안보상 이유로 3개 품목의 수출관리제도를 변경한 것일 뿐인데 WTO 협정 위반이라는 지적은 전혀 맞지 않다”며 “이런 인식을 갖고 양자협의를 통해 일본의 입장을 확실하고 엄숙하게 밝히겠다”고 말했다.
한·일 통상 격전에 전 세계 눈길 쏠려
그러나 스기와라 경제산업상의 주장과 달리 일본의 수출규제가 WTO 주요 협정에 배치된다는 근거는 차고 넘친다. 일본 정부는 오사카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직후인 7월 4일, 한국만을 겨냥한 수출규제 조치를 갑자기 발표했다.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포토레지스트(감광액),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핵심소재 3개를 한국으로 수출하는 기업에는 기존 3년짜리 포괄허가를 개별허가 대상으로 전환해 일일이 심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또 관련 기술의 이전에 대해서도 경제산업성의 개별허가를 받도록 했다. 이런 조치가 왜 부당한지는 우리 정부가 WTO와 일본 정부에 전달한 협의 요청서에 잘 정리되어 있다.
정부는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가트), 무역 원활화에 관한 협정(TFA), 무역 관련 투자 조치에 관한 협정(TRIMs), 무역 관련 지식재산권에 관한 협정(TRIPs), 서비스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S), WTO 설립을 위한 마라케시 협정 등 모두 6가지 다자간 협정을 근거로 일본의 수출규제를 문제 삼았다. 우선 가트 1조 1항의 최혜국 대우(MFN) 위반이 가장 중대한 사안이다. 최혜국 대우란, WTO 회원국 간 상품 교역이나 투자에 대한 조건은 모든 회원국에 동일하게 적용하고 특정 국가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 통상질서의 핵심 원칙이다. 일본 정부가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갑자기 한국에만 적용한 것은 최혜국 대우, 즉 차별 금지 의무 위반이다.
일본의 수출규제는 ‘무역에 영향을 주는 조치는 상대국 정부나 기업이 사전에 인지할 수 있도록 일관되며 공평하고 합리적인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가트 10조와 TFA 2조에도 저촉된다. “일본 정부는 아무런 사전 예고나 통보 없이 수출규제 조치를 발표한 뒤 3일 만에 전격적으로 시행해 이웃 나라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보여주지 않았음은 물론 절차적 정당성도 무시했다”는 게 우리 정부 입장이다. ‘수출입에서 할당제나 수출입 허가를 통해 수량을 제한할 수 없다’는 가트 11조 위반 소지도 제기된다. 일본 정부는 기존에 자유롭게 교역하던 3개 품목에 대해 계약 건별로 반드시 개별허가를 받도록 규제하면서 사실상 수량을 통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3개 품목을 사용하는 한국 기업들은 이전에는 주문 뒤 1~2주 안에 조달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90일까지 소요되는 일본 정부의 허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정부는 협의 요청서에서, 3개 품목의 기술 이전을 포괄허가에서 개별허가로 전환한 조치는 지적재산권과 투자 관련 협정에도 어긋남을 적시했다. 일본 정부가 3개 품목의 기술 이전에 일종의 장애물을 만든 것은 TRIPs 3조와 4조, 또 특허권자에게 특허를 이전하고 사용 허가를 체결할 권리를 보장하지 않은 것은 28조를 위반했다고 봤다. 산업부 관계자는 “일본은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뿐 아니라 설계·제조·사용 단계의 관련 기술을 한국으로 이전할 때마다 개별허가를 받도록 했다”며 “이는 일본 또는 제3국 회사가 한국에 자회사를 세워 제품을 생산하는 것도 방해한다는 점에서 부당한 투자 제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6건 중 최종심 마무리 4건 판정승
앞으로 한국과 일본 정부는 두 달여 동안 진행될 양자협의에서부터 치열한 공방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와 산업계가 우리 정부의 WTO 제소와 관련해 집중적으로 내세우는 논리는 요건 미비다. 수출규제로 인한 한국 기업의 피해가 구체적으로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소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본전자정보기술산업협회(JEITA)와 일본화학공업협회(JCIA)는 최근 한국 정부에 전달한 의견서에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에 사용되는 3개 소재 가운데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는 수출규제 조치 이후 3건의 허가가 나오는 등 한국 기업의 소재 조달 구조에 실질적 변화가 없다”며 양국 간 갈등 확산을 우려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협정에 위배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소 요건을 갖춘 것으로 판단한다. 또 일본 정부의 조치 이전 포괄허가제 적용 때와 비교해 분명히 무역 제한적인 상황이 발생했고,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업이 느끼는 불확실성이 높아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양국 간 입장 차이가 워낙 커 양자협의에서 타협점을 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양자협의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제소 주체인 한국 정부가 WTO 분쟁해결기구(DSB)에 1심 재판부에 해당하는 패널 설치를 요청하게 된다. 국제 통상 전문가들로 구성되는 패널은 당사국 보고를 토대로 본격적인 심리를 8개월여 동안 진행한 다음 시비를 가리는 보고서와 이행 권고안을 채택하는 방식으로 1차 절차를 마무리한다. 당사국 중 한쪽이 패널 보고서를 수용하지 못하면 15개월 이내에 다시 상소기구 설치를 요청해 최종 판단을 구한다. WTO 절차를 통한 분쟁 해결은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이상 걸릴 수도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WTO를 통해 지금까지 6건의 분쟁 조정 절차를 거쳤는데, 최종심까지 마무리된 4건에서는 모두 한국이 ‘판정승’을 거뒀다. 4건의 분쟁을 제소 주체로 나누면 한일이 각각 반반씩이다.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것은 ‘김’ 분쟁이다. 2004년 우리 정부가 일본의 한국산 김 수입 할당제(쿼터제) 철폐를 요구하며 WTO에 제소했는데, 이듬해에 일본이 수입 물량을 5배 늘리기로 하면서 제소 취하로 마무리됐다. 두 번째 분쟁 역시 한국의 제소였다. 일본이 하이닉스의 반도체 D램 수출가격에 정부 보조금이 반영되어 있다며 2006년 1월부터 27%의 상계관세를 부과하자, 우리나라는 두 달 만에 WTO 분쟁조정기구 제소 절차에 들어가 최종심까지 1년 8개월여 동안 다툰 끝에 승소했다. WTO 상소기구의 판정과 시정 권고에 따라 결국 일본 정부는 2009년부터 해당 상계관세를 폐지했다. 9월 10일 최종심 보고서가 공개된 ‘공기압 전송용 밸브’ 분쟁에서는 WTO 상소기구가 13가지 쟁점 가운데 10가지에 대해 한국 쪽 손을 들어줬다. 일본산 공기압 밸브가 너무 헐값으로 판매돼 국내 산업에 손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우리 정부가 2015년 8월 11.66~22.77%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결정을 내리자 일본이 이듬해 3월 한국을 제소하면서 불거진 분쟁이다. 당사국 협의와 1심 패널 판정, 이에 대한 양국 상소를 거쳐 상소기구의 최종 판정까지 3년 6개월여 동안 분쟁이 이어졌다.
▶8월 1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8·15 제74주년 아베 규탄 및 정의 평화실현을 위한 범국민 촛불 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한겨레
최종심 나와도 마찰 해소까진 먼 길
한국과 일본의 통상 분쟁이 가장 극적으로 전개된 것은 한국의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에 대한 WTO 판정이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하자 우리 정부는 인근 8개 현에서 생산된 수산물 일부에 대해 수입 금지 조치를 내렸고, 2013년에는 방사능 오염수가 해안으로 유출된 사실이 밝혀지자 후쿠시마 인근 모든 수산물 수입 금지와 함께 일본산 수입식품에 대한 검사증명서 요구를 강화하는 내용의 규제를 단행했다. 그러자 일본은 WTO 위생 및 식물위생(SPS) 협정의 차별 금지 조항에 위배된다며 2015년 5월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2018년 2월 WTO 패널 1심 보고서에서는 일본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판단이 나왔다. 그러나 올해 4월 나온 최종 상소기구의 판결에선 한국 정부가 1심을 뒤엎고 승소했다. 우리 정부가 1심 패소 뒤 다시 치밀한 대응 논리와 실증 근거로 무장해 거둔 외교적 성과다. 이 사건은 SPS 협정과 관련한 WTO 분쟁 처리 절차에서 1심 결과가 뒤집힌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국제적으로도 큰 평가를 받는다. 국제 환경단체인 그린피스는 “방사능 유출에 따른 잠재적 위험에서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권리이자 의무다. WTO가 수산물 방사능 오염에 대한 공중보건 관점의 가장 엄격한 기준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판결이다”라는 논평을 내기도 했다.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최근 한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통상 분쟁에서는 승리에 이르는 왕도가 있는 게 아니라, 철저한 대응 논리와 노력의 결과를 기대할 뿐이다. 후쿠시마 수산물 분쟁에서 이긴 팀과 민간 전문가들이 이번 소송에도 참여해 자료 분석과 검토 작업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일본과 대결에서도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발언이다.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의 근거로 내세우는 일본 쪽 논리가 오락가락하는 것도 승소 가능성을 높여준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국가 간 신뢰 관계의 손상을 언급하다가 갑자기 한국의 전략물자 관리에 부적절한 사례가 발견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더니 지금은 안보상 이유라고 말을 바꿨다. 유 본부장은 “일본이 구체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면서 신뢰 훼손, 안보 예외 등 계속 논리가 바뀌고 있다”며 “이는 스스로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부당한 차별 조치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WTO 분쟁 해결 절차에서는 사실 승패가 100% 가려지는 경우는 드물다. 최종심 결정이 나오더라도 당사국 간 마찰이 깔끔하게 해소되기도 어렵다. 분쟁 발생 이전의 단계로 회복되기까지 길고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WTO는 당사국 간 합의에 따른 해결책을 우선적으로 선호한다. 우리 정부의 궁극적 목표도 일본의 수출규제를 조속히 철회시키는 것이다. WTO 제소는 안전하고 유력한 보조 수단일 뿐이다.
박순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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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