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AOA│연합
가요계에는 ‘걸그룹 생명주기 3년설’이라는 게 있다. 보통 걸그룹이 데뷔하고 전성기를 맞기까지 1년 정도 걸리는데, 이후 2년 동안 두 번가량 콘셉트를 바꾸다 자연스레 인기가 사그라든다는 설이다. 그러고 보면 대체로 3년 이후에도 최고 전성기를 유지한 걸그룹은 소녀시대 정도뿐, 드물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건 정말일까? 최근 사례들을 보면 ‘걸그룹 3년설’이 깨지고 있는 것 같다.
먼저 트와이스가 있다. 올해로 데뷔 3년 차인 트와이스는 ‘Fancy’를 발표하기 전에는 ‘마의 3년 차’로 이후 활동을 보장하기 어려울 거라 예상됐다. 트와이스의 귀엽고 경쾌한 콘셉트도 슬슬 식상하거나 후발 경쟁자에 밀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Fancy’는 그 분위기를 바로 뒤엎으며 트와이스의 영향력을 상승시켰다. 엠넷의 예능프로그램 <퀸덤>은 아예 데뷔 3년 이상 걸그룹을 출연시켜 경쟁하는 콘셉트를 가졌다.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출연자는 박봄을 비롯해 에이오에이(AOA), 마마무, 러블리즈, (여자)아이들, 오마이걸 등이다. 최근 이 프로그램에서 성역할을 뒤집는 퍼포먼스를 보인 에이오에이는 단번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물론 이 프로그램이 ‘경쟁’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은 문제적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경쟁 자체에 대해선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진다. K–팝은 고비용 고효율 구조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인데, 유행으로 치부할 수 있는 규모도 아니고, 타이밍도 지나버렸다. 2019년 현재 K–팝은 한국 음악 산업을 정의하는 핵심 구조로, 애초 자본 없이 뛰어들 수 없는 분야가 되었다.
이때 굳이 왜 그런 경쟁 구도에 뛰어들어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의지나 선택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환경에서, 실제로 매일 수백 곡의 음원이 다양한 경로로 유통되는 환경에서 프로페셔널은 음악의 퀄리티만큼 사업적 비전과 성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음악 산업에서 경쟁이 심화된다는 것은 단지 무한한 경쟁자가 등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가 한없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남자 아이돌–여자 아이돌 다른 수익구조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 음악의 시장 경쟁력이 유지된다. 아이러니하다. 무수히 데뷔하는 신인 가수들, 그들과 경쟁하는 기존 가수들, 그 구조에서 새로운 음악 경쟁 프로그램을 고안하는 미디어 구조 안에서 한국의 음악 시장은 끓어오르는 중이고, 나는 이 시점에서 경쟁 시스템은 당분간 지속되리라고 본다. 그리고 경쟁의 구조화는 결과적으로 시장의 양극화를 가속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경쟁이 사라지거나 무의미하다는 말 대신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걸그룹의 다양화는 이에 대한 힌트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걸그룹 3년설은 사실 아이돌 중심으로 재편된 음악 산업의 수익 구조에 기인한 가설이었다. 여기서 ‘아이돌 중심으로 재편된’이라는 말은 가수들이 데뷔와 함께 활동의 기반으로 팬덤을 구성한다는 뜻이다. 팬덤은 지속적으로 반응하고 소비하는 충성도 높은 그룹이다. 이것은 단지 누군가의 팬이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를 위해 지갑을 연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소비의 중심에는 대체로 20~30대 여성이 자리 잡았다. 그래서 남자 아이돌 그룹이 여자 아이돌 그룹보다 장기적인 수익모델이 가능해진다. 철저하게 이성애적 구도에서 콘셉트를 결정하는 아이돌 시장에서 걸그룹은 섹시함 아니면 청순함 외에는 다른 콘셉트를 건드리지 못하고, 이 구조 안에서 걸그룹은 좀 더 섹시하고 좀 더 청순한 신인들과 무한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따라서 여기서 가장 큰 경쟁력은 콘셉트가 아니라 나이가 된다. 다시 말해 걸그룹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확실한 여성 팬덤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남자 아이돌 그룹들과 경쟁해야 한다.
이렇게 수익 구조의 기반이 다르기 때문에 여자 아이돌의 활동은 보통 음원 발매, 차트 진입, 축제와 지역 행사 같은 수익 모델을 중심으로 유지된다. 남자 아이돌이 음원-음반-행사-콘서트-굿즈로 수익 모델을 다양하게 확장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양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걸그룹 3년 주기설은 설득력을 가진다.
▶<퀸덤>에 출연 중인 오마이걸│오마이걸
무대 위 여성 무대 밖 여성과 소통 시작
대중의 관심을 끌고 유지하기 위해 섹시–청순–도발 등 콘셉트를 바꾸는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그만큼 속도전에 말려드는 것이다. 하지만 팬덤의 충성도는 콘셉트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의 감정에 대해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콘셉트란 달리 말해 외형적인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길 때 주로 외모로 인한 경우가 많다. 예쁘고 잘생긴 누군가는 확실히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그런데 그에게 빠져드는 것은 그와 대화를 하고 그의 얘기를 들을 때다. 그가 가진 생각, 관점, 취향, 입장 등이 그 사람을 ‘특별하게’ 만든다. 팬덤의 마음도 결국 이런 구조를 따른다. 팬덤에게 애정의 대상인 스타·아이돌은 특별한 존재다. 그러니까 대체 불가능한 존재다. 그 이유는 그저 예쁘고 잘생겨서가 아니라 특별한 요소가 그의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콘셉트 중심으로 활동하는 걸그룹은 이런 연결 고리를 만들기 어렵다. 남성 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콘셉트를 반복하고 그 안에서 소비되다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걸그룹의 행태는 이런 순환 구조를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인다.
<퀸덤>은 이제까지 섹시한 콘셉트로만 소비되던 걸그룹에게 자신들의 이미지와 음악을 재해석할 기회를 부여한다. 에이오에이의 무대를 기획한 지민은 ‘짧은 치마’ 같은 곡으로만 기억되던 에이오에이를 전복적인 무대 연출이 가능한 팀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마마무의 무대를 보는 많은 사람은 그들에게 ‘멋있다’는 표현을 쓴다. 무대 위 여성들이 무대 밖 여성들과 소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구조가 이성애적 구조 안에서 고정된 성역할을 반복 재생산하던 아이돌 시장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차우진_ 음악평론가. 미디어 환경과 문화 수용자들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청춘의 사운드> <대중음악의 이해> <아이돌: H.O.T.부터 소녀시대까지…> <한국의 인디 레이블> 등의 책을 썼고, 유료 콘텐츠 플랫폼 ‘퍼블리’에서 <음악 산업, 판이 달라진다> 리포트를 발행했다. 현재는 ‘스페이스 오디티’라는 스타트업에서 팬 문화, 콘텐츠, 미디어의 연결 구조를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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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