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 궁금증이나 지적인 정보를 알려주는 것은 주로 백과사전이나 분야별로 엮은 전문적인 사전이 전부였다. 그래서 어느 집이나 국어사전, 동식물 사전, 한자사전 한두 권은 갖추고 있었다. 남달리 호기심이 많았던 탓일까. 사전류를 모으는 유별난 취미 때문에 속뜻 사전, 꽃말 사전, 속담 사전은 물론 문장 사전과 어원 사전, 별난 정보 사전까지 구색을 갖추다 보니 아이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24시간 전용 가정교사가 곁에 있어 항상 든든했다. 지금이야 인터넷만 검색하면 웬만한 것은 다 해결되니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 세상인가. 그래도 필요한 사전 몇 권쯤은 곁에 두라고 권장하고 싶은 시간에 창밖을 보니 벌써 감나무에도 가을이 깊어졌다.
짜증스럽던 폭염도, 늦게 찾아온 태풍도 적지 않은 피해만 앙금으로 남기고 떠났지만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시련 때문인지 여과되지 않은 막말과 은어가 난무하는 것이 ‘여북했으면’ 하고 이해는 가지만 자라나는 아이들을 볼 때 몹시도 민망하고 거북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고’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세 번만 참을 수 있다면 어떨까. ‘한가로운 소리 말라’는 따가운 핀잔도 있겠지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도가 넘는 언어들이 파란 가을 하늘처럼 조금은 자제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인생은 한 권의 책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매일매일 그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창작하고 있다’고 <파랑새>의 작가 마테를링크는 말하지만, 그 인생의 책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책과 다른 점은 두 번은 쓸 수 없다는 점이다. 세상의 책은 수정하거나 바꿀 수 있어도 우리 인생의 책은 다시 쓸 수 없다는 이 말에 공감하는 가을이다. 그만큼 매사에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사불급설(駟不及舌)’이라고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빠른 마차라도 혀의 빠름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말은 한번 내뱉으면 빨리 퍼지고 또 취소할 수도 없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논어> 속 이 말을 추석도 지나 모두가 떠나버린 허전한 가슴에 꼭 보듬어 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공자가 평소 능변을 싫어한 이유 중 하나는 가볍고 매끄러운 언어 사용으로 말들이 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망설임과 신중으로 말을 하기 전의 시간과 말하고 난 후의 시간까지도 함께 중요시했던 것은 말의 가치와 책임을 다하는 말의 침잠(沈潛)까지 소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처세술의 하나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와 상대방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경청(傾聽)’이 아닌가 싶다. 이웃 간에도 가족 간에도 조급한 판단으로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이 되지 않도록 심사숙고하는 자세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으면 좋겠다. 가장 좋은 대화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경청이다. 경청의 3단계 중 1단계는 귀로 듣는 것이며 2단계는 눈으로 듣는 것, 3단계는 마음으로 듣는 것이라 한다.
머지않아 서리가 내리고 부지깽이도 덩달아 바빠진다는 상강(霜降)이 오기 전에 우리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닫혔던 모두의 마음을 활짝 열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끌어안는 바른 세상이 되기를 소망하는 계절,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다.
박정덕 경기 안성시 비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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