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에서 동지로 다시 만난 한선수(왼쪽)와 유광우│연합
2007년 11월 2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2007~2008 프로배구 남자부 신인 드래프트. 같은 세터 포지션인 22세 두 청년의 운명이 엇갈린 날이다.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진 LIG손해보험(현 KB손해보험)은 당시 대학 최고 공격수였던 인하대 출신 김요한을 지명했다. 그런데 2순위는 확률 35%의 대한항공이 가져갈 것이라고 예상됐지만 의외로 확률 15%의 삼성화재가 그 행운을 잡았다. 대한항공은 3순위로 밀려났다. 동시에 유광우와 한선수, 두 동갑내기 친구의 진로도 뒤바뀌었다.
2순위의 행운을 잡은 삼성화재는 당시 최고의 세터 최태웅을 보유하고도 유광우를 지명했다. 반면 대한항공은 인하대 출신의 유광우를 뽑고 싶었지만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항공은 어쩔 수 없이 한양대 출신의 한선수를 2라운드 2순위로 지명했다.
뒤바뀐 운명, 신의 한 수
그런데 대한항공은 드래프트가 끝난 뒤에도 유광우를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문용관 대한항공 감독은 인하대 감독 시절 가르쳤던 유광우에 대한 집착이 컸다. 대한항공은 한선수와 진상헌, 두 선수를 묶어서 삼성화재에 유광우와 2 대 1로 트레이드하자고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은 단칼에 거절했다. 훗날 이것은 ‘신의 한 수’가 됐다.
유광우와 한선수는 1985년생 동갑내기다. 유광우는 배구 명문 인창고를 거쳐 인하대에서 대학 최고의 세터로 활약했다. 한선수는 수원 영생고를 졸업하고 한양대에 진학했지만 유광우에게 가려져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유광우는 대학 1학년 때인 2004년 제12회 아시아 청소년 남자배구 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자신은 세터상의 영예를 안았다. 대학 무대에서는 04학번 동기인 공격수 김요한, 임시형과 함께 인하대를 대학배구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유광우는 프로팀 삼성화재에 입단했지만 발목 부상으로 수술과 재활을 반복했다. 발목 신경이 크게 손상하는 바람에 병역도 면제될 정도였다. 그가 이름값을 하기 시작한 것은 프로 3년 차인 2009년부터다. 부산 IBK 기업은행 국제배구대회에서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경기에 출장해 팀의 첫 컵대회 우승에 기여했고, 특히 주전 세터 최태웅이 현대캐피탈로 이적한 2010~2011 시즌부터 주전 세터를 꿰차면서 삼성화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유광우는 특히 선수 생명이 끊어질 위기에서 재기에 성공해 더욱 큰 박수를 받았다. 삼성화재 입단 이후 여러 차례 발목 수술을 받는 바람에 순발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진통제를 맞으며 경기에 출전하는 투혼을 보였다.
배구에서 세터는 야구의 투수에 비견될 만큼 경기를 주도하는 팀의 핵심 요원인데, 언제 어디서건 볼이 올라오면 공격수에게 볼을 뽑아줘야 하는 상황에서 발목 통증은 부지런히 코트 구석구석을 움직여야 하는 세터에게 치명타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유광우 선수는 불굴의 의지로 투혼을 발휘하며 삼성화재를 6년 연속 챔피언 결정전 우승으로 이끌었다.
특히 2010~2011 시즌에는 정규리그에서 세트당 11.743개의 세트 성공률을 기록하며 6개 구단 주전 세터 중 1위에 올랐고, 볼을 올려줄 때 범실도 6개로 가장 적었다. 이런 활약으로 최태웅에 이어 세터로서는 역대 두 번째로 시즌 MVP에 도전했지만 아쉽게 실패했다.
그사이 한선수도 크게 성장했다. 2009~2010 시즌이 분기점이었다. 대한항공은 우승 후보라는 평가가 무색하게 시즌 초반 4승 5패로 부진하자 진준택 감독을 경질하고 현역 시절 ‘컴퓨터 세터’라는 별명처럼 당대 최고의 세터로 이름을 날린 신영철 감독대행이 팀을 이끌었다. 신 감독대행은 한선수를 주전 세터로 기용했는데 신 감독대행이 들어선 직후 12경기에서 11승 1패를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한선수의 기량 발전이 곧 대한항공의 전력 상승으로 이어진 셈이다. 여세를 몰아 대한항공은 이듬해 팀 사상 최초로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다.
프로배구 V리그 또 다른 볼거리로
삼성화재의 유광우와 대한항공의 한선수는 2010~2011 시즌부터 세 시즌 연속 챔피언 결정전에서 맞붙었다. 그러나 결과는 번번이 삼성화재의 승리였다. 그러나 한선수는 2013년 프로배구 최초로 연봉 5억 원 시대를 열며 상한가를 쳤다.
잘나가던 한선수는 국가대표 발탁이 유력한 상황에서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을 1년가량 앞두고 갑작스럽게 군 복무를 하게 됐다. 나이 제한으로 상무에도 입대할 수 없었다. 그나마 2012년에 결혼해 자녀가 있었기 때문에 2013년 11월 5일부터 21개월 동안 상근예비역으로 복무했다.
그러나 한선수는 2015년 군 복무를 마치고 코트로 돌아온 뒤 기량이 더욱 만개했다. 2016~2017 시즌부터 3년 연속 팀을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시켰고, 2017~2018 시즌에는 대한항공을 팀 사상 최초로 챔피언에 올려놓기도 했다.
반면 유광우는 2017~2018 시즌 박상하의 보상 선수로 정든 삼성화재를 떠나 우리카드로 이적했다. 이적 후 첫 시즌과는 달리 2018~2019 시즌에는 한국전력에서 이적해 온 노재욱에게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출전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국 유광우는 이번 시즌을 앞두고 한선수가 몸담고 있는 대한항공으로 둥지를 옮겼다. 대한항공은 주전 세터 한선수가 국가대표의 일원으로 내년 1월, 2020 도쿄올림픽 아시아 예선에 나갈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그 공백을 메워줄 적임자로 유광우를 영입한 것이다.
친구이자 라이벌인 두 선수는 지금까지 국가대표팀에서만 동료로 만났을 뿐 소속 팀에서 한솥밥을 먹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느덧 서른다섯 베테랑이 된 한선수와 유광우를 앞세워 대한항공이 팀 사상 최초로 통합 우승을 달성할 수 있을지, 오는 10월 12일 막을 올리는 이번 시즌 프로배구 V리그의 또 다른 볼거리다.
김동훈_ <한겨레>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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