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반 고흐 인사이드> 포스터
언제부터인지 스텐실 글자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올해 초 서울 정동 성공회성당 앞에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이 생겼다. 그 옆을 지나다가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포스터를 보았다. 여기 쓰인 글자가 스텐실 글자다. 고양아람누리 전시장에서 하는 <북한특별사진전> 전시회를 보러 갔다. 이 전시회 포스터도 스텐실 글자다. 그뿐만이 아니다. 연극 <에쿠우스> 포스터, <반 고흐 인사이드 2> 전시회 포스터, 56회째를 맞는 수원화성문화제 포스터도 스텐실 글자다.
나는 일종의 직업병으로 거리를 걸으면 늘 간판 글자의 스타일을 확인한다. 그런데 스텐실 글자들이 종종 눈에 띄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꽤 지난 일이지만, 종로에 있는 유명한 영어 학원인 YBM도 스텐실 스타일로 로고를 바꾼 걸 확인한 적이 있다. 2018년 개관한 아모레퍼시픽 사옥 안의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로고 역시 스텐실 글자다.
스텐실 기법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스텐실 기법은 종이나 벽 같은 평평한 면에 글자나 무늬를 새길 때 그 외곽선을 기계적으로 똑바르게 처리하려는 욕구에서 탄생했다. 그러니까 사람이 손으로 직접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 그 외곽선이 자연스럽게 구불구불해진다. 아무리 숙련된 장인이라 해도 자를 대고 긋는 선처럼 완벽한 직선을 그릴 수는 없다. 하지만 손을 대신하는 도구를 최종 화면과 손 사이에 개입시키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곡선이라고 해도 연필이나 붓으로 그릴 때는 그 선의 연속성이 서투름으로 투박해지기 쉽다. 이런 것을 방지하고자 스텐실 기법이 동원되는 것이다.
▶2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매쉬>의 타이틀은 군대와 전쟁을 상징하려는 의도에서 스텐실 글자로 디자인했다.
애초엔 군대나 공사장에서 주로 쓰여
종이 위에 원하는 모양의 그림을 그려서 그 외곽선을 따낸다. 그러면 그 모양대로 종이에 구멍이 난다. 구멍 난 종이를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면에 고정한다. 그 위에 스프레이든 붓이든 색을 칠한다. 마지막으로 구멍 뚫린 종이를 걷어낸다. 그러면 화면에는 외곽선이 삐뚤빼뚤하지 않게 자를 대고 그린 듯 정확하게 새겨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기법으로는 자세한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기법으론 실루엣 무늬밖에 얻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얼굴이나 영문 알파벳 O자나 한글의 ㅇ자를 생각해보자. 종이에서 동그라미를 파내면 그 내부의 구멍이 전부 사라진다. 얼굴의 경우에는 눈과 코, 입을 표현할 길이 없고, O자는 획의 굵기를 나타낼 수 없다. 그냥 일장기 같은 단일한 색의 구멍일 뿐이다. 따라서 스텐실에서는 ‘브리지(bridge)’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그림 6). 이 브리지가 바로 스텐실 글자의 묘미다.
▶3 1969년 밀턴글레이저가 디자인한 포스터에 쓰인 스텐실 글자는 <매쉬>의 타이틀과 달리 상징성이 아니라 스타일로서 쓰였다.
글자에서는 브리지가 필요한 경우가 있고, 필요 없는 경우가 있다. 영문의 A, B, D, O, P, Q, R, 한글의 ㅁ, ㅂ, ㅇ, ㅍ, ㅎ처럼 닫힌 공간이 있는 문자는 브리지가 필요하지만 C, E, F, ㄱ, ㄴ, ㄷ처럼 닫힌 공간이 없는 문자는 굳이 브리지가 없어도 된다. 그런데 ‘하늘공간’이라는 글자를 스텐실 기법으로 표현해보자. 그러면 ‘하’와 ‘공’이라는 글자의 동그란 부분에만 브리지가 생기고 나머지 글자에는 브리지가 없다. 그러면 그것이 마치 실수처럼 보일 것이다. 왜 그곳만 글자 획이 뚫려 있지? 따라서 전체 글자에 시각적 일관성을 줄 필요가 있다. 브리지가 없어도 되는 글자에도 브리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바로 이 시각적 특징이 스텐실 글자의 묘미인 것이다.
▶4 <북한특별사진전–두 개의 자화상, 동질과 이질의 간격> 포스터
스텐실 기법은 같은 글자를 여러 곳에 쓸 때 그 글자들을 모두 동일한 형태로 만들어준다. 일종의 대량생산인 셈이다. 이 스텐실 글자가 주로 쓰이는 곳이 있었다. 바로 군대와 공사장이다. 군대에서는 건물의 벽이나 군용차량 같은 곳에 글자를 쓸 일이 생기는데, 사람이 붓으로 쓸 경우 절도 있게 쓸 수가 없다. 군기가 중요한 군대에서 인간적인 자연스러운 획, 지글지글한 선은 엄정해야 하는 군대의 특성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스텐실 기법을 사용해 똑바른 글씨를 쓸 수 있다. 공사장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경고의 의미로, 또는 회사 이름을 가림막이나 벽에 쓸 일이 생기는데, 이 또한 엄격하게 써야 효과가 있다. 따라서 스텐실 기법을 활용한다.
글자가 주로 쓰이는 이런 역사적 성격에 따라 스텐실 글자에 어떤 의미가 달라붙게 된다. 그것은 군대, 전쟁, 공사, 임시변통 같은 의미다. 과거에는 스텐실 글자 하면 군대나 공사판이 떠올랐다. 따라서 군대나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의 타이틀 디자인에 종종 스텐실 글자가 쓰였다(그림 1). 하지만 그 글자의 미학적 가능성을 본 몇몇 디자이너가 그런 의미와는 전혀 관계없이 스텐실 글자들을 자신이 디자인한 포스터나 광고에 사용하기 시작했다(그림 1·3·4·7).
▶5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로고
미국 디자이너 밀턴 글레이저가 주목
대표적인 사람이 미국의 디자이너 밀턴 글레이저다. 그가 디자인한 스텐실 글자는 군대나 공사와는 관계없이 그저 하나의 스타일로 인식된다. 스타일이 된 스텐실 서체는 이제 스텐실 기법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활자로서, 또 디지털 폰트로서 재현된다.
▶6 스텐실무늬의 용어. 닫힌 공간의 내부를 아일랜드라고 한다. 닫힌 공간에 작은 통로를 만들면 그것이 브리지가 된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긴다. 오늘날 한국에서 왜 이토록 많은 스텐실 글자가 각종 포스터와 로고, 책 표지 등에 쓰이는 걸까? 전쟁이나 임시변통 같은 과거 스텐실 글자에 붙어 있는 상징적 의미를 고려한 것일까? 결코 아니다. 단지 미학적으로 선택되었을 뿐이다. 아마도 자꾸 눈에 띄니까 일종의 전염처럼 그 글자가 유행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7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포스터
이런 현상에서 특정 스타일의 탄생과 발전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먼저 기능적 필요에 따라 태어난다. 그다음 어떤 빈번한 쓰임에 따라 상징적 의미가 생겨난다. 시간이 흘러 상징적 의미가 희미해지면, 그것은 하나의 스타일 목록으로 귀결된다. 역사적 상징물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 의미가 퇴색하고 멋과 스타일로 소비될 뿐이다.
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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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