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브라운의 포터블 계산기는 기능적으로나 미적으로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른쪽)휴대용 라디오(1959년). 불필요한 관심을 끌지 않으면서 최소한으로 디자인하는 람스의 디자인 철학이 잘 반영되었다.
8월에는 건축 디자인 관련 영화가 무려 3편이나 개봉되었다. <이타미 준의 바다> <바우하우스> <디터 람스>가 그것이다. 모두 대중에게 낯선 이름일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올해가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 되는 해라 한국에도 수입된 것 같다. 건축가 이타미 준(한국 이름 유동룡)은 일본에서 활동한 한국인 건축가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제주도에 그가 디자인한 건축물이 많이 있다. 그에 반해 디터 람스(1932년생)는 여전히 한국 대중에게는 친숙한 인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외에서 대중적인 인물도 아니다.
▶테조 레미가 디자인한 서랍장은 람스에게 비난받았다.
산업 디자이너는 예술가나 패션 디자이너처럼 명성을 얻기 힘들다. 무엇보다 산업 디자인은 팀 작업이기 때문이다. 제품을 출시할 때 기업이 그것을 특정 디자이너 작품이라고 홍보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사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산업 제품은 결코 혼자 완성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동료 디자이너들뿐만 아니라 엔지니어의 도움도 필요하다. 또 패션이나 가구처럼 디자이너 개인의 개성을 마음껏 부리기도 어렵다. 더욱이 대량 생산되므로 불특정 다수의 취향을 고려해야 한다.
디터 람스 역시 그가 디자인했다고 여겨지는 많은 제품이 사실 그 혼자 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동료 디자이너가 더 주도적으로 디자인한 것도 있다. 그런데도 브라운 하면 디터 람스의 이름을 떠올리고 그의 전시회가 지구 어느 도시에선가 끊임없이 펼쳐지며, 그의 작품집이 출판되고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개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가 디자인의 철학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은 수많은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 철학은 그가 늘 주장하는 ‘Less, but Better(적지만 더 나음)’라는 문장, 그리고 마치 모세처럼 제시한 ‘디자인 10계명’에 압축되어 있다.
▶디터 람스와 한스 구겔로트가 함께 디자인한 브라운의 오디오 포노슈퍼 SK4(1956년부터 생산)는 혁신적인 디자인의 오디오로 새로운 시대를 연 제품이다.
‘새로운 최고’ 아닌 ‘최소한으로 더 낫게’
‘Less, but Better’라는 문구는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인 미스 반데어로에가 말한 ‘Less is More’를 연상시킨다. 아마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다. ‘Less is More’는 한국에서 대개 ‘적을수록 많다’ 또는 ‘적을수록 좋다’라고 번역한다. 건축가로서 미스가 추구했던 건물은 극도로 단순한 것이었다. 완전히 매끈한 사각 박스형 건물이 그것이다. 단순함이란 가장 얻기 힘든 것이라는 점에서 미스의 ‘적을수록 좋다’라는 말은 가장 완벽한 조형을 추구하는 디자이너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반면 디터 람스는 적을수록 좋지만, 거기에 한 가지 가치를 더했다. 그것은 더 나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스의 ‘Less is More’에는 단지 조형적인 면, 다시 말해 형식적인 스타일만을 언급하고 있다. 반면 ‘Less, but Better’는 최소한으로 간결하게 디자인하되, 더 나아져야 한다는 또 다른 디자인의 책임을 추궁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한 더 나은 가치는 람스의 디자인 10계명에 등장한다. 예를 들어 ‘좋은 디자인은 아름답다’는 말은 형식적인 측면이지만,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이해하기 쉽게 한다’는 말은 내용적인 측면이다. 제품을 멋있게 디자인하다 보면 소비자가 제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헷갈릴 수도 있다. 그렇게 디자인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좋은 디자인은 불필요한 관심을 끌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영화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디터 람스가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을 방문해 그곳의 컬렉션을 둘러보면서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는 실용성보다 과시성을 내세우거나 지나치게 실험적인 가구를 지팡이로 가리키며 자신의 비평을 덧붙인다. 네덜란드의 테조 레미가 디자인한 아티스틱한 서랍장이 그 신랄한 비판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의미 없는 디자인이라고 깎아내린다. 이런 디자인은 그의 또 다른 10계명 중 하나인 ‘좋은 디자인은 불필요한 관심을 끌지 않는다’의 사례가 될 것이다.
▶<디터 람스> 다큐멘터리 영화 포스터
좋은 디자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나
사람들은 디터 람스의 브라운 제품을 여전히 좋아한다. 그는 1990년대 브라운에서 은퇴했고, 그가 브라운의 전성기 때 디자인한 제품들은 대부분 지금으로부터 50~60년 전에 생산된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가 디자인한 오디오 제품을 보면 전혀 질리지 않을뿐더러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인기를 끌려고 유행을 따르거나 소비자에게 아첨하는 디자인을 했다면 오히려 잊혔을 것이다.
better는 best가 아니라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그것은 기존의 것을 대체하는 ‘최고의 것’이 아니다. 람스는 새로운 것을 경계한다. 새로운 것은 늘 당시 없는 최고의 것을 추구하라는 요구처럼 들린다. 그보다는 기존의 것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새로운 것보다 기존의 것을 더 낫게 개선하는 것이 굿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 새로운 것은 전에 없던 것으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어야 한다. 그에 반해 더 나은 것은 기존 가치를 지키면서 부족한 것을 채운 것이다. 그러니 불필요한 관심을 끌 필요가 없다. 그런 제품은 눈에 띄지 않을 수 있고, 오늘날 마케팅에서 그토록 요구하는 ‘차별성’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런 디자인은 또 다른 10계명처럼 ‘오래가고’ ‘환경을 덜 해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큼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명제는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상품은 끊임없이 새롭게 거듭나서 소비자의 감각을 즐겁게 해야 한다. 그렇게 상품들은 소비 욕구를 창출하고 기존의 잘 기능하는 상품을 대체한다. 더 나은 것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디자인하는 게 오늘날 기업이 디자이너들에게 요구하는 태도다. <디터 람스> 영화에 보면 비초에라는 가구의 자문을 맡고 있는 람스에게 기업의 실무자가 신상품에 새로운 재료를 적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묻는 대목이 나온다. 이에 대해 람스는 새로운 것은 필요 없다고 짧게 말할 뿐이다. 참 어찌 보면 답답하고 완고한 노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오늘날 디터 람스를 더욱 위대한 디자이너로 기억하고, 그를 더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이유가 된다. 그는 1920년대 바우하우스의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으로 세상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는” 그 순진한 믿음을 갖고 있는, 마지막 화석 같은 인물인지 모른다.
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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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