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대통령의 국정 연설이 열리던 국회의사당이 폭탄 테러로 붕괴되고, 정부 주요 인사들이 모두 사망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국무위원 중 유일하게 생존한 환경부 장관은 승계 서열에 따라 60일간의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지정되는데, 그는 정치에 막 입문한 카이스트 교수 출신으로 모두들 그의 행정력을 의심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60일 동안 테러의 배후를 찾아내고, 혼란스러운 정국을 정상화하고, 대한민국의 국정 시스템을 유지함과 동시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변화에 흔들리는 가족을 지켜야 한다.
tvN의 <60일, 지정생존자>는 가상의 설정으로 대한민국 현실을 보여주는 정치 드라마다. 이 작품은 미국 ABC 방송국의 드라마 <지정생존자>를 원작으로 삼아 한국에 맞게 각색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원작에 최대한 가깝게 연출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개인적으로는 원작보다 더 낫다는 생각도 든다. 미국 드라마는 주연배우가 키퍼 서덜랜드로 대표작인 <24>의 대테러 요원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평생 정치는 못 해본 말단 장관 역할에 몰입하는 게 어려웠다. 그런데 한국판에서 배우 지진희가 맡은 이 역할은, 원래 그의 반듯한 이미지와 결합되어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덕분에 드라마의 몰입도는 원작보다 낫다는 평도 많다. 청와대에서 활약하는 배우들 또한 매우 현실적인 모습으로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이도엽, 백현주, 전박찬, 김주헌 등 주로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이 묵직한 조연으로 제 몫을 하는 중에 지진희, 이준혁, 배종옥, 허준호 같은 잔뼈가 굵은 연기자들이 극을 이끌고 나가기 때문에 연기력에서만큼은 밸런스와 완성도가 높은 편이다.
특정 정치인 아닌 시스템으로 보는 관점
이 외에 한국과 미국 상황을 반영해 작품의 전체적인 방향성도 바뀌었는데,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이 가진 영향력과 대한민국 대통령이 가진 영향력의 차이를 고려한 설정 변경이 의외로 돋보인다. 60일 뒤에 대선을 치러야 하는 한국 상황에 맞게 테러범을 쫓는 이야기보다는 청와대 내부에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들이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대부분 실내 장면에서 거의 대사만으로 진행되는, 스펙터클한 장면이 없다는 한계에도 긴박감 있는 연출을 선보인다.
청와대 분량이 많다 보니 청와대 스태프들의 비중도 높아졌고, 원작에서는 크게 등장하지 않던 각 정당 대표나 차기 대권주자들의 비중 역시 커졌다. 결과적으로 <60일, 지정생존자>는 원작보다 좀 더 정치 드라마에 가까워진 것이다.
2019년 7월 1일에 방송된 1회의 전국 시청률은 3.383%였지만, 8월 13일 방송된 14회는 4.948%를 기록했다. 그만큼 드라마의 몰입도와 완성도에서 큰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몰입도는 배우들 연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60일, 지정생존자>는 가상의 국가 위기 상황을 배경으로 현실 정치의 면면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특히 현실의 정치를 특정 정치인 몇몇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시스템으로 보는 관점이 흥미롭다.
정치는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일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영웅주의가 아닌 다수의 구성원들이 애쓰는 구조적인 결과라는 점을 매회 강조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현실의 정치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우리는 흔히 스스로를 ‘국민’이라고 말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국민이란 국가를 구성하는 3개 요소, 즉 국민, 영토, 주권 중 하나로서 의미가 크다. 언뜻 보면 수동적인 개념으로도 보일 여지가 있다.
반면 우리는 ‘시민’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지는 않는 것 같다. ‘시민’이란 근대적 개인이라는 맥락에서 성립되는 개념이다. ‘우리’보다는 ‘나’에 기인해서 발전된 개념이 시민이라면, 근대사회의 개인들은 교육을 통해 각종 이론과 역사를 배우고, 그렇게 습득한 지식으로 공론장에서 의견을 표현하는 존재다.
의견을 표한다는 것은 나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공개한다는 뜻이고, 그 과정을 통해 하나의 사회가 좋은 쪽으로 진보한다는 믿음을 구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과정을 정치라고 한다면, 정치인은 사회 진보라는 큰 방향 아래 시민들의 의사결정을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현재 대한민국의 우리는 그런 과정을 경험하고 있는 걸까? <60일, 지정생존자>는 바로 그 지점을 되묻는다.
한국 드라마에선 보기 드문 ‘시민의 의무’
혹자는 이 드라마를 통해 ‘대통령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지만, 오히려 나는 박무진이라는 개인을 통해 ‘시민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이 드라마에서 주로 묘사하는 건 갑자기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책임을 지게 된 박무진이라는 한 개인의 압박감이다. 그는 모든 고난의 순간에도 결국 자신이 믿고 있는 원칙과 기준에 따라 어려운 결정을 내린다. 박무진은 입버릇처럼 ‘시민의 의무’를 말하는데, 한국 드라마에서 보기 드문 표현이란 점에서 중요한 지점이라고 본다. 60일, 대선을 치르기 위해 주어진 그 시간 동안 국정 운영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 바로 ‘시민의 의무’라는 얘기다. 청와대 스태프들의 대사, 논쟁, 감정, 믿음을 통해 정치가 곧 시스템이라는 점을 묘사한다면, 박무진의 고군분투를 통해 시민의 본질을 새삼 상기시키게 된다.
<60일, 지정생존자>는 최종회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짐작건대 마지막까지 반전이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반전은 결국 현실 한국의 상황으로 수렴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 드라마가 강조하는 건 결국 정치는 시스템이란 사실이다.
이 시스템은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움직인다.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신뢰가 작동하지 못한다. 박무진 권한대행은 바로 그 시스템, 신뢰의 구조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그 점이 <60일, 지정생존자>가 2019년에 가장 중요한 드라마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이 드라마는 좋은 질문을 던지고, 우리는 그에 대한 좋은 대답을 찾아야 한다.
차우진_ 음악평론가. 미디어 환경과 문화 수용자들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청춘의 사운드> <대중음악의 이해> <아이돌: H.O.T.부터 소녀시대까지…> <한국의 인디 레이블> 등의 책을 썼고, 유료 콘텐츠 플랫폼 ‘퍼블리’에서 <음악 산업, 판이 달라진다> 리포트를 발행했다. 현재는 ‘스페이스 오디티’라는 스타트업에서 팬 문화, 콘텐츠, 미디어의 연결 구조를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