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0일 오후 도쿄 오쿠보 코리아타운이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다.│박철현
“그런데 우리 한국 가면 위험한 거 아냐?”
7월 말이었다. 장기간 지방 출장 중이던 그때, 일본인 아내에게서 ‘우리 한국 가도 괜찮을까?’라는 뜬금없는 휴대전화 메시지가 왔다. 아내는 이미, 그러니까 6월 말에 8월 22일부터 26일까지 부산행 왕복 항공권을 끊어둔 상태였다. 우리 둘을 포함해 장녀, 차녀, 장남, 차남 모두 6명이 마산 고향집에 부모님을 뵈러 가는 연중행사다. 일부러 돈을 아끼기 위해 2개월 전부터 준비했고, 덕분에 6명분의 항공권을 11만 엔(120만 원)이라는 아주 싼 가격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들 아시다시피 그 티켓을 끊고 얼마 있지 않아 상황이 급변했다.
남북미 정상회담 다음 날인 7월 1일 일본 정부가 백색국가(수출절차 간소화 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대한민국을 제외한다는 정령안 개정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고, 7월 4일부터 선제적 조처로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반도체 소재 수출에 규제를 가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보통 일본인들은 이 뉴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몰랐다. 왜냐? 내가 이 뉴스를 듣고 한국에서 본격적인 불매운동이 일어났던 7월 7일까지, 그러니까 약 일주일 동안 만난 수십 명에 이르는 각계각층 일본인들이 모두 몰랐기 때문이다.
▶일본 시민들이 8월 4일 오후 도쿄 신주쿠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자극적 보도 앞장선 일본 언론들
대다수 일본인은 한국 안에서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그 뉴스가 일본 매스컴에 소개되면서부터 알게 됐다. 그리고 불매운동의 근원에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가 있고,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작년 10월에 있었던 신일본제철 강제징용 문제에 관한 대한민국의 대법원 판결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 것이다.
그래도 언제나 그렇듯 남의 이야기라고 여긴다. 정치적 문제 혹은 사안이라고 구분되는 순간 무관심으로 대응하는 것이 일본인들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불매운동이 일본 매스컴에 방송되어도 오쿠보 코리아타운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북적거렸다. 하지만 7월 21일 참의원 통상선거가 끝난 후 상황이 달라졌다. 그동안 일본 매스컴, 특히 낮 시간에 방영되는 방송 프로그램을 장식하던 참의원 뉴스 및 자니스(일본 최대의 아이돌 기획사) 창립자의 사망, 요시모토 흥업(일본 최대의 개그맨 기획사)의 야쿠자 금품수수 스캔들 등이 한풀 꺾이자 그 분량을 한국 뉴스가 대신 차지하기 시작했고 그 뉴스의 대부분은 불매운동이었으며 과격한 집회 영상들이 반드시 들어갔다. 신문은 각 사의 전통적인 논조에 따라 극우(산케이), 보수(요미우리), 중도(마이니치), 진보(아사히·도쿄), 경제지(니혼게이자이)로 갈라져 이번 사태에 대해 보도했고, 독자들 역시 자신이 받아보는 신문사 논조를 알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하지만 방송은 다르다. 특히 광고를 받기 위한 시청률이 절대 조건인 민영 방송국은 논조 따위 관계없이 자극적인 화면은 물론 확인되지 않은 뉴스를 반복적으로 내보냈다. 정치에 별로 관심 없는 보통 일본인들, 특히 낮 시간대에 이런 뉴스를 볼 확률이 높은 가정주부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아내의 친구이자 한국어도 능통한 한류팬 마쓰다(45·주부) 씨는 “여기가 한국인지 일본인지 헷갈릴 정도로 한국 뉴스를 많이 접하는 건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면서 “그것도 하나같이 이렇게 악의적일 수 있는지 신기할 노릇”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처음에는 이런 일본 뉴스가 악의적이라 생각해도 몇 날 며칠 반복적으로 세뇌라도 시키려는 듯 흘러나오다 보면 결국 “우리 한국 가도 괜찮아? 혹시 위험해지는 것 아냐?”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아내가 이러다 보니 세상 물정 다 아는 큰딸(만 13세, 중2)과 둘째 딸(만 11세, 초6)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만큼 일본 민영방송의 폐해는 컸다. 나는 일부러 안 봤다. 모니터를 부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한국으로 떠나는 8월 22일 당일이 찾아왔다.
일본인 관광객 반겨준 한국 사람들
결론부터 말하면 아내와 두 딸의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예정보다 늦게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는 바람에 허둥대던 우리 6인 가족 앞에 서 있던 부산 아저씨 일행이 항공사 직원에게 사투리, 게다가 반말로 “어이! 요 일본인들 먼저 해주라. 줄이 길어서 알라들이 불안한갑네”라고 외쳐줬기 때문이다.
나도 일본어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 아저씨는 우리를 일본인 가족으로 착각한 듯싶었다. 원래 그런 편의는 허용되지 않는데 그 아저씨들의 강렬한 사투리 때문인지 아니면 커다란 목청 때문인지 몰라도 항공사 직원이 다가와 우리 가족을 따로 빼주었다. 라인을 넘어오는데 다른 열의 한국인들도 싫은 기색 없이 자리를 비켜준다. 아내와 큰딸, 작은딸은 연신 “고맙습니다”를 외쳤고, 이런 ‘한국어’ 감사 표시 때문인지 그들의 표정은 어느새 웃음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티켓을 얻고 출국 게이트로 나오는데 큰아이가 “한국 사람들 엄청 친절하네. 미야네 상이 틀렸구먼 뭐”라고 말한다. 그녀가 말한 미야네 상은 낮 시간대 일본 최고 뉴스 정보 프로그램으로 일컬어지는 니혼TV의 <정보 라이브 미야네야> 사회를 맡고 있는 미야네 세이지(宮根誠司)를 의미한다. 그의 방송도 다른 방송들과 마찬가지로 자극적인 불매운동 영상, 이를테면 렉서스를 부순다든가 아사히 캔맥주를 버리는 집회, 보이콧 재팬 등이 걸린 한국 풍경을 내보냈다. 그리고 스튜디오에 모인 코멘테이터들은 “한국에서 일본인들이 위협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가 소셜미디어에 종종 올라온다” “한국인들도 일본 관광 불매운동하는데 우리도 안 가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 “어쨌든 지금 한국은 일본인들에게 위험하다” 등의 발언을 여과 없이 생방송으로 내보냈기 때문이다. 그걸 몇 번이나 들은 큰아이가 막연하게 그렇게 알고 있다가 방금 전 자신이 직접 경험한 한국인들의 친절한 배려에 금세 “미야네 상이 틀렸다”라고 단언한 것이다.
둘째 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트와이스의 광팬이다. 그래서 마산 고향집에 온 김에 트와이스 오리지널 앨범을 사려고 했다. 그런데 앨범을 파는 곳이 시내에 서너 군데밖에 없었고, 인터넷을 검색한 후 힘들게 찾아간 곳은 트로트 앨범만 파는 중간 판매상이었다. 나와 둘째가 좌절하던 그때 중간 판매상 사장님이 자기 휴대전화로 몇 군데 전화를 걸더니 우리에게 “창동이라고 아나? 거기 가면 길벗레코드라고 있는데 트와이슨가 뭔가가 두어 개 있는 모양이니, 거기 함 가봐라”라고 말한다. 택시를 타고 부리나케 달려가니 이미 주인아주머니가 트와이스 앨범을 종류별로 꺼내 준비해놨다. 일본에서 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는지 원래는 돈을 내고 사야 하는 악보집이나 포스터 등도 한 아름 안겨준다. 둘째가 깜짝 놀라 “이게 다 뭐냐?”고 묻고 나는 “네가 일본에서 트와이스 앨범 사러 왔다고 서비스로 주는 거래”라고 말했다. 그러자 딸은 바로 “최고! 한국 최고!”라고 한국어로 외쳤고, 그 말을 들은 주인아주머니는 둘째를 쓰다듬으며 뭐가 그리 웃긴지 박장대소를 했다. 이번 한국 여행에서 우리 아이들은 완벽한 친한파가 되었다. 당연하다. 지난 2개월간 일본 방송 언론이 전한 한국의 모습과 아이들이 실제로 겪은 한국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큰아이는 방송 뉴스에 대한 불신감이 생겼고 이걸 주제로 개학 후 사회과 수업 발표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는 같은 반 친구들에게 트와이스 멤버 카드를 나눠주며 한국의 친절한 아주머니한테서 공짜로 받은 거라고 말할 것이라 한다.
▶일본 도쿄 중심가인 긴자 거리에서 혐한 시위대 수백명이 ‘위안부 합의 규탄 국민대행진’을 벌이고 있다.│연합
일부러 자극과 가십거리 만들지 말아야
그런데 언론의 이런 행태는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언론의 일본에 관한 보도를 보면 도긴개긴이라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의 일본인들은 앞서 말했듯 어떠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선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접하는 방송이나 언론의 뉘앙스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비정치성은 전통인지라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답답할 것이다. 하지만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습속이니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래서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한 것은 잘한 결정이라는 여론조사가 70~80%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여론은 일본 언론이 반복과 세뇌를 통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이걸 그대로 인용하고, 이 기사를 본 한국인들은 일본 사회를 욕한다. 서로가 서로의 보도를 인용해 양국 시민들의 대결 의식을 부추긴다.
하지만 도쿄에 와보면 아마 놀랄 것이다. 우리 아이들과 아내가 일본인이라고 한국에서 어떤 피해를 입지 않았듯, 여기서도 차별이나 괴롭힘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늘 하는 말이지만 언론이 먼저 나서서, 혹은 일부러 자극과 가십거리를 만들지 않으면 모든 것은 평화롭게 흘러갈 것이다.
박철현 재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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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