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데 고야, ‘1808년 5월 3일’, 캔버스에 유화, 266×345cm, 1814,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파블로 피카소(1881~1973)와 살바도르 달리(1904~1989). 20세기 세계 미술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스페인 출신의 두 거장이다. 이들에 앞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궁정화가이자 기록화가·판화가로 이름을 떨친 프란시스코 데 고야(1746~1828)도 스페인 근대 미술계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다.
1746년 3월 30일 스페인 북동부 아라곤 지방인 사라고사 외곽의 푸엔데토도스에서 태어난 고야는 금 도금업자인 아버지 호세 고야의 영향으로 당대 예술가들이 성당 제단을 도금으로 장식하고 성당을 개조·복원하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화가로서 재능을 키워나갔다. 성당 소속 화가를 거쳐 1783년 카를로스 3세 측근으로 실세인 재상(宰相) 플로리다블랑카의 초상화 제작을 계기로 고야는 왕족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786년 왕실의 태피스트리(장식용 직물) 제작에 종사하는 공식화가(궁정화가 바로 아래 직책)로 임명된 데 이어, 1788년 12월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하고 카를로스 4세가 왕위에 오른 지 4개월 만인 1789년 4월 마침내 고야는 궁정화가에 임명되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일까. 46세이던 1792년 콜레라 전염병에 걸린 고야는 심한 고열의 후유증으로 청각을 잃게 된다. 미술사가들은 1792년을 기준으로 고야의 작품 경향을 고야 전기와 후기로 나누기도 한다. 전기 작품들이 주로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린 화사하고 밝은 풍인 반면, 후기는 프랑스의 스페인 침공과 문명사회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역사 기록화와 판화집 등 무거운 주제를 어두운 톤으로 그린 작품들이 골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청각 잃고 ‘옷 벗은 마하’로 궁정화가 박탈
1799년 수석 궁정화가로 승진한 고야는 초상화가로서 전성기를 달리던 중 1800년, 1점의 충격적인 작품을 전격적으로 공개하면서 세상을 뒤흔들었다. 고야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옷 벗은 마하’가 논란의 중심에 섰던 바로 그 작품이다. 고야는 이 그림에 신화적인 요소와 역사적인 의미를 전혀 부여하지 않았다. 대신 현실 속에서 볼 수 있는 여인의 알몸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외설 논란은 물론 신성모독으로까지 번진 ‘옷 벗은 마하’에 대한 외압에 시달린 고야는 1803년 똑같은 자세로 옷을 입은 ‘옷 입은 마하’를 제작하지만 종교재판에 회부되는 위기를 겪은 나머지 궁정화가의 지위를 박탈당한다.
1808년부터 1814년까지 6년 동안 이베리아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이에 대항한 스페인·영국·포르투갈 동맹군 간에 펼쳐진 이 전쟁은 ‘반도전쟁’이라 불린다. 고야의 작품 ‘1808년 5월 3일’은 반도전쟁 당시 스페인을 침략한 프랑스군의 만행을 고발한 역사 기록화다. 고야가 반도전쟁을 다룬 또 다른 그림 ‘1808년 5월 2일’과 10년 동안 제작한 판화집 <전쟁의 재난>도 프랑스군의 잔혹한 학살 행위를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지만 ‘1808년 5월 3일’이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된 이 그림은 반도전쟁이 끝난 1814년에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작품이다. 전쟁의 잔혹성을 널리 알린 역사 기록화답게 세로 266cm, 가로 345cm 크기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실제로 벌어졌던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808년 5월 2일. 스페인을 침략한 프랑스군의 수장 나폴레옹이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앉히고 무자비한 학살을 일삼은 데 분노한 마드리드 시민들이 이날 일제히 들고일어나 폭동을 일으켰다. 다음 날 새벽, 프랑스군은 폭동 주모자와 폭동에 가담한 수천 명의 군중을 체포해 무참하게 처형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그림은 1808년 5월 3일 새벽 마드리드 외곽 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 벌어진 프랑스군의 학살 행위와 전쟁의 비극성을 탁월한 사실주의 기법으로 고발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그림에 대해 고야가 1808년 5월 3일의 만행을 직접 목격한 뒤 훗날 그 기억을 되살려 그림으로 재현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당시 고야는 청각을 잃은 상태였다. 당연히 총소리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총소리를 듣고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 참상을 두 눈으로 직접 봤을 것이라는 추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 작품은 분명 역사 기록화다. 그런데 역사 기록화에 마땅히 등장하는 민중의 영웅, 전쟁 영웅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림은 화면 왼쪽과 오른쪽으로 극명하게 대비된다. 왼편에는 프랑스 병사들에게 이미 총살당해 붉은 피를 쏟은 채 참혹하게 널브러진 시신들과 총살당하기 직전 겁에 질린 희생자들이 보인다. 화면 오른편에는 총살 직전 희생자들을 향해 일제히 거총 자세를 취하고 있는 프랑스 군인들이 서 있다.
총구 앞 남자의 움푹 팬 손바닥
그림 가운데에서 왼쪽으로 흰색 상의와 노란색 바지를 입고 두 손을 펼쳐 만세 자세를 하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이미 죽은 이들과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희생자들이 서 있는 그림 왼편에 밝은 빛이 집중돼 있는데, 옷 색깔과 자세 때문에 이 남자만 유독 돋보인다. 죽음을 재촉하는 총구 앞에서 남자는 무슨 말을 외치고 있는 걸까. 남자의 오른 손바닥을 보면 움푹 팬 상처 자국이 선명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운명을 다할 때 생긴 성흔(聖痕)인가. 남자의 자세와 손바닥 상처, 그림 전반에 짙게 드리운 죽음의 기운은 이 남자가 스페인의 독립과 스페인 민중의 구원을 외치며 기꺼이 희생을 자처한 구세주임을 암시한다.
박인권_ 문화 칼럼니스트.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2001),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2006),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이상 200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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