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가 수교 이래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아베 정부는 7월 4일 반도체, 디스플레이 제작의 핵심 소재인 3개 품목에 대해 ‘수출규제 강화’ 조치를 취한 데 이어, 8월 2일에는 ‘백색국가(수출절차 간소화 우대국)’에서 한국을 제외함으로써 1100여 종의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에 나서겠다고 공표했다. 엄밀히 말해 ‘금수 조치’는 아니지만 일본 정부가 대(對)한국 수출 품목과 수량을 통제할 칼자루를 쥐겠다는 것이다.
아베 정부는 경제 보복이라는 용어는 쓰지 않았지만 ‘신뢰관계의 훼손’을 이유로 들며 수출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또 전략물자에 대한 부적절한 관리의 문제를 지적하며 보복 조치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마디로 견강부회(牽强附會)일 뿐, 근거가 희박한 일본 측의 궤변에 불과하다. 역사·외교적 문제를 이유로 경제 보복에 나선 것은 한일관계사에 전무후무한 일로 비열하고도 무도한 행태다.
한일관계사에 전무후무한 궤변
이번 보복은 ‘한일 위안부 합의’에 의해 구성된 ‘화해치유재단’의 일방적 해산 조치와 대법원 징용 재판에 대한 일본 측의 불만과 반발이 시발점이 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징용 재판 결과에 대한 아베의 분노 폭발이 한국 경제를 정조준한 보복으로 이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베와 총리 관저의 측근들이 벌인 도발에 대해 일본 내 산업계는 비록 딴소리는 못 내고 있지만 자국 경제에 미칠 손실을 염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일본 주류 언론들도 비판적인 논조를 펼치고 있다. 자유로운 무역질서의 최대 수혜자인 일본의 장래를 걱정하는 일본 식자층 역시 ‘자유공정무역’의 기치를 내걸고 있는 국책과 모순된 이번 보복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다만 아베 1강 체제하에 놓여 있는 일본 국내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단기적으로 보복이 철회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우리는 이번 사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필자는 보복을 철회시키려면 보복으로 인한 피와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책도 강구돼야 하지만 보복의 원인 제공자이자 시발점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일본에 보복의 덜미를 잡힌 것은 징용 재판 결과에 대한 처리 방안이 너무 늦고 미흡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징용 문제의 해법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경제 보복에 대한 정공법이며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이다. 필자는 일본의 보복을 초래한 징용 재판 결과를 처리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안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6월 19일 외교부가 제안한 ‘한국 기업+일본 기업 출연 방식’에 의한 위자료 지급 방안에 한국 정부의 역할을 더해 2+1 체제로 꾸려 더 완성도 높은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일본과 협상을 벌이는 것이다. 이 경우 피해자 그룹과 국내 출연기업의 사전 협의는 필수적이다. 기금이나 재단 방식으로 해결하려면 피해자 규모와 배상액이 어느 정도 가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일련의 험난한 과정을 진행하는 데 있어 우리 정부의 중심적인 역할이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징용 문제와 관련된 모든 이해집단과의 종합적인 조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이 해법은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는 게 최대 난점이다. 말하자면 이 해법이 불완전 연소로 끝나지 않으려면 철저한 궁리와 치밀한 조율이 필요하다.
국면 바꾸고 두 국민 윈윈해야
두 번째방안은 징용 문제의 사법적 해결을 꾀하는 것이다. 즉,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한일이 공동 제소하는 것도 방책이 될 수 있다. 이 방안의 최대 장점은 현재 법원에서 진행 중인 강제집행 절차를 보류시키고 사실상 일본의 보복을 철회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ICJ에 공동 제소하기로 양국이 합의한다면 최종 결론이 나오기까지는 적어도 3~4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자의 구제 여부 및 방법에 초점을 맞춰 ICJ의 판결을 받아보는 것이야말로 합리적 해법이 될 수 있다. 양국의 최고법원은 징용피해자의 구제라는 동일한 사안에 대해 완전히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 법리 해석상의 충돌 상황이 초래한 분쟁을 국제적으로 공신력 있는 유엔의 산하기관인 ICJ에 맡겨 3자적 판단을 받아보자는 것이다.
만약 징용 문제가 ICJ에 회부된다면 그 최종 결과는 부분 승소, 부분 패소로 결론이 날 것으로 예상된다. 국가 간 합의로 피해자 개인의 권리를 소멸시키기는 어렵다는 것이 확립된 법리라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가 완패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최후 결론이 나오기 전에 양국이 화해할 가능성은 물론 여전히 존재한다. ICJ에 회부하는 사법적 해결을 꾀할 경우 역설적으로 협상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방안은 우리 정부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재확인함과 동시에 일본에는 사죄·반성의 자세를 촉구하되, 물질적 차원의 대일 배상요구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다. 일체의 과거사와 관련한 금전 요구를 포기하고 피해자의 구제는 국내적으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힘으로써 도덕적 우위에 선 대일외교를 펼치자는 것이다. 이 방식은 중국의 대일 전후처리 외교 방식이기도 하다. 또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일외교 방침으로 선언한 것이다. 즉, 진상규명과 사죄·반성, 후세에 대한 교육의 책임을 일본에 요구하고 피해자에 대한 금전적 보상은 우리 정부가 스스로 한다는 방침이다. 이는 한일관계의 국면을 극적으로 전환시키고 양 국민이 윈윈할 수 있는 해법이 될 수 있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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