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호 변호사 | 한겨레
“아베 정권의 수출규제 조치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국제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다. 지금까지 합당한 사유와 명분을 전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내 법조계에서 손꼽히는 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국제통상위원장)는 일본 정부가 한국을 겨냥한 발동한 일련의 수출규제 조치는 ‘무역규제를 수단으로 한 경제적 도발 행위’라고 규정했다. 송 변호사는 “아베 정권이 한국과 과거사 문제를 무마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있다”며 “국제 통상 질서와 반도체 생산 등의 국제 분업체계를 교란하는 행위는 아베 정권을 사면초가에 빠지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우리 정부는 WTO 제소 등으로 적극 대응해야 한다”면서도 “그러나 우리도 일본처럼 수출을 규제하는 방식으로 맞대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조언했다. “일본은 한국에 WTO 협정 위반행위를 저질렀다. 그렇다면 한국은 오히려 WTO 협정에 맞춰가며 너무 서두르지 말고 WTO 체제가 제공하는 수단을 지혜롭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게 송 변호사의 주장이다. 일본 정부가 수출무역관리령과 시행세칙 개정안을 공포하기 이틀 전인 8월 5일 오후, 서울 상암동 한 카페에서 송기호 변호사를 만나 일본과의 분쟁에 대한 국제법적 진단과 처방을 들어봤다.
“무역 무기화로 한국 사법주권 침해”
-일본 정부가 한국을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대상국)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구체적으로 국내 기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궁금하다.
=먼저 백색국가 삭제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략물자 수출을 통제하는 나라에서는 정부가 무기 개발 악용 소지가 있는 ‘목록’을 정해 수출허가를 받도록 한다. 허가는 수출업자에게 일괄해서 미리 내어 주는 ‘포괄허가’와 수출 건별로 허가하는 ‘개별허가’가 있다. 또 3년간 유효한 포괄허가에는 백색국가용 포괄허가와 일반국가용 포괄허가의 두 가지 경로가 있다. 전자가 수출되는 지역을 믿고 더 쉽게 내주는 허가라면 후자는 일본 내 수출기업의 자격과 능력을 보고 주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8월 2일 각의 결의로 개정한 수출무역 관리 시행령은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한다는 것이지 포괄허가 대상국에서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일본 수출업자가 일반국가용 포괄허가를 받으면 되는 것이다. 국내 대기업의 일본 공급선은 대부분 일반국가용 특별포괄허가를 보유하고 있어 제품 공급에 차질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특별포괄허가가 없는 일본 기업들과 거래하는 국내 중소기업이다. 일본의 공급선이 영세해 무자격 공급자와 거래하는 국내 중소기업의 경우 일본 정부로부터 개별허가를 받아야 수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가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조치 이외에 추가적인 무역 보복을 할 가능성은 없나.
=단언할 순 없지만 추가적인 제재는 없을 것으로 본다. 일본의 수출입 규제 부처인 경제산업성은 8월 2일 낸 보도자료에서 “한국으로 수출되는 소재 기술 기계 등에 대해 종래 부여하던 특별일반포괄허가를 ‘종전 그대로 적용’하는 방향으로 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리고 8월 7일 공포한 시행세칙의 ‘포괄허가 취급요령’에서도 경제산업성 발표대로 개별허가 품목을 추가로 지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은 8월 28일부터 비백색국가로 분류되지만, 일본 정부가 7월 4일 개별허가 품목으로 변경한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개 품목(고순도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불화 폴리이미드) 외에는 기존 절차대로 일본 제품을 수입하면 된다.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은 일본이 원래 비백색국가로 지정한 나라인데 대부분 개별허가가 아닌 포괄허가 방식으로 수출입이 이뤄지고 있다.
-비백색국가이더라도 포괄허가제를 이용해 일본 제품을 수입할 수 있다면 일본 정부의 백색국가 제외 조치가 실제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이번 사안은 기본적으로 단순한 수출 허가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베 정권이 한국을 백색국가 목록에서 삭제한 조치는 식민지 시기 반인도적 강제동원 피해자의 민사소송 결과(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에 대응한 일본 정부의 불법적 무역 보복이다. 그리고 백색국가에서 제외되는 경우, 불화수소처럼 민감한 품목으로 지정되지 않은 품목에 대해서도 그것이 군사 목적으로 전용 가능성이 있다고 일본 정부가 판단하면 개별허가를 받도록 명령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생긴 것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한국의 사법 주권과 사법 질서를 침해하는 방식으로 무역을 무기화할 수 있는 법적 틀을 일본이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법적 틀을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문제가 엄중하다고 본다.
▶한국과 일본 정부 대표들이 7월 12일 도쿄 지요다구 경제산 업성에서 일본의 대 한국 수출 규제에 대한 실무회의를 하기 위해 앉아 있다.| 청와대사진공동취재단
“일 비영리기구 ‘한국 안보 물자 관리 철저’”
-그렇다면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동원한 수출 규제 조치에 대해 우리 정부나 기업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당장 피해가 발생하는 문제는 고순도 불화수소를 포함한 3개 핵심 소재를 일본 정부가 개별허가 품목으로 지정해 수도꼭지를 잠근 것이다. 허가가 적기에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업의 생산 차질만 생기는 게 아니라 일본의 수출 기업들도 피해를 본다. 또 우리나라에서 주로 공급하는 반도체나 디스플레이를 이용해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국제적 분업 질서에도 교란이 생긴다. 이 때문에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를 개별허가에서 다시 포괄허가 대상으로 바꾸도록 일본 정부에 법령 개정을 촉구하는 동시에, 법령 개정 이전에는 최대한 빨리 허가가 나올 수 있도록 하는데 민관 공동의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또한 일본산 소재를 수입하는 중소기업들은 거래하는 일본 기업이 정부의 자율준수프로그램(CP) 인증을 받았는지 미리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나온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국제통상법을 위반했다고 볼 수 있나.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명백한 WTO 협정 위반이다. WTO 체제의 뼈대인 가트협정(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은 비경제적 이유로 수출입 수량을 제한하거나 특정 국가에 혜택을 주다가 정당한 사유 없이 중단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특히 10조 3항은 모든 회원국에게 ‘자국의 모든 법률, 규칙, 판결 및 결정은 일률적이고 공평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실시하여야 한다’는 의무를 지우고 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3개 소재의 한국 수출을 갑자기 개별허가제로 변경하면서 전략물자 통제에도 참여하지 않는 중국과 대만 등에는 포괄허가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차별적이고 불공평하며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무역 규제이다.
일본 정부가 안보 이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한국은 안보 위협을 방지하는 전략물자의 국제통제 시스템에 대부분 참여하고 있는 나라이다. 일본의 비영리기구인 ‘안전보장무역정보센터’가 2016년 4월에 발간한 각국의 전략물자 통제 평가 보고서를 최근 입수했는데, 한국은 안보를 위협하는 물자의 무역관리에 대해 철저(Rigorous)하며 국제 기준에 적합한 엄격한 통제를 하고 있다고 평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중국은 미사일 기술통제체제(MTCR)에만 가입해 일본 정부조차 안보 위협국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잠재적 안보 위협국에도 포괄적 수출 허가를 해주는 품목을 한국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안보 이유를 내세워 수출 규제를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본, WTO에 제시한 주장 스스로 부정”
-일본 정부는 가트 21조의 예외 조항, 즉 ‘자국 안보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규제 조치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규정을 근거로 내세울 수 있지 않나.
=안보 예외 규정은 적어도 준전시 상태에 준하는 대치 상황이 벌어져야 적용할 수 있는데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서 그런 상황이 발생했나? 일본은 WTO 이사회 회원국 자격으로 4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통상 분쟁 사건에 대해 의견서를 냈는데, 핵심 내용은 ‘안보를 이유로 무역 조치를 하려면 그 조치와 그 나라의 필수적 안보 사이에 어떠한 합리적 연관이 있는지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안보 목적의 무역 규제 조치를 하는 나라에 일정한 판단 재량은 있지만 그 조치의 정당성을 입증할 책임도 있다’는 주장까지 했다.
일본 정부의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는 불과 몇달 전에 WTO에 제시한 주장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 경제산업성은 ‘부적절한 사안이 있었다’라고만 답변했을 뿐 수출 규제의 이유와 정당성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안보 목적의 수출 규제는 그 실질이 한국 정부에 대한 외교적, 정치적 보복 조치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아베 정권은 한국에 수출 규제를 해야만 하는 구체적 사유와 근거를 지금이라도 제시해야 한다.
-협정 위반을 이유로 일본을 WTO에 제소하는 방안을 정부가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WTO 제소를 통한 분쟁 해결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판정 결과가 우리 쪽에 유리하게 나오더라도 실효성을 담보하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일본의 무역 규제는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 WTO 제소를 통해 일본 정부의 부당한 조치를 국제 사회에 계속 알려야 한다. 또 제소를 통해 일본 정부 조치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일본 정부는 패소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즉 일본 정부가 추가로 검토할 수 있는 여러 조치의 선택 폭을 좁힐 수 있는 것이다. WTO 제소는 아베 정권이 더 극단적으로 움직이거나 한국에 더 큰 충격을 주는 조치를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위축 효과가 있다.
-지금까지 내린 조치도 WTO 협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사실을 일본 정부가 잘 알 텐데 왜 이런 무리수를 강행한다고 보나.
=아베 정권은 지금 ‘내가 만들 질서가 바로 이런 것이다’를 한국을 통해 보여주려 하고 있다. 박근혜정부 시절 잘못된 ‘한일 위안부 합의’가 아베 정권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프레임을 무력화시키는 데 활용되고 있다. 전후 고도성장기에 비하면 지금 일본 경제는 장기간 침체 국면에 빠져있다. 일본 국민도 여유가 별로 없다. 그런 상황에서 아베 총리가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를 근거로 ‘한국에 이제 더 이상 과거 식민지 문제에 대한 경제적 배상을 안 해도 된다’는 말을 하니까 먹히는 거다. 정리하면 한국을 향한 아베 정권의 무역 보복은 지극히 단순한, 자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행위라고 보면 된다.
“일본 산업계, 자국 기업 피해 발생 우려”
-최근 일본을 방문해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등 각계 인사들을 두루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무역 보복에 대한 일본 내 여론은 어떤가.
=일반 기업은 지금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일본산 불화수소 등을 핵심 원료로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원료 제조사도 삼성과 SK가 아니면 대규모로 사줄 곳이 없다. 일본 산업계는 실질적 피해가 자국 기업에 발생하지 않기를 정부에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반면에 일본 국민은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분위기다. 일본 안에서는 일반 국민이 알 수 있는 정보가 너무 없다. 우리가 왜 위안부 합의를 받아들일 수 없고,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의 배상을 요구하는지 일본 국민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일본 내 양심적 지식인이나 시민사회와의 적극적 연대 등 한·일 민간교류를 활성화해야 한다.
-한일 간 경제 전쟁과 외교 갈등은 미국이 주도하는 동북아 질서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런 점을 고려해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를 요청하자는 의견이 많은데.
=강대국 중재를 기다리기보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국제 사회에 보여줄 필요가 있다. 다른 국가와 분쟁을 주도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국제적 규범을 적용해 부단히 촘촘하게 성공 사례를 확보하는 과정이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힘센 사람이 와서 단칼에 해결하는’ 방식을 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다. 한일청구권협정이나 한일 위안부 합의 같은 과거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국제 통상 질서와 보편적 인권 규범에 맞는 작은 공간들을 하나하나 확보하며 국제적 위상을 높여 나가야 한다.
강민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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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