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8월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근처에서 ‘아베규탄 촛불대회’를 하고 있다. | 한겨레
일본 정부는 한국을 겨냥해 싸울 준비도 되지 않은 전쟁을 시작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일제강점기의 ‘잘못된 과거’에 대한 책임 문제가 불거지자 수출규제라는 경제적 보복 수단을 들고 나왔다. 외교적 갈등은 외교적으로 해결하자는 우리 정부의 제안을 거부한 채 무모하고 명분 없는 결정을 강행했다. 승자와 패자를 가릴 수 없는 한일 간 경제전쟁은 일본 정부가 먼저 일으켰다.
아베 정권이 내린 일련의 수출규제 조치는 한국 경제에 타격을 주려는 의도가 명백하다. 하지만 일본 경제가 먼저 역풍을 맞고 있다. 한국 내 일본 유통업체의 매출이 급감하고, 일본으로 가는 한국 여행객은 절반 가까이 줄었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 최근호는 한일 경제전쟁을 다룬 특집기사에서 “일본 정부는 예치 않은 상황 전개에 대한 대비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채 모순되는 성명들만 발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에 우리 정부는 총력 대응체제를 구축했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수급 차질 우려가 있는 품목을 선정해 단기적으로는 피해 최소화를 위한 맞춤형 지원 방안을 즉각 시행하고, 중장기적으로는 100대 핵심 품목의 국산화 연구개발(R&D) 투자와 수입선 대체 등으로 공급 안정과 함께 경쟁력 강화를 꾀하기로 했다. 이런 장단기 대책의 강력한 추진을 위해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위원회’도 설치해 운영한다.
▶8월 2일 서울 강남구 삼성전자 딜라이트 홍보관에서 관람객들이 반도체 관련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
일본 정부의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는 지금까지 두 단계로 진행됐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의 핵심 소재로 사용되는 3개 품목(고순도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불화 폴리이미드)을 7월 4일부터 수출 허가 심사 대상으로 지정하면서 첫 단추를 열었다. 이어 8월 2일 각료회의(각의)를 통해 한국을 전략물자 수출의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수출절차 간소화 대상국)’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내렸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각의 결의를 반영한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과 시행세칙에 해당하는 ‘포괄허가 취급요령’을 8월 7일 공포하고 28일부터 본격 시행한다고 밝혔다.
다만 한국만을 대상으로 ‘개별허가’를 강제하는 수출 품목을 추가로 지정하진 않았다. 애초 우리 정부는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로 전략물자 1194개 중 159개 품목이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우려했는데, 일단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언제든 수출 허가 대상 품목을 확대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갖췄다는 점에서 경계의 고삐를 늦출 수 없는 상황이다.
‘예상하지 못한 충격’까지 고려해 대응책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에 대한 수출규제가 시작된 뒤로 지금까지 국내 기업에서 발생한 직접적 피해 사례는 거의 없다. 중소벤처기업부가 7월 15일부터 본부와 전국 지방청에 애로신고센터를 설치해 운영한 결과, 일본 수출규제로 피해를 봤다고 신고한 기업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약 한 달 동안 11건의 불편 사항이 접수됐지만 일본 거래처로부터 추가 서류 요청을 받는 등 평소에도 자주 있는 사례인 것으로 파악됐다. 금융 당국이 정책 금융기관과 시중은행의 상담 창구를 통해 파악한 피해 현황도 마찬가지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일본 수출규제에 따른 피해 기업 수나 피해 규모를 현재로서는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한 조치는 8월 말부터 본격 시행하고 시행 후에도 국내 기업 피해가 나타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차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정부는 ‘예상하지 못한 충격’까지 고려한 종합적 대응책을 마련해뒀다. 단기적으로는 일본의 수출 규제로 피해가 예상되는 산업과 기업에 대한 지원, 금융·외환시장의 불안과 국내 경제 전반의 불확실성 해소가 시급한 과제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예산, 금융, 세제, 규제 등 모든 정책 수단과 가용 자원을 동원한다. 우선 일본 수출규제에 대응할 목적으로 2732억 원의 추가경정예산을 따로 편성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은 ‘기술 상용화(실증) 지원’으로,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46.7%) 1275억 원이 투입된다. 국내 기업이 기술을 이미 확보했으나 신뢰성 통과를 하지 못한 품목의 성능평가를 지원해 상용화 단계에 이르도록 돕는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제품 상용화 기간 단축을 위한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 구축 등에 400억 원,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부품·장비 가운데 납품 가능성이 큰 기업을 발굴해 성능평가에 350억 원을 지원한다. 제품 상용화 테스트를 거친 기업이 양산 시스템을 갖출 수 있도록 국내 생산시설 확충 자금으로도 500억 원을 지원한다. 이밖에 일본 의존도가 높은 핵심 품목 중심으로 소재·부품 기술개발에 650억 원, 중소기업 기술 개선에 217억 원을 투입한다. 기획재정부는 이런 추경예산이 의도했던 효과를 최대한 빨리 달성할 수 있도록 9월 말까지 예산의 75% 이상을 관련 부처에 배정해 집행하기로 했다.
다양한 정보 제공 및 상담 창구 열어
일본의 수출규제에 해당 물품이나 원자재를 다른 나라에서 수입할 경우 기존 관세를 40%포인트 이내에서 경감해주는 할당관세도 적용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국세청은 수출규제 피해를 겪는 기업에게는 국세 납기 연장이나 징수 유예, 세무조사 유예, 부가가치세 조기환급 등의 세제 지원에 나선다. 금융 분야에서도 다양한 지원 방안이 마련됐다. 금융 당국은 산업은행을 비롯한 정책 금융기관을 통해 피해 기업에 대한 대출 및 보증의 만기를 1년 동안 전액 연장해주고, 운전자금 지원용으로 최대 6조 7000억 원의 신규 자금 공급 여력을 확보했다. 소재·부품·장비 기업 전반에 대한 정책금융 지원 프로그램으로 하반기 약 29조 원을 집행하고, 설비 신설 또는 확장, 일본산 제품 대체재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R&D) 투자, 해외 기업 인수합병 투자 등에도 모두 18조 원 규모의 정책 금융을 쏟기로 했다.
일본 수출규제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기업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신속한 정보이다. 정부는 일본 수출규제의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경영 활동을 하려면 정확한 정보 제공과 즉각적인 애로 해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정보 제공 및 상담 창구를 마련했다. 8월 초부터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전략물자관리원에 전용 누리집(http://japan.kosti.or.kr)을 개설해, 일본의 수출규제 제도와 그에 따른 영향, 정부의 대응 방안과 지원 내용 등을 알려주고 있다. 또 7월 22일부터 가동을 시작한 ‘소재·부품 수급대응 지원센터’는 인원과 기능을 점차 확충하며 기업 애로 상담과 맞춤형 컨설팅 등으로 원스톱 서비스를 펼친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따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보다 근본적인 대응 방안은 따로 나왔다. 정부는 관계부처 합동으로 8월 5일 발표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에서 이번 기회에 우리 산업의 대외 의존형 구조를 탈피하고 제조업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했다. 일본의 수출규제 품목을 포함해 국내 주력 산업과 미래 신산업 공급망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100대 핵심 전략품목’을 선정하고, 여기에 앞으로 5년 동안 연구개발(R&D) 투자 등을 집중해 국내 공급 안정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게 정부 목표다. 선정된 품목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기계·금속, 전기·전자, 기초화학 등 6대 주력 산업의 소재·부품·장비 관련 품목이다. 이 가운데 일본의 수출규제로 당장 수급 차질의 위험이 있어 시급히 공급 안정이 필요한 20개 품목은 1년 안에 공급 안정화를 이루겠다고 정부는 밝혔다.
경쟁력위원회 발족하고 실무추진단도
정부 계획에 따르면, 100대 핵심 품목의 국산화 또는 공급망 확보에는 올해부터 빠르고 혁신적인 투자가 이뤄진다. 우선 국가 연구개발(R&D) 투자 재원이 앞으로 7년 동안 약 7조 8000억 원이 들어간다. 핵심 기술의 신속한 확보를 위해 예비 타당성 검토 면제 등 유연한 R&D 지원 방식을 적용하고, 32개 공공연구기관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업종과 품목, 과제별로 다양한 공동 연구플랫폼을 운영한다. 핵심 품목 가운데 R&D 투자로 기술 확보가 어려운 경우에는 해외 전문기업에 대한 인수·합병(M&A) 지원으로 돌파구를 모색한다. 이를 위해 정책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해외 M&A 인수금융 지원협의체’를 구성해 5년 동안 2조 5000억 원 이상의 인수 자금 지원과 함께 자문 및 컨설팅, 사후통합관리(PMI) 등에 참여하도록 할 방침이다. 기술혁신형 M&A에 대해서는 2022년까지 한시적으로 기술가치 금액의 10% 이내에 법인세 공제 등 세액공제도 혜택도 제공된다.
대·중소기업 상생 협력 촉진을 통한 핵심 전략품목 공급망 구축에도 속도를 내기로 했다. 핵심 품목의 수요·공급기업 간 수평적 협력과 수요·수요기업 간 수평적 협력 등 다양한 상생 모델에 대해 자금, 입지, 세제, 규제 특례 등을 포괄하는 강력한 패키지 지원 방안을 마련해 협력 생태계를 조성한다는 게 정부의 구상이다. 소재·부품 분야의 혁신적 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펀드 조성도 추진된다. 연기금과 벤처 투자를 위해 정부가 조성하는 모태펀드가 펀드 투자를 이끌고 민간 투자기관, 벤처캐피털(VC), 개인까지 참여할 수 있는 개방형 플랫폼으로 확장해 운영된다.
정부는 소재·부품·장비 산업 경쟁력 강화 대책의 강력한 추진을 위해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범부처 경쟁력위원회를 8월 중에 발족하고, 산업통상자원부 주관으로 관련 부처와 업종별 대·중소기업 관계자, 민간 전문가들까지 참여하는 실무추진단도 구성하기로 했다. 장관급 협의체인 경쟁력위원회는 주요 정책 과제의 심의와 의결, 입지와 환경 규제 조정, 재정 및 정책자금 지원 방안 등을 결정한다. 정부는 또 2021년 12월 말 일몰 예정인 ‘소재·부품 전문기업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소재·부품특별법)을 개정해, 법 적용 대상을 장비 분야로 확대하고 법의 유효기간을 삭제해 상시법으로 전환하는 특별법을 만들기로 했다.
수요·공급 기업 간 협업 미흡이 원인
그동안 정부가 소재·부품 국산화를 위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1년 ‘소재·부품특별법’ 제정 이후 양적 측면에서 괄목할만한 성장 기반을 마련한 바 있다. 이를 기반으로 우리나라 경제는 생산은 3배, 수출은 5배가 늘어나는 등 외형이 크게 성장했으나, 범용 제품 위주의 추격형 전략에 머물러 핵심 전략품목의 만성적 대외 의존 지속, 글로벌 경합도 증가, 부가가치 창출 능력 정체 등 한계도 적잖았다. 이 과정에서 국내 수요·공급 기업 간 협업이 미흡해 기술 개발과 생산 및 상용화 사이의 단절이 생겼으며, 결국 핵심 전략품목의 국산화가 진전되지 못했다. 일본과의 교역에서 발생하는 만성적인 적자 구조가 바로 어두운 그늘이다.
정부는 이번 대책을 통해 기업 간 협력모델 구축, 기술 개발이 양산으로 이어지는 사다리 정책 추진, 적기의 집중 투자와 기술획득 방법의 다각화, 조속한 생산 및 시설 투자가 가능한 패키지 지원에 역점을 두고 정책 수단을 보강했다. 과거 정책과 비교하면 소재·부품·장비 산업에 예산과 금융, 세제, 입지, 규제 특례 등 정책 자원과 역량을 전방위로 투입한 것으로 평가된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근본적으로 특정 국가에 대한 높은 의존도 등 소재·부품·장비 산업이 가진 구조적 취약점을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며 “우리 제조업이 새롭게 도약하는 기회가 활짝 열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순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