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조작 재판…‘직업? 독립운동!’ 당당

2019.07.29 최신호 보기


l▶일제강점기 재판 모습│서울2천년사

사법제도가 인권을 보호하지 않는 공간, 즉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는 늘 양심수가 있다. 독립운동가들 역시 식민권력의 ‘법’ 위에 독립투쟁의 ‘정의’가 있다고 믿기에 고문을 견뎌내고 옥중투쟁을 불사하며 스스로의 인권을 지켜내고자 했다. 또한 그들 옆에는 함께 법정투쟁을 벌이며 독립운동을 변론하는 변호사들이 있었다.
사법제도는 법으로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갑오개혁으로 사법제도가 성립한 이래 법치주의에 입각한 인권 보호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넓어졌다. 1898년 러시아어 통역관 출신 각료로서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전횡을 일삼다 유배를 가게 된 김홍륙이 고종의 찻잔에 아편을 넣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는 죄인을 심문하면서 악형을 남용했고 부녀자까지 고문했다. 그러자 <독립신문>은 임금을 독살하려 한 범인이라도 법률에 의해서만 처벌되어야 하며 고문과 악형은 인민 생명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l▶조선공산당 사건의 변호사들. 앞줄 맨 오른쪽이 가인 김병로이고 그 뒤로 허헌(오른쪽), 이인 변호사│경인문화사

이러한 선각적 인권의식은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로 넘어가면서 전혀 존중받지 못했다. 태형이라는 전근대적인 형벌이 도입되었고 고문이 남발했다.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 작성한 조서라도 재판에서는 유무죄를 가리는 증거로 채택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조서재판’이란 말이 생겨났다. 고문-허위자백-조서에 의해 조작되는 사건도 적지 않았다.
식민통치 초입인 1911년에 일어난 ‘105인 사건’과 말기인 1942년에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한 사건을 대표한다. 고문으로 조작된 조서가 몸에 새겨진 고문 흔적보다 재판관의 유무죄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인권 보호를 위해 마련된 근대 사법제도가 식민지 조선에서는 부당한 통치행위를 인증하는 제도로 타락했던 것이다.

l▶서대문형무소 감방(왼쪽), 재소자 운동장 전경│대구광역시립중앙도서관

3·1독립선언서 48명 ‘내란죄’ 치열 공방
1919년 3월 1일 발표한 ‘3·1독립선언서’에는 33명의 민족대표가 서명했다. 이들 중 김병조를 제외한 32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여기에 3·1운동을 실질적으로 준비한 16명을 보탠 48명에 대한 취조는 6월 초순에야 일단락되었다. 검사국에서는 이들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에 넘겼다. 예심에서는 48인에 대해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폭동을 야기했다’며 내란죄를 적용하고 해당 범죄를 다루는 고등법원으로 사건을 넘겼다. 하지만 고등법원의 예심판사는 내란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다시 사건을 경성지방법원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48인에 대한 예심이 경성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을 오가는 동안 훌쩍 1년이 지났다.
1920년 7월 13일 48인에 대한 첫 재판이 시작되었다. 잇달아 공판이 이어지는 가운데 허헌 변호사가 “고등법원의 결정서 주문에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 재판소로 지정’한다고 했을 뿐이고 경성지방법원으로 송치한다는 말이 없다. 따라서 관할 지정만 받고 송치받지 못한 본건을 이 법정에서 심리할 수 없다. 하지만 고등법원에서는 이미 보낸 사건이니 다시 고등법원에 송치할 수 없고, 게다가 내란죄가 아니니 고등법원이 재판할 수도 없다”고 주장하며 형식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재판은 위법이니 피고인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l▶서대문형무소 감방(왼쪽), 재소자 운동장 전경│대구광역시립중앙도서관

검사는 고등법원의 결정서 주문에 비록 ‘사건을 송치’라는 말은 없으나, ‘이유’ 부분에 송치라는 말이 나오니 주문에 송치가 포함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논박했다. 결국 재판장은 허헌의 손을 들어주었다. 검사는 곧바로 항소했고 2심 재판부인 경성복심법원은 검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1심 판결을 취소했다.
한국인들이 허헌이 제기한 법리를 이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허헌이 재판부를 궁지에 몰아넣음으로써 결국 경성지방법원이 그의 손을 들어주었기에 관심은 폭발적이었고 신문들은 대서특필했다. 당시 사람들은 피고인들이 흡사 무죄판결이라도 받은 듯 기뻐했다.

l▶경성지방법원 전경│국립춘천박물관

판사에 경어 요구…고문 상처 내보여
독립운동가 관련 재판에서 독립운동가와 그를 변론하는 변호사는 고문으로 꾸며낸 조서재판에 항의하거나 재판 과정에서의 인권유린을 문제 삼으며 함께 법정투쟁을 벌였다. 고려혁명당 사건 재판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려혁명당은 1926년 만주에서 한인 자치결사체인 정의부와 국내에서 건너간 천도교 혁신파와 형평사 간부들이 함께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였다.
첫 공판은 1927년 12월 1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첫 신문을 받은 이동구는 판사에게 “어찌하여 신문할 때 경어를 쓰지 않느냐”고 항변했다. 김봉국은 직업을 묻자 독립운동이라는 취지로 답변했다. 정이형은 판사에게 혐의 사실을 부인하며 충분히 진술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다. 판사가 이를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조서를 읽자 이인 변호사가 항의했다. 이날 고려혁명당 간부들은 모두 혹독한 고문에 강제로 조서를 썼다며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두 번째 공판은 1928년 2월 7일 열렸다. 이날 판사는 피고들의 수갑을 모두 채워두고, 다만 심문할 때만 수갑을 풀겠다고 했다. 김병로 변호사가 재판정에서 피고인의 신체를 구속하는 것을 불법이라고 항의했고 논란 끝에 재판이 연기되었다. 3월 9일 열린 세 번째 공판에서 재판장은 피고인 전원의 수갑을 풀어주었다. 다음 날 열린 네 번째 공판에서 이인 변호사는 첫날 공판에서 제기된 고문 주장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고, 피고들은 고문으로 인한 상처를 내보였다.
3월 19일 개최된 결심공판에서 이인 변호사가 “일본은 동양 평화의 미명하에 한국을 합병했으나 한국에 대한 식민정책은 양두구육과 흡사하다”고 변론하는 순간 검사가 지극히 불온하다며 말을 잘랐다. 판사도 “이인 변호사의 변호는 불온하다”며 변론을 중지시켰다. 일제강점기 법조계에서 처음 일어난 변론 중지였다. 김병로 변호사는 “변호를 중지하려면 먼저 주의를 준 후 논조를 고치지 않을 경우 변론 중지를 할 것이지, 처음부터 곧바로 변론 중지를 한 것은 재판 도덕을 너무도 무시한 것”이라고 항의했다. 4월 20일 선고공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13명의 피고 중 8명이 평양복심법원에서 항소했다. 1928년 10월 6일 열린 항소심에서 판사와 통역생들이 피고인들에게 경어를 사용했다. 1심에서 경어 문제가 쟁점이 된 것을 알았던 것이다.

l▶3·1운동 관련 처벌에 가장 많이 적용된 ‘보안법’ 일부│ 국립중앙도서관

일본 식민정책 잘못 신랄하게 추궁
고려혁명당 사건 재판은 법정투쟁의 축약본이었다. 법정투쟁에서 제기될 수 있는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 담긴 조서의 증거 능력 여부,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이 신체 구속을 받지 않고 충분히 진술할 수 있는 권리, 변호사의 변론권 등이 모두 쟁점이 되었다. 피고인들과 변호사들은 공판마다 재판부를 몰아붙이며 법정투쟁을 벌였다. 그것은 독립투쟁이었고 인권투쟁이었다.
한국인 변호사들은 독립운동을 변론하는 동시에 조선변호사협회를 만들어 사회운동단체들과 연대했다. 또한 독립운동 변론에 앞장섰던 변호사들은 사회운동가로서 명망을 획득해가고 있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는 사상변호사, 좌경변호사, 무료변호사라고 불렸다. 대표적인 변호사로는 허헌, 이인, 김병로가 있었다. 세 사람은 식민권력의 탄압에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신간회 집행위원장을 하던 허헌은 민중대회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변호사 등록을 취소당했다.

이인은 변호사 자격 정지 6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수원고등농림학교 사건 재판에서 “양부모의 학대에 견디지 못할 지경이면 양자는 친부모를 그리워할 것이요, 그리하여 친가의 옛일을 다시 생각함은 인지상정이다. 일본의 식민정책은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라고 변론해 변호사의 품위와 신용을 실추시켰다는 이유였다. 변론 내용을 문제 삼아 변호사를 징계 처분한 첫 사례였다.
김병로는 민사소송에서 의뢰인 중 일부의 위임장이 위조되는 것을 방조했다는 이유로 정직 6개월의 처분을 받았다. 허헌은 해방을 2년 앞두고 단파방송 사건으로 또 검거되어 1945년 4월 출감했다. 이인 변호사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됐다. 1945년 1월 16일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판사로부터 “당신에게 이 정도 판결은 약과다. 그동안 법정을 다니며 얼마나 귀찮게 굴었는지 아느냐”라는 힐난을 들었다고 한다.
독립운동 변론에 앞장섰던 김병로, 이인, 허헌 3인은 조선변호사협회 일원으로서 사회단체와의 연대 활동에 그치지 않고 직접 사회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그렇기에 법률가로서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았고, 때로는 사회운동가로서 고문과 투옥을 경험해야 했다.

l김정인_ 춘천교육대 사회과교육과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와 현대 대학사를 연구하며, 주요 저서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대학과 권력> <오늘과 마주한 3·1운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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