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닙료리집 외관│신한희망재단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7월 10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익선동의 ‘독닙료리집’에는 일제강점기에 들었을 법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1920년대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 같은 구슬픈 노래였다. 손님들이 식당 내부에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큰 소리로 떠드는 이는 없었다. 자리에 앉자 개화기 시대 복장을 한 남자 종업원들이 메뉴판을 전하며 설명했다. “독립운동가분들이 드셨던 음식을 고증을 통해 재현했어요.” 메뉴판에는 김구 선생이 일본 순사를 피해 쫓겨 다니며 드셨던 대나무 주먹밥 ‘쫑즈’, 지복영 선생의 간식인 ‘총유병’ 등 아홉 가지 음식이 있다. 서영해 선생이 드셨을 것으로 추정되는 해산물 스튜와 밀빵, 오건해(1894~1963) 선생이 만주의 거센 추위를 견디는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대접한 돼지고기 요리 ‘홍샤오로우’를 주문했다. 오후 6시가 지나 앉을 자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테이블마다 가득 차면서 입장을 기다리는 손님들이 우산을 쓴 채 유리문 바깥으로 줄을 섰다.
독닙료리집에는 임시정부 당시 먹었던 중국풍의 메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곽낙원 여사가 만든 김치찜도 메뉴판에 올랐다. 1920년대 초, 매일 밤 중국 상하이 융칭팡(永慶坊·영경방) 10호 골목 뒤와 인근 시장통의 쓰레기장을 돌아다니는 노인이 있었다.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다. 그는 밤이 되면 쓰레기장을 뒤져 배추 껍질 등 중국인들이 버린 채소를 찾았다. 이렇게 모은 채소로 만든 음식이 임시정부 요인들의 식탁에 올랐다.
▶오건해 선생의 외손녀 박천민 씨가 차린 식탁에 임시정부 요인들의 간식이었던 루빙(맨 오른쪽), 돼지고기 요리 홍샤오로우, 짠지의 물기를 빼 기름에 볶은 짠지볶음, 납작두부볶음 등이 놓여 있다. 3월 7일 방영된 KBS <한국인의 밥상> 출연당시 박씨가 직접 요리한 음식이다.│KBS 화면 갈무리
쓰레기통 뒤져 모은 채소로 식탁 차려
1920년대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던 시절 살림은 지독히 궁핍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일본 상하이 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른 이후 중국 장제스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긴 했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버려진 배추를 주워야 할 만큼 상황이 어려웠다. 임시정부 청사로부터 400m 정도 떨어진 융칭팡에는 김구 선생과 어머니, 아내 최준례, 두 아들 ‘인’과 ‘신’이 살았다. 김구의 아내 최준례 여사는 1924년 폐병으로 숨진다. 당시 김구 선생이 어머니가 담가주신 우거지김치를 동지들과 함께 먹었던 일화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상해의 우리 생활은 극도로 곤란하였다. 그때 독립운동을 하는 우리 동지들은 취직자, 영업자들을 제하면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어머님께서는 청년, 노인들이 굶주리는 것을 애석히 여기셨지만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두 손자마저 상해에서 키우기 힘들어 환국코자 하실 때 어머님은 우리 집 뒤쪽 쓰레기통 안에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질이 많은 것을 보고 매일 저녁, 밤 깊은 후 그런대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두었다가 찬거리로 하기 위해 여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어머님께서는 네 살이 채 안 된 신(信)이를 데리고 길을 떠나셨고 나는 인(仁)이를 데리고 여반로(呂班路) 단층집을 세내어 석오 이동녕 선생과 윤기섭, 조완구 등 몇 분 동지들과 함께 살며 어머님께서 담가두신 우거지김치를 오래 두고 먹었다.” (<백범일지>)
메뉴판을 보며 10분쯤 기다리자 간장에 조린 두툼한 오겹살과 청경채가 식탁에 올랐다. 숟가락으로 고기가 잘라질 만큼 육질이 부드러웠다. “임시정부 요인들 가운데 오건해 여사의 음식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임정 요인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음식 솜씨가 좋았다고 한다.” 오건해 선생 부부와 딸, 사위 모두 독립운동가였던 이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얘기라고 한다. 신건식이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상하이로 망명한 뒤 아내인 오건해 선생이 몇 해 뒤인 1926년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살림을 챙겼다.
▶독닙료리집에서 손님들에게 밀지를 주는 이벤트가 진행된다. 밀지에 적힌 임무를 수행하면 작은 선물을 받을 수 있다.│박유리 기자
‘그의 음식 맛 못 봤으면 임정 요원 아니다’
오건해 선생은 오랜 타국 생활로 병약해진 독립운동가들의 수발에도 정성을 다했다. 1937년 무렵 병약해진 이동녕의 병환 치료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이동녕은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리스크에서 상하이로 건너가 정부 조직을 모색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4월 13일, 28명의 동지들과 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얼마 뒤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오건해 선생은 만주에 가족을 두고 홀로 충칭으로 와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박찬익의 뒷바라지에도 힘썼다. 박찬익은 1940년 화평로 청사 화재로 머리를 다쳤을 때와 연화지 숙소가 일제의 폭격으로 무너져 어깨 부상을 당했을 때 오건해와 딸 신순호의 간호로 회복될 수 있었다. 오건해 선생이 김구 임시정부 주석을 간호한 일화도 전해진다. 1938년 5월 6일, 김구가 후난성 창사에서 총격을 당해 사경을 헤맨 이른바 ‘남목청 사건’ 때 일이다. 한인 독립운동 세력 간 갈등의 결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중상을 입은 김구는 즉시 상아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중국 의사는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응급처치도 하지 않은 채 문간방에 방치했다. 사망 통지를 받은 김구의 장남 등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창사로 급히 달려왔다. 그런데 김구가 기적적으로 소생하면서 응급치료가 진행됐다. 오건해 선생은 김구가 퇴원 후 요양할 때 식사 등의 봉양을 맡았다. 정부는 이런 공로 등을 인정해 2017년 고(故) 오건해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오건해 선생이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대접했을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었다. 타국에서 오래도록 조국 광복을 위해 애쓴 김구, 이동녕, 박찬익이 이 음식을 병환 중에 드셨을 생각을 하며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오건해 선생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중국 전통 요리인 홍샤오로우에 향신료를 뺀 채 조리했다고 전해진다. 간장에 오겹살을 조린 뒤 투명하고 달콤한 얼음사탕을 넣는 것이 특징이다.
임시정부는 1945년까지 26년 동안 중국에서 활약했다. 많은 이가 상하이 임시정부만 기억하지만 활동과 근거지를 기준으로 임정은 대략 세 시기로 나뉜다. 상하이 시기(1919~1932년), 장정(長征) 시기(1932~1940년), 충칭 시기(1940~1945년)다. 충칭 시기에 김구는 홀로 시내에 머물며 임시정부를 이끌었는데 이때에도 거의 모든 숙식을 오건해 선생이 맡아 보살폈다고 한다.
오건해 선생이 만든 납작두부볶음도 메뉴판에 보였다. 외손녀인 박천민 씨에 따르면, 중국어를 구사할 수 없는 오건해 선생은 시장에서 재료를 사는 것이 더 눈에 띄고 위험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건해 선생은 콩으로 직접 두부를 만든 뒤 무거운 돌을 두부에 올려 물기를 뺐다. 생강과 함께 납작해진 두부를 간장에 조린 뒤 채를 썬 음식이 납작두부볶음이다.
▶6월 18일 서울 익선동 ‘독닙료리집’ 앞에서 시식 행사를 마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있다.│신한희망재단
신한희망재단이 기획해 한시적 운영
독닙료리집 음식들은 과거 독립운동가들이 먹던 방식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과거 자료나 후손의 증언을 참고했다. 김영진 셰프는 “손님들이 식사도 맛있게 드셔야 하기 때문에 기획한 분들과 이야기를 많이 했다. 최종 결론을 낸 게 모양은 유지하면서 맛은 더 있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의미를 담고 음식을 서비스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고증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으로 양미리구이를 꼽았다. 독립군 자금을 지원하느라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김용환 선생이 값이 싼 양미리를 의용대에 대접한 음식이다. 김 셰프는 “그 시대에 양미리를 잡아서 그냥 구워 드셨을 것 같은데 최대한 대중적인 느낌이 나게 하려고 고추장구이로 바꿔 매콤한 양념을 가미했다”고 설명했다.
독닙료리집 한쪽에는 당시 분위기를 재현한 포토존이 마련돼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걸린 벽 앞에서 개화기 의상과 소품을 착용할 수 있다. 신한희망재단이 100년 전, 낯선 땅에서 독립투사들이 먹었던 끼니를 소개한다는 취지로 기획한 식당은 6월 19일~7월 21일 한시적으로 운영됐다. 신한카드 이용 금액의 일부는 독립유공자 후손 지원을 위한 기부금으로 사용된다.
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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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