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나비 네트워크 대학생들이 7월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아베 정권의 보복성 수출 규제 및 군사대국화 움직임을 규탄하는 평화대행진을 하고 있다.│한겨레
미국 대통령이 한국전쟁 정전협정 이후 66년 만에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은 6월 30일. 일본의 보수언론 <산케이 신문>은 일본 정부가 포토레지스트(감광액),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라는 세 가지 물질에 대한 수출규제를 강화할 예정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일반인들은 생전 들어볼 일이 없는 이름의 생경한 물질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반도체 업계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한국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이고 일본 수출 비중이 매우 높은 품목입니다.
이튿날 일본 경제산업성은 이 같은 조치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반발해 취한 조치는 한국 경제의 대들보 ‘반도체’를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아니면 살 곳이 없습니다. 에칭가스는 일본 수입 의존도가 43.9%이며 포토레지스트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각각 91.9%, 93.7%에 이릅니다. 고작 세 가지 물질을 구할 곳이 없어 무너질 정도로 한국 반도체 산업이 취약했던가요. 2018년 한국의 반도체, 디스플레이 매출은 176조 원에 달하는 반면 3개 품목의 수입 규모는 4500억 원 정도입니다. 매출액의 0.3%밖에 안 되는 품목 수입금지로 175조 원 상품의 생산이 중단되는 참담한 상황입니다. 300여 개에 이르는 반도체 공정의 국산화율은 50%, 반도체 장비의 국산화율은 14%에 불과합니다.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 14%에 불과
삼권분립이 명징한 민주주의국가에서 대법원 판결을 정부가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출을 통제하는 것은 선진국 사이에서는 보기 드문 일입니다. 일본 아베 총리는 NHK 방송에 출연해 “한일은 청구권 협정에 따라 종지부를 찍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국가에는 우대 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우익 정치인들은 한국이 전략물자를 수입해 북한의 핵 개발에 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가짜 뉴스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경제적인 이유라면 웃돈을 주고라도 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라면 기업들이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한국 반도체 회사에 일본 업체는 유일한 대안이고, 일본 소재 업체에 한국 반도체 업체는 최대 고객입니다. 경제적 공생관계는 정치, 안보 논란 앞에 무력하기만 합니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왜 그렇게 취약한 것일까요? 일본의 반도체 소재 산업은 어떻게 대체 불가한 경쟁력을 갖게 됐을까요? 포토레지스트 사례를 봅시다. 포토레지스트 세계 시장점유율 1위 업체는 일본의 JSR(Japan Synthetic Rubber)입니다. JSR는 1957년 일본의 합성고무 국산화를 목표로 정부와 민간기업이 공동 출자해 만들어진 회사입니다. JSR의 본래 사업은 이름 그대로 ‘일본 합성고무’입니다. 합성고무 국산화에 주력하던 JSR는 한국 등 신흥국이 정부의 지원과 낮은 인건비를 무기로 강하게 치고 나오자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밀화학, 생명과학 분야로 영역을 넓혔습니다. 그중에 주력으로 하게 된 제품이 포토레지스트입니다. 합성고무에서 파생된 포토레지스트는 미국 코닥사가 처음 개발해 일본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다 1980년대 전방 산업인 반도체 분야에서 일본의 히타치, 도시바 등이 세계 선두권으로 성장하면서 일본 내 포토레지스트 시장이 커졌고 대규모 연구개발(R&D) 투자가 이뤄졌습니다. 2010년대 들어 일본 반도체 제조 분야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선두 자리를 뺏겼지만 후방 산업인 반도체 소재, 장비 분야 기업들의 경쟁력을 대체할 기업은 없었습니다.
일본 제품만 선호, 국내 업체 기회 안 줘
반면 국내에서 포토레지스트를 다뤄본 석유화학 업체의 사례를 보겠습니다. 한국의 석유화학 기업들은 정부의 집중적인 지원을 통해 글로벌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업체들의 추격을 보며 정밀화학 분야에 눈을 돌리게 됐고 포토레지스트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포토레지스트를 생산한 뒤 잘 만들어졌는지 확인하는 검사 장비를 구매하는 데만 수백억 원이 들었습니다. 또 반도체 사이클에 맞춰 2~3년에 한 번씩 검사 장비를 개선해야 했습니다. 기존 사업은 여전히 많은 돈을 벌고 있는데 당장 돈이 안 되는 포토레지스트를 계속 연구하자고 밀어붙일 경영자는 없었습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전방 업체도 검증된 일본 제품을 선호할 뿐 아직 미진한 국내 업체에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소재 산업 국산화를 위해 중소, 중견 업체들이 개발한 제품을 공동으로 시험할 수 있는 검사 장비를 설치해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반도체의 개발 속도에 맞춰 검사 장비를 개선할 만한 지원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규모의 경제를 이루고 있는 일본 업체들은 매년 수조 원의 매출을 올리고 수천억 원을 연구개발비에 쏟아부으며 격차를 벌려갔습니다.
국내 연구 풍토도 정밀화학, 소재 분야의 취약성에 한몫을 했습니다. 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와 같은 소재는 대부분 불소계 정밀 화학제품입니다. 불소계는 완성품은 안정도가 높지만 정제 과정에서 유독한 물질을 사용합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환경규제와 민원 등을 우려해 투자를 꺼립니다. 심지어 대학교에서 학문적으로 연구를 하는 단계에서조차 유독 물질을 다뤄야 하는 불소계 화합물에 대한 연구가 미진합니다. 박철완 서정대 교수는 “유독 물질을 다뤄야 하는 어려운 연구는 하겠다는 사람도 없고, 이런 연구를 하겠다고 해서 더 지원을 해주는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배터리 분야 필수 소재도 의존도 높아
일본에 의존도가 높은 부품, 소재는 비단 반도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의 차세대 먹거리로 꼽히는 배터리 분야도 일본 부품, 소재에 대한 의존도가 높습니다. LG화학, 삼성SDI, SK이노베이션은 글로벌 시장에서 ‘아시아 배터리 자이언트’라고 불리지만 소재 분야로 내려가면 약점이 드러납니다. SNE 리포트에 따르면 배터리 4대 소재로 불리는 양극재, 음극재, 전해액, 분리막은 어느 정도 국산화도 돼 있고 구매처도 다변화됐습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중요 4대 소재에 대해서는 국내 중소, 중견기업들을 육성해 배터리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노력해왔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필수 소재지만 비중이 크지 않은 양·음극 바인더, 파우치는 일본 업체 비중이 매우 높습니다.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현재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국내 대기업과 일본 소재 업체는 십수 년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일본 업체들은 세계 최고 기술력을 갖췄고 친절하고 원하는 납기, 품질을 철저히 지켜줬습니다. 이들을 대체할 수 있는 곳도 별로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글로벌 소재업체 관계자는 “마치 한 기업처럼 반도체 업체가 신제품을 개발하면 그에 맞는 소재를 개발하며 지내왔다”며 “일본 업체 입장에서도 전체 판매량의 30% 내외를 차지하는 한국 업체와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국내의 부족함과 일본의 강점은 서로 합이 잘 맞았습니다. 글로벌 생태계가 구성될 때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수출규제 사건은 국가 간 신뢰보다 더 중요한 ‘비즈니스 신뢰’에 균열을 만든 희대의 사건입니다. 국가 간에는 사이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업 경영을 할 때 가장 피해야 할 것은 ‘불확실성’입니다. 생산 공정이 전면 중단될 수 있는 위험을 확인한 만큼 설사 수출규제가 철회된다 해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또 글로벌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고 자국 우선주의가 확산되고 있어 무역규제 리스크는 발생할 확률이 높은 위험이 됐습니다.
▶7월 4일 서울 종로구 한국무역보험공사에서 열린 일본 수출통제 관계기관 대책회의에 참석한 수출산업 관계자들이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의 모두 발언을 경청하고 있다.│한겨레
첨단 고부가가치산업 진화 갈림길
정치적 갈등은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과거사 문제를 경제 보복으로 연결하고 이에 경제적으로 맞대응하는 것은 실익이 적습니다. 또 한국 정부의 감정적 대응은 일본 극우 세력을 결집시키고 온건한 일본 시민들마저 한국에 등을 돌리는 기폭제가 될 뿐입니다. 한국과 일본 양국의 일반 사람들은 수십 년간 교류해왔고 긴밀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이들을 통해 양국 모두 자기의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체면을 살리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정당성 확보를 위해 강경하게 대응하겠지만, 물밑에서는 타협점을 찾아야 합니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 아니라 어디라도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고부가가치 첨단소재 분야에 대해서 어렵고 힘들고 오래 걸린다고 하여 더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소재 업체들 사이에서는 좀 더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삼성전자, SK 하이닉스도 국산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됐고, 이에 따라 협력 업체를 지원할 명분도 생겼습니다. 정부도 지원을 했다 안 했다 하면서 산업 생태계의 흐름을 끊는 것이 아니라 백년지대계를 그려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겼습니다.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의 문제입니다.
어차피 한국 경제는 전통 제조업에서 중국의 추격을 당하며 첨단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진화해야 할 기로에 서 있습니다. 첨단 분야는 하루아침에 할 수 없으니 진입장벽이 높은 것입니다. 단기적인 수익, 단기적인 지원에 그쳐서 상용화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외면해왔던 장기적이고 심층적인 소재, 부품 분야를 지금부터라도 투자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1, 2년이 아니라 10년, 20년의 그림을 그리고 투자해야 합니다.
권순우 <머니투데이방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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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