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상가 보행데크를 따라 들어선 ‘세운 메이커스큐브’의 모습. | 곽윤섭 기자
창업보육센터 ‘메이커시티 세운’
서울 중심부인 종로에서 청계천과 을지로 방향으로 가로지르다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자 40여 년 전통의 전자상가인 ‘세운상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8~17층짜리 건물 7개가 모여 약 1km(30만 평) 길이를 이룬 초대형 상가군이다. 서울시는 노후화된 건물을 철거하지 않고 유지한 채 ‘다시·세운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2017년 9월 1단계 사업 완공 후 장인의 기술과 청년의 아이디어가 만나 4차 산업혁명 혁신기지 ‘메이커시티 세운(Maker City Sewoon)’이 탄생했다.
세운협업지원센터 기획홍보 매니저 오아영 씨는 “7000여 산업체와 2만여 기술자가 밀집한 세운상가 일대에 새로운 기술을 지닌 청년 메이커들이 모여 세운의 축적된 기술과 4차 산업혁명의 신기술이 더해진 창의제조산업 활성화를 이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운상가 리모델링은 서울시가 진행하는 도시재생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서울의 도시재생은 2000년대 초반 북촌마을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19년째 진행 중이다. 2012년 ‘뉴타운·재개발 수습방안’을 거치면서 서울시 전역으로 본격 확대했다. 4차 산업시대 일자리 중심지의 창출, 안전한 환경 제공을 위한 노후 건물과 기반시설 개선 등이 개발의 핵심이다.
▶세운상가 옥상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에 내리면 남산타워와 종묘 등이 한눈에 보이는 ‘세운 옥상’이 자리잡고 있다.
2020년 일자리 3만 4000개 창출
다시·세운 프로젝트 2단계 구간이 완공되는 2020년이면 ‘메이커시티 세운’ 안에 3만 4000개 이상의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통계(연세대학교 김갑성 교수 연구팀 ‘도시재생사업에 따른 고용창출 효과 분석’, 2017년 11월)도 발표된 바 있다. 인근 대학과 기업 등 5개 전략기관(서울시, 서울시립대,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사)씨즈, 팹랩서울)이 손을 잡고 인적·물적 자원을 투입해 힘을 모으고 있다.
세운상가의 도시재생사업은 크게 세 가지다. 종로와 남산 일대를 보행로로 연결하는 ‘보행재생’, 장인의 기술과 청년의 아이디어가 만나 4차 산업혁명을 이끌어가는 ‘산업재생’, 주민 주도의 지역재생 기반을 마련하는 ‘공동체 재생’이다. 서울시는 2017년 9월 19일 3년 6개월가량의 일대 재생사업 ‘다시·세운 프로젝트’ 1단계(세운~대림상가)를 마무리하고 이를 시민에게 공개했다. 특히 산업재생을 통해 도심 제조업의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제시해 스타트업 창업보육센터로서 시민들과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세운상가 2층은 야외경사광장인 ‘다시 세운광장’과 연결돼 있다. | 세운협업지원센터
오 씨는 “메이커시티 세운은 ‘도심 창의제조산업’이라는 열쇳말로 대표된다”며 “이는 인근에 창작·예술을 비롯해 종이·인쇄·출판, 기계·금속, 전기·전자·정밀 등 약 6000개 제조사업체가 밀집돼 지역 전체가 산업생태계를 구축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도심 4대축 가운데 3축에 있는 세운상가 일대는 서측으로 광화문, 명동 등과 인접하고 동측으로는 동대문과 인접한 중심지역이다. 주변으로 지하철 1, 3, 5호선 종로3가역과 2,5호선 을지로4가역이 도보 5~8분 거리에 위치할 만큼 교통 여건도 우수하다. 세운전자상가와 세운청계상가 사이로 청계천이 흐르고 있어 입지적 잠재력이 높은 지역이다. 오 씨는 “재료 구하기 쉽고, 교통 편하고, 임대료까지 저렴하니 주머니가 가벼운 예술가들에게도 안성맞춤인 곳”이라고 말했다.
▶세운전자박물관은 세운상가의 숨은 가치를 발견하여 풀어내는 공간이다. 세운상가의 역사와 기술사, 문화사, 개인사들을 전시하고 있다.| 세운협업지원센터
지하 보일러실엔 제작·창작 공간
메이커시티 세운은 제조뿐 아니라 업무와 교육, 쇼핑, 여가 생활이 모두 가능한 공간으로 꾸렸다. 여기에 개발과 창작의 공간을 확실하게 계획해 창의제조산업 활성화를 위한 ‘세운 플랫폼’도 운영한다. 오 씨는 “다시·세운 프로젝트의 핵심 공간인 ‘메이커스 큐브’에는 드론 개발실, 스마트 의료기기 개발실 등이 만들어져 미래기술 청년 스타트업과 예술가 그룹 19개소가(2019년 7월 기준) 입주해 있다”며 “이들은 세운상가 일대의 기술 장인, 상인들과 함께 교류·협력하며 도심 창의제조산업의 혁신을 이끈다”고 덧붙였다. 이 밖에도 세운상가의 축적된 시간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지하 보일러실(약 165㎡)에는 제작·창작 활동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세운 베이스먼트’가 조성돼 있다. 공유 오피스, 청년기업 입주공간, 기술강의실, 기술혁신랩 등으로 활용하는 ‘세운 SE:CLOUD’를 통해서는 20~30년 장기적으로 가져가는 프로젝트의 원래 목적을 유지했다.
▶세운전자박물관은 세운상가의 숨은 가치를 발견하여 풀어내는 공간이다. 세운상가의 역사와 기술사, 문화사, 개인사들을 전시하고 있다.| 세운협업지원센터
무엇보다 메이커시티 세운은 구역 전체 동선이 매우 체계적으로 짜여 있다. 다양한 기능이 혼재된 공간인데도 저층부에는 제작과 교육 공간, 중층부에는 기술상담실과 라운지, 상층부에는 전망대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세운전자박물관은 세운상가의 숨은 가치를 발견하여 풀어내는 공간이다. 세운상가의 역사와 기술사, 문화사, 개인사들을 전시하고 있다.| 세운협업지원센터
정보가 골목에서 골목으로 이어져
메이커시티 세운의 재생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실제 일대를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도심과 어울리지 않는 낙후한 공장 밀집지역을 군데군데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오 씨는 “1970년대 가전제품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세운상가 뒷골목에는 장사동과 예지동 일대를 포함하는 전자단지가 형성됐다”며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 들어 대기업과 인터넷 쇼핑의 등장으로 유통구조가 크게 변화하면서 세운상가는 가파른 쇠퇴의 길을 걸었다”고 토로했다. 이어 “대규모 철거 재개발 계획으로 완공 당시 8개 동 중 현대상가가 2009년에 가장 먼저 철거됐다”며 “7개 상가가 건재했는데도 세운상가군이 없어졌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서울시 측은 도시재생 진행 과정에서 핵심을 세운상가군에서 청춘을 바친 기술 장인들과의 합의 형성에 뒀다. 2017년 3월 2일 박원순 시장은 김영종 종로구청장, 협력기관, 세운상가 소유자, 임차인, 주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세운상가 옥상에서 ‘다시·세운 프로젝트 창의제조산업 활성화 계획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박 시장은 “80년대부터 빠르고 유연한 생산방식으로 도심 제조산업의 성공 신화를 만들었던 세운상가군이 청년들의 혁신성, 기술 장인들의 노하우, 미래 기술이 결합해 서울의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내는 4차 산업혁명의 전진기지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며 “아울러 주민들의 염원이었던 세운4구역이 오랜 갈등 끝에 본궤도에 오른 만큼 지역 주민, 문화재청 등과 지속적으로 소통해 차질 없이 진행해나가겠다”고 전했다. 그 결과 세운상가군이 위치한 도심부에는 제조와 관련된 정보가 골목에서 골목으로 이어진다.
▶세운전자박물관은 세운상가의 숨은 가치를 발견하여 풀어내는 공간이다. 세운상가의 역사와 기술사, 문화사, 개인사들을 전시하고 있다.| 세운협업지원센터
오 씨는 “누가 어떤 물건을 원하는지, 재료를 어떻게 가공하는 것이 적절한지, 어디에 좋은 기술이 분포하는지 등 정보와 시장이 빠르게 연결된다”며 “그만큼 아이디어를 구현하려는 젊은 창업자, 창작자에게 거대한 실험실과 같은 곳이다”라고 설명했다. 다양한 시제품의 제작과 검증, 이를 통한 제품의 구체화, 필요한 만큼의 소량 생산, 전문 연구소의 테크니컬 랩도 가능하다. 많은 기업이 시장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운영하는 안테나숍은 기술 지식을 감지하는 통로가 됐다.
1968년 완공 당시 세운상가의 ‘세운’은 ‘세상의 기운이 다 모여라’라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이름처럼 세운상가에선 구하지 못하는 부품이 없다. 이른바 ‘기술 장인’으로 불리는 고수들이 포진한 곳이 됐다. 50여 년이 지난 2019년 세운상가는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통해 ‘메이커시티 세운’으로 태어났다.
강민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