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마치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고 삶에 영향을 미친다. 필자가 아침마다 듣는 라디오 뉴스는 ‘방송법’과 ‘전파법’, 출근길에 타고 가는 자전거나 시내버스는 ‘도로교통법’과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사무실에서는 ‘국가공무원법’과 ‘국가공무원 복무규정’, 점심시간에 들르는 식당은 ‘식품위생법’ 등의 적용을 받는다.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사회기반시설이나 국방, 경제, 사회, 문화 분야의 각종 제도 또한 수많은 법령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앞서 예로 든 법들은 이른바 ‘행정법’에 속하는 것으로, 행정법은 실정법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2019년 6월 말 기준으로 대한민국에 시행되고 있는 법률, 대통령령, 총리령 및 부령의 수는 4786개인데, 그중 4400여 건이 행정 또는 행정에 관련된 법령, 즉 행정법으로 분류된다.
이들 행정에 관한 법령들은 각기 입법 목적이나 규율하는 대상이 다양하지만, 행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측면에서는 유사한 점도 많다. 사업이나 영업 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수단인 각종 인허가제도, 영업의 승계제도, 여러 관련되는 인허가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인허가 의제 제도, 행정의 원활한 집행을 담보하기 위한 신고제도, 보고제도, 나아가 법령을 위반한 사람에 대한 벌로써 부과되는 과징금, 과태료, 행정형벌 제도 등은 여러 법령에서 공통적으로 도입하는 정책 수단들이다.
수백 개 법률 따로 고쳐야 하는 비효율
그런데 이처럼 유사한 제도가 개별법에 흩어져 규정돼 있다 보니, 국민 불편을 해소하거나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공통되는 하나의 제도를 개선하려면 수백 개의 법률을 각각 따로 고쳐야 하는 비효율이 발생한다. 나아가 입법과정에 장기간이 소요되면서 정책 효과도 떨어지고, 입법 시기에 시차(時差)가 발생해 법집행에 혼선을 가져오기도 한다. 일례로, 법제처는 2016년부터 행정 법령에 산재한 신고제도를 ‘수리행위가 필요한 신고’와 ‘수리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신고’로 구분해 규정함으로써 일선 행정기관의 법집행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한 신고제도 합리화 사업을 추진해왔다. 총 4년에 걸쳐 진행된 이 사업을 위해 지금까지 209개 법률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이 중 106개의 법률이 통과됐지만, 관련 법률이 모두 개정되기까지는 앞으로도 수년이 걸릴 전망이다. 이 같은 상황을 두고 2월 국무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국민 불편을 개선하는 사안마다 수백 개의 개별법을 정비해 문제를 해결할 것이 아니라, 일반적·원칙적 규정을 통해 문제를 일괄 해결하는 방안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는 말로 이 문제의 해결책 마련을 당부하기에 이르렀다.
유사·공통 제도가 수백 개의 개별법에 각각 달리 규정된 데 따른 문제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인허가 의제 제도는 현재 116개의 법률에 도입돼 있는데, 그 절차와 내용이 상이해 어떤 법을 적용받느냐에 따라 같은 제도가 다르게 적용되는 등 국민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만일 행정법 전반에 걸친 공통적인 사항이나 유사한 제도를 통일적·체계적으로 규율하는 ‘행정에 관한 일반법’이 있다면 이런 문제점은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또한 현재 행정 분야에는 법전에는 쓰여 있지 않지만 법집행 과정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재판의 준거가 되는 이른바 ‘행정법의 일반원칙’이 다수 존재하는데, 행정법 전반을 규율하는 일반법의 부재로 판례나 학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국민의 보호할 만한 가치 있는 신뢰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신뢰 보호의 원칙’, 행정청이 처분을 하는 경우 그 상대방에게 처분과 실질적 관련이 없는 의무를 부과하거나 그 의무의 이행을 강제하여서는 안 된다는 ‘부당결부금지의 원칙’과 같은 행정법의 일반원칙이 판례나 학설상으로 발전해왔으나, 정작 법전에는 쓰여 있지 않으니 이를 종종 간과해 국민의 권익을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행정에 관한 일반 법전을 마련해 이 같은 내용이 법령에 직접 규정된다면 일선 행정기관의 법치행정 확립과 국민의 권익 구제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행정의 실체법적인 규정 담은 기본법 없어
우리나라는 1996년 12월 ‘행정절차법’의 제정으로 비로소 행정절차에 관한 기본법을 갖게 됐다. 그러나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행정의 실체법적인 규정을 담은 기본법은 마련돼 있지 않다. ‘행정규제기본법’ ‘행정조사기본법’ ‘행정절차법’ ‘행정대집행법’ ‘행정심판법’과 같은 행정 분야별로는 기본법 혹은 일반법의 성격을 지니는 법령을 제정·시행해왔으나, 행정법 전체를 관통하는 법 원칙과 기준을 체계적으로 규율하기 위한 법이 없는 것이다. 행정 분야를 규율하기 위해 무성한 잎과 가지가 뻗어 있지만 이들 잎과 가지를 지탱하고 영양분을 공급해줄 줄기가 없는 셈이다. 행정법을 관통하는 행정법의 일반원칙과 원리에 입각한 행정기본법이 만들어진다면, 행정법이라는 나무의 가지들의 굵기가 다르고 뻗어나간 방향이 다르더라도, 행정기본법이 법치행정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줄 것이다.
1948년 7월 17일 ‘정부조직법’이 법률 제1호로 공포된 이후, 수많은 행정 법령이 만들어졌다. 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행정 법령을 운영하는 가운데 우리 학계와 정부는 행정법 분야에서 이론적, 실무적 역량을 꾸준히 키워왔다. 특히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정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 뜻깊은 해를 맞아 이제 행정법 분야에서도 우리의 현실과 문화에 적합한 행정법 이론과 체계를 갖춰나가야 할 것이다. ‘행정기본법’ 제정을 통해 그 역사적 일에 첫 삽을 뜨자.
한영수 법제처 법제정책국장
국민 입장에서 간소화‘적극행정’ 원칙 명문화
A회사는 2000년 12월에 개발행위허가를 신청했다. 하지만 절차 진행 중에 법령이 개정돼 거부처분을 받자 신법 적용이 타당한지에 대해 대법원 판결(대판 2003두3550)을 받았다. 하지만 판결을 받기까지 5년간 해당 사업에 대한 의사결정이 지연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명문화된 법집행 원칙의 부재와 미처 예측할 수 없었던 행정 법령 개정으로 법치행정과 적극행정에 장애가 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정부가 법치행정을 완성하고 국민 권리보호 강화를 위해 ‘행정기본법’ 제정에 착수했다. 법제처는 7월 2일 국무회의에서 행정기본법 제정 계획을 보고했다. 행정 법령은 국토나 환경, 복지 등 국민 생활이나 기업 활동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핵심 법령이다. 법제처에 따르면 6월 말 기준으로 법률과 대통령령, 총리령·부령 등 현행 국가 법령 4786개 중 4400여 건이 행정 법령에 해당된다. 행정 법령은 국토, 환경, 복지 등 국민 생활과 기업 활동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핵심 법령이지만 민사·형사·상사 등 분야와는 달리 법집행의 원칙이나 기준이 되는 기본법이 없는 실정이다. 특히 신고나 인허가 의제, 과징금 등 공통 제도가 수백 개의 법률에 각각 달리 규정돼 행정의 형평성이 저해되고 국민이 혼란스러워한다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 실제 인허가 의제 제도는 116개 법률에 규정돼 있으나 그 절차가 통일되지 않고 의제되는 인허가 기준을 국민에게 통합 고시하는 법률은 17개(15%)에 불과하다.
법제처는 “명문화된 법집행 원칙의 부재는 법치행정과 적극행정에 장애가 된다”며 “국민은 행정의 법집행을 예측하거나 신뢰하기 어려워 빈번한 행정 쟁송의 원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공직자 ‘적극행정 원칙’ 명문화하기로
이에 따라 법제처는 행정법 집행의 원칙과 기준을 제시하고 개별법상 공통 제도를 체계화하는 등 행정작용 전반을 종합적으로 규율하는 행정기본법 제정 작업을 관계 부처와 합동으로 추진해나가기로 했다.
행정기본법 제정안에는 우선 국민의 권리보호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뢰 보호의 원칙, 비례 원칙, 부당결부금지 원칙 등 행정법의 일반원칙이 명문화될 예정이다. 또 불합리한 규제 개선을 위해 공직자의 ‘적극행정 원칙’도 명문화해 적극행정을 법률상 의무로 규정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인허가 의제, 과징금 등 개별법에 산재된 제도는 국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규정하고, 복잡한 절차는 국민 입장에서 간소화하기로 했다.
김형연 법제처장은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정 100주년이 되는 해인 만큼, 우리 실정에 맞는 행정법 체계를 갖출 적기”라며 “행정기본법은 법치행정과 적극행정을 완성하고 국민은 법집행을 쉽게 예측해 자신의 권리를 충분히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처장은 또 “행정기본법 제정은 행정부뿐 아니라 입법부, 사법부, 학계의 관심과 협조가 필요한 작업”이라며 “법 제정 과정에서 최대한 많은 전문가의 참여를 보장하고 그 의견을 반영해 법안을 만들어나가겠다”고 밝혔다.
법제처는 7월 중 관계 부처 합동으로 구성된 ‘행정기본법 제정 추진체계’와 학계·입법부·사법부 등으로 이뤄진 ‘자문단’을 구성한 뒤 중앙부처·지자체 협의와 공론화 과정을 거쳐 연말까지 행정기본법안(초안)을 마련, 2020년에 입법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강민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