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속으로 들어가 계몽의 불 밝힌 ‘상록수’

2019.08.05 공감 최신호 보기


l▶최용신│최용신기념사업회

21세기를 정보혁명 사회라고 말한다. 지식과 정보, 산업, 경제가 중심이 된 사회에서 인재는 가장 중심에 있다. 과거 농촌이 해체되고 공업화, 도시화된 산업사회로 성장하기까지 우리나라에서 농촌 경제는 중요했다. 1920~30년대 우리나라 인구의 80%가 농민이고 일제의 수탈과 탄압이 농촌 경제와 농업정책으로 집중됐으니 말이다. 더욱이 1930년을 기점으로 일제는 대륙 침략 정책에 이용하기 위해 병참 기지화를 목적으로 침략전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국내 민족운동은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학생운동, 청년운동, 여성운동에 이르는 사회 전반의 저항적 사회운동이 부각됐는데, 농촌계몽운동도 그 시대의 주류에 포함됐다.
1930년대 농촌계몽운동은 언론계와 종교계, 교육계가 농촌 변화에 주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조선일보사의 문자보급운동,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운동, 교육기관에서 수학했던 학생들의 농촌 귀향 활동, 한국YMCA와 YWCA의 농촌계몽운동, 천주교 조선농민사의 농촌운동 등 전개된 농촌계몽운동에서 유독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의 활약은 돋보인다. 브나로드운동이 ‘민중 속으로 향하다’는 뜻에서 19세기 러시아 지식층의 농민계몽운동에 스며든 것처럼 1930년대 우리나라 농촌 브나로드운동은 신지식인과 학생들이 주도했다.

l▶1929년 협성신학교 시절. 맨 앞줄 오른쪽이 최용신

황 에스더 운명적으로 만나 운동가로
최용신(1909~1935)은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 경주 최씨 최창희의 3녀 2남 중 차녀로 태어났다. 일찍 개화한 집안에서 성장했는데, 조부는 덕원군에 사립학교를 설립해 근대교육에 관심이 깊었고 백부와 부친은 그 학교의 교육자였다. 그 영향은 최용신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두남리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다닌 뒤 원산의 루씨보통학교에 진학,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1929년 서울 협성신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최용신은 운명적인 인연을 만난다. 일본과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농촌계몽운동에 관심이 깊었던 황 에스더 교수와의 인연은 최용신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황 에스더는 도쿄 2·8독립선언에 참여해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렀고, 뉴욕 근화회의 일원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 근대교육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 그리고 조국의 당면한 현실을 명확히 인지했던 최용신은 ‘민중 속으로’ 뛰어드는 농촌계몽운동가의 길을 택한다.
1929년 협성신학교 학생대표로 기독교학생청년회에 참여한 뒤 농촌봉사활동에 나섰던 최용신은 농촌의 현실을 확인했다. 무산 아동과 농촌 아동·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한 농촌계몽운동은 90%에 달했던 부녀자, 아동, 청년 문맹률의 변화야말로 민족의 힘을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최용신은 ‘한국YWCA 농촌지도원’으로 경기도 수원 샘골과 인연이 되었다.

l▶1934년 샘골교회 교우들과 최용신(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어느 날 얼굴이 얽은 신여성 하나가 부인 몇 사람과 찾아와서 자기는 지금 샘골에 있으면서 이 지방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바쳐보고자 하니 협력해달라고 했어요.”
훗날 최용신의 열렬한 후원자가 된 염석주는 최용신을 처음 만났을 때 ‘농촌을 찾은 가냘픈 여성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냉소적이었던 마을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최용신은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천곡(일명 샘골)에 파견된 1931년 10월 10일부터 1935년 1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온전히 샘골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기치를 앞세운 그녀에게 샘골의 변화는 교육에 그치지 않았다. 생활 개선, 농가 부업 활동, 부녀회 및 청년회 조직 등으로 이어져 시골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32년 샘골강습소가 허가를 받은 뒤에는 인근 마을의 아이들과 부녀, 노인들이 오전·오후·야간반으로 교육의 갈급증을 해소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샘골의 기적은 1933년 1월 15일 1530평 부지에 완공된 학원 건물로 나타났다. 땅은 독지가가 기증하고 건물 건축은 농민들과 후원인의 모금 금액으로 세워지면서 암울했던 시대에 농촌인들은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l▶조선중앙일보 1935년 1월 27일자 기사. 농촌 부녀의 문맹 퇴치와 무산아동 교육에 노력 중 장중첩증에 걸려 최후를 맞았다는 내용│ 최용신기념사업회

각기병으로 몸 허물어져가도 농촌을 위해 헌신
이때 최용신은 샘골의 농촌운동이 덴마크의 세계적인 농촌운동에 버금가는 농촌계몽운동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녀는 일본 유학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일본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에 입학한 최용신은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각기병으로 도져서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병든 몸으로 샘골로 돌아온 뒤에도 그녀의 농촌계몽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1934년 한국YWCA의 샘골강습소 지원 중단 결정이 내려지자 최용신의 마음은 비통했다.
“조선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 하거늘, 배우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한 우리에게 무슨 발전이 있으며 늘어감이 있겠습니까. 도시의 여러분이여! 당신의 생활은 얼마나 행복스럽고 얼마나 안락하십니까. 여러분 중에는 하루 저녁 오락비와 한 벌 옷값으로 몇백 원을 쓰신다 하옵거늘, 우리 농촌의 어린이들은 자라기에 배가 고프고 배움에 목이 마릅니다….”

1934년 10월 잡지 <여론(女論)>에 최용신은 ‘농촌의 하소연’이란 제목으로 샘골의 아픔을 알렸다. 농촌계몽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대항할 농민, 학생, 청년, 여성의 힘을 키워 우리가 사회 변화의 주인이 되어야 함을 알리는 것이라고 여겼던 최용신. 1934년 4월 10일 최용신은 자신의 기도문에서 “소외된 이들과 함께 행복을 위해, 사회 안정을 위해, 세계평화를 위해 나아가자”라는 글을 남기며 함께 행복한 세상을 꿈꾸었다. 문맹 퇴치와 여성의 지위 향상, 농촌 아동들의 교육과 야학을 통한 문맹 타파, 농촌 생활 개선 등 피폐한 농촌 사회의 부흥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최용신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일생은 소설 <상록수>의 채영신으로 부활해 기억되고 있다.

l심옥주_ 전 부산대 조교수이며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국회인성교육실천포럼 자문위원, 여성독립운동학교 대표다. 제15회 유관순상을 수상했으며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추진위원회 위원, 국가보훈처 사료수집 전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알리다> <윤희순 평전> <윤희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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