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담 혹은 당돌… 일본, 절제 혹은 통제

2019.08.05 위클리 공감 최신호 보기


l▶후카자와 나오토가 디자인한 무지의 CD 플레이어

한국과 일본 관계가 경색돼 있다. 나야 외교 관계에 어두우니 이 문제에 대해 뭐라 말할 전문성이 없다. 하지만 두 나라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지금 디자인 칼럼니스트로서 디자인에 접근하는 두 나라의 인식 차이에 대해서는 조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월간 <디자인> 편집장으로 있던 시절, 사카이 나오키라는 일본 디자이너로부터 글을 받은 적이 있다. 2008년 3월호에 게재된 ‘한국의 디자인, 상대적 가치와 절대적 개성’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사카이 나오키는 한국 디자인에 대해 에두르지 않고 직접적으로 비평했다.
“최근 일본에서도 한국의 가전제품이 눈에 띄게 늘었다. 괜찮다 싶어 들여다보면 한국산이니 말이다. 반면에 ‘이건 뭐야?’ 싶은 학생 작품 같은 것도 보인다. 일본의 제품 디자인에는 일정한 레벨이 있지만, 한국 디자인은 옥석이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독일이나 북유럽의 디자인에서 엿볼 수 있는 국민적 이미지는 없다. 개개의 제품이 잡화나 완구처럼 맥락도 없이 디자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 한국 업체와 일하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점은 프레젠테이션으로 제출한 시제품이 그대로 제품화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사카이 나오키뿐만 아니라 한국을 방문해 한국 기업과 일을 해본 디자이너들은 한결같이 한국 디자인의 발상에 놀라곤 한다. 그것은 좋은 말로 하면 ‘대담한’ 것이고, 나쁜 말로 하면 ‘당돌한’ 것이다. 일본인이 볼 때 한국인은 일단 저지른 뒤 생각하는 부류에 속한다. 사카이 나오키가 한국의 디자인 정체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것은 ‘신중함의 결핍’을 말한 것이다. 이는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낳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늘 시간과 돈이 부족하고 어떡하든 상품은 제시간에 출시해야 한다. 이것이 지상 과제인 문화에서 신중함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되지 못한다. 반면에 일본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다. 누군가로부터 무슨 말을 듣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자연스럽게 규격화된 디자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l▶하라 켄야가 디자인한 무지의 광고 캠페인

틀 지키기와 틀 벗어나기
일본을 좋아하는 지인들은 일본을 가면 어느 도시든지 문화적으로 성숙한 그 무엇을 느낀다고 말한다. 나는 그들이 느끼는 것이 ‘절제’라고 생각한다. 도시는 늘 깨끗하고 질서 정연하다. 나는 미장원에서 그것을 가장 크게 느꼈다. 일본의 미장원은 너무 깨끗하고 조용하다. 미장원에는 많은 도구가 있는데, 그것들이 흐트러짐 없이 모두 제자리에 잘 정리 정돈되어 있다. 어디 미장원뿐이겠는가. 일본의 도시와 건축, 디자인에는 어떤 틀이 존재함을 느낀다. 반면에 한국인은 그 틀을 자꾸 벗어나려고 한다.
나는 일본의 ‘절제’ 미학은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을 완벽이라고 여기는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는다. 일본의 이런 절제미를 좋아하는 서양의 디자이너도 많다. 대표적인 사람이 독일의 디터 람스다.

그는 <오브젝트파이드>라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일본식 분재를 소개하며 감탄한다. “일본의 정원사는, 분재는 반드시 정해진 방법대로 가지를 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은 새들이 거기를 통과할 수 있게 말이다. 대단하지 않는가.” 새들이 분재의 그 작은 나무를 꼭 통과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런 정형화된 분재와 그 근거를 제시하는 이론은 서양인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보였다. 특히 디터 람스처럼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모더니스트에게는 더욱 그렇다. 일본의 절제된 디자인이 서양의 모더니스트들에게 준 영향은 매우 크다. 그들이 일본의 미니멀한 미학 형식에서 느낀 매력은 사물을 대단히 잘 통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정형의 유기적 형태보다는 원, 직사각형, 삼각형 같은 정형화된 기하학적 도형을 좋아하는 엄격한 모더니스트들의 취향과 일본의 절제된 미니멀리즘은 모두 같은 동기에서 출발한다. 바로 통제다. 세상은 통제되고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대단히 인공적인 일본의 정원이 그것을 잘 반영한다. 그들은 정해진 방법대로 정원을 쓸고 닦은 뒤 그것을 침범하지 않고 바라만 본다. 그것은 경계가 분명하게 그어진, 가장 철저하게 통제되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후카자와 나오토, 하라 켄야 같은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의 작품에서 나는 이 통제와 절제의 미학을 절절하게 느낀다. 이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였던 가메쿠라 유사쿠의 1964년 도쿄올림픽의 로고와 포스터에서도 잘 볼 수 있다. 또한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인 이세이 미야케의 유명한 플리츠 플리즈 같은 옷의 섬세한 주름에서도 똑같은 미학을 느낀다. 그것은 한 치의 오류도 용서할 수 없다는 철저한 통제의 결과다.

l▶한국의 막사발

두 문화 우열 가리는 건 어리석어
그들이 통제를 얼마나 추구하는지는 전통문화에도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할복 자살이다. <사무라이>의 저자 니토베 이나조는 이렇게 말한다. “할복은 세련된 자살 방식이어서 냉정한 감정과 침착한 태도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실행할 수가 없었다.” 할복이란 자신의 배를 긋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내 의식이 내 몸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방법이다. 이처럼 과거 높은 계급에 속한 일본인의 삶의 태도에는 통제에 의한 절제가 깊이 내재되어 있다.

l▶이세이 미야케 플리츠 플리즈

이에 반해 한국의 막사발이나 전통 건축에서 보이는 관대한 미학은 비완벽성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과 세상을 통제하려는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맡기는 것으로부터 온다. 이는 춤의 완벽성과 비슷한 것이 있다. 춤은 자신을 철저하게 통제함으로써 완벽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연습 기간을 거친 뒤에는 나를 맡겨야 한다. 이러한 내맡기는 태도를 높이 치는 문화에서는 자로 잰 듯한 형태를 찾기 쉽지 않다. 하지만 두 문화에서 우열을 가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모두 자국이 처한 지리적 상황과 그에 따른 정치적 환경, 그리고 그 지역의 기후, 자연 같은 것이 낳은 것이지 타고난 인간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가까이 있다 보니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문화가 섞이기도 한다. 정치와 경제로는 싸울 수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서로를 인정하며 교류하기를 끊지 말길 바란다.

l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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