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년까지 8조 4000억 지원하고 수요 창출

2019.07.01 최신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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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가늠할 수 없다. 위험을 무릅쓴 도전과 혁신이 새로운 길을 닦는 유일한 방법이다.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이 점차 약화하는 것은 주력 산업의 정체 탓이다. 국내 주력 산업은 선진 기업들이 먼저 개척한 길을 빠르게 추격해왔다. 누군가 앞서 갔던 길을 뒤쫓아 가는 우리 기업들의 능력은 세계가 놀랄 정도로 탁월했다. 상품 수출 기준으로 세계 6위의 산업 강국이 되었고, 세계시장에서 점유율 1~2위를 다투는 ‘세계 일류기업’ 수도 500개 넘게 배출했다. 이제는 앞에 있는 기업보다 뒤따라오는 기업이 더 많아졌다. 4차 산업혁명의 흐름에 따라 시장 환경과 기술 수준도 급변했다. 기후변화와 강대국 간 무역마찰 등으로 미래는 더욱 불투명해졌다. 한국 주력 산업이 대변혁의 시기에 직면했다. 모든 경제주체들이 힘을 모아 새로운 성장 전략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정부가 먼저 청사진을 마련했다. 기존 주력 산업의 혁신을 유도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기 위해 3대 중점 육성 분야를 선정했다. 시스템반도체, 미래형 자동차, 바이오헬스다.

l▶4월 30일 경기도 화성시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웨이퍼칩에 서명하고 있다. | 청와대 사진기자단

국가 단위에서 새로운 산업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으려면 국가적 역량과 자원의 결집이 필요하다. 개별 기업의 전략을 넘어서 국가적으로 추진해야 할 미래 산업에 대한 밑그림이 있어야 새로운 성장동력이 생긴다. 정부는 혁신성장을 이끌 3대 핵심 산업으로 시스템반도체, 미래형 자동차, 바이오헬스를 정했다. 이들 3대 산업에 2030년까지 국가 연구개발(R&D) 자금 8조 4000억 원을 지원하고 정책금융도 집중해 대규모 민간투자까지 촉진할 계획이다.
새로운 성장 산업은 정부가 직접 키우는 게 아니다. 주역은 관련 산업의 기업과 사람이다. 하지만 정부만이 할 수 있는 몫이 있다. ‘우선 구매자(퍼스트 바이어)’로서 선도적으로 수요를 창출하고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의 타당성을 검증해주는 일이다. 정부의 3대 핵심 산업 육성 전략은 바로 이런 수요 창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비메모리반도체로도 불리는 시스템반도체 산업부터 그렇다. 반도체는 돈이나 인력의 양적 투입만으로 단기간에 육성할 수 있는 산업이 아니다. 설비와 소재 공급 체인이 탄탄해야 하고, 관련 기업 간 수평적 분업 관계와 축적된 기술 경험이 중요한 산업이다. 업황 주기에 따라 경쟁 상대와 치킨 게임이 벌어질 경우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규모의 경제도 갖춰야 한다. 반도체는 정보 저장용으로 사용되는 메모리와 각종 정보처리 기능을 탑재한 시스템반도체로 나뉜다. 우리나라는 적은 수의 단일품종 대량생산이 특징인 메모리 시장에선 절대 강자다. 제품 개발에서부터 설계 및 생산 기술, 시험과 검증 설비, 최종 패키징과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전체 플랫폼이 잘 구축된 나라다. 2018년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 규모는 1조 6338억 달러였는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시장점유율이 60%를 넘는다. 메모리 시장에서 한국의 위상은 당분간 굳건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는 산업의 사이클이 굉장히 빠르고 경쟁 지형을 바꾸려면 한꺼번에 막대한 투자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한번 올라선 강자의 지위는 잘 허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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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산업 협력·연계로 생태계 구축
그러나 시스템반도체 쪽에서는 한국이 아직 후발주자다. 국내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3% 안팎에 머물고 기술 수준도 뒤처져 있다. 시스템반도체의 2018년 세계시장 규모는 2466억 달러로, 메모리반도체보다 약 1.5배 더 크다. 게다가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이어서 메모리 제조에 견줘 수익성과 일자리 창출 효과도 더 높다. 정부는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육성을 통해 메모리에 편중된 ‘반쪽 강국’에서 2030년까지 ‘종합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한 대책의 핵심은 국내 관련 산업 간 협력과 연계를 위한 생태계 구축이다.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생태계는 다양한 분야의 제품 수요 산업, 이들 수요업체의 주문에 따라 제품 기획과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Fabless), 또 팹리스로부터 위탁받은 제품을 생산·공급하는 파운드리 분야로 구성된다. 한국은 제품 수요 산업이나 파운드리 분야의 기반은 튼튼하지만 중견·중소기업 중심의 팹리스 분야는 글로벌 경쟁력이 떨어진다. 이에 따라 정부의 시스템반도체 산업 육성 전략은 팹리스 분야에 방점을 둘 수밖에 없다. 우선 자동차, 바이오, 에너지, 사물인터넷(IoT) 가전, 기계·로봇 등 5대 전략 분야를 선정해 각 분야별로 팹리스와 수요 대기업 간 긴밀한 협력 채널(얼라이언스)을 구축하기로 했다. 여기에 대학과 연구기관도 참여해 수요 발굴에서부터 기술 기획, R&D까지 공동으로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 공공부문에서도 에너지, 안전, 국방, 교통 인프라 분야의 공공기관과 팹리스 간 공동 프로젝트를 개발해 신규 수요를 적극 발굴하기로 했다. 5세대(5G) 통신서비스를 위한 장비와 네트워크, 단말기 등에도 시스템반도체의 응용 분야가 넓어진 만큼 팹리스의 참여 기회를 확대하기로 했다.

중소벤처기업부를 중심으로 창업에서 성장 단계까지 애로사항 해결을 위한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고, 외국의 유망 수요기업을 상대로 한 판로 개척 지원에도 나선다. 또 1000억 원 규모의 팹리스 전용 펀드를 조성해 창업을 촉진하고, 유망한 팹리스의 스케일업을 지원하는 정책자금을 확대한다. 삼성전자와 같은 파운드리 기업에 대해서는 시설 투자비의 세액공제 일몰 기간 연장을 검토하고, 핵심기술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강화해주기로 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반도체에 이어 시스템반도체에서도 세계 1위로 도약하기 위해 올해부터 2030년까지 133조 원에 이르는 대규모 투자 계획을 4월 말에 발표한 바 있다.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분야의 전문 인력 1만 7000명 양성 계획도 마련했다. 기업의 수요에 기반한 R&D 사업을 통해 석·박사급 4700여 명, 폴리텍대학을 반도체 특화형으로 전환하는 등 실무교육을 통해 8700여 명을 키운다. 당장 올해 2학기부터 강원대를 비롯한 전국 13개 대학의 유관 학과에 시스템반도체 설계 전공 과정을 개설해 2021년부터는 학부 단위에서만 해마다 200명 이상의 설계 전문 인력이 나올 수 있게 할 계획이다. 정부는 이런 시스템반도체 육성 대책이 차질 없이 추진되면 2030년 파운드리 제품은 세계시장 점유율 1위, 팹리스 분야에서는 국내 기업 전체로 10%의 점유율을 확보할 것으로 기대한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추정에 따르면, 2018년 43조 8000억 원이던 국내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실질 부가가치(2010년 불변가격 기준) 창출 규모가 2030년에는 90.8% 증가한 83조 6000억 원에 이르게 된다

l▶넥쏘 자율주행차 주행 | 한겨레

선도국에 1~2년 뒤처져 신기술 가속
미래형 자동차는 시스템반도체보다 부가가치 증대 효과가 더 크다. 적용되는 새로운 기술과 연관 산업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미래형 자동차를 견인하는 두 축은 친환경 자동차와 자율주행 자동차다. 세계 자동차 산업은 이른바 ‘CASE 혁명’으로 불리는 기술의 격변기를 맞고 있다. 자동차는 ‘Connective(연결), Autonomous(자율), Shared Service(공유 서비스), Electric(전기동력)’이라는 4가지 기술 요소가 접목되면서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어 ‘바퀴 달린 스마트기기’로 진화하는 중이다. 이런 흐름에 맞춰 기존 자동차업계는 다른 업종 기업과의 협업과 공동투자를 모색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사실 미래차 신기술 분야에서 우리나라 기업들은 선진국과의 격차를 아직 좁히지 못하고 있다. 전기차의 경우 현대차의 코나V, 기아차 니로 EV 등의 출시로 격차를 많이 좁혔다지만 여전히 핵심 기술력에서는 선도국보다 1~2년 뒤진 상태다. 자율주행차 개발 속도는 더 느리다. 보통 5단계로 나뉘는 자율주행차 기술 수준에서 우리나라는 대략 3단계 정도에 머물러 있다. 더 높은 단계로 넘어가려면 사람의 눈과 귀 구실을 하는 센서의 요소 기술에 대한 R&D를 서둘러야 한다. 현재 자율주행차에 적용되는 기본적인 요소 기술은 빛을 쏘아 물체를 인식하는 레이저 스캐너 센서, 레이더 센서, 초음파 센서,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모뎀칩 등이다. 우리나라는 값싼 초음파 센서조차 전량 수입하는 실정이다. 각 센서에 들어가는 주문형 반도체와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에 대한 기술도 대부분 외국에 의존한다.

정부와 국내 자동차업계는 미래차 시장의 주도권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우선 기술 격차를 극복하기 위한 의지와 힘을 모으기로 했다. 정부는 관계부처 합동으로 2018년 2월 ‘미래차 산업 발전 전략’을 마련했다. 2022년까지 5년 동안 민·관 합동으로 35조 원을 투자하고, 해마다 3500개 이상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아울러 정부는 미래차의 신기술 개발을 촉진하면서 상용화를 위한 인프라 구축과 제도 정비를 서두르고 있다.
전기차의 경우 급속 충전소를 주요 이동거점 중심으로 매년 1500기씩 설치해 2022년에는 1만 기까지 확충할 계획이다. 전기차 보조금은 내연기관차와의 가격 차이를 고려해 2022년까지 현행 제도를 유지할 계획이며, 공공부문에서는 친환경차 의무구매 비율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2022년에는 100%로 끌어올린다. 또 2018년 전국 시범도시 5곳을 선정해 대중교통의 전기차 전환 프로젝트를 시행한 데 이어 올해부터는 택시와 트럭을 연평균 10%씩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정부는 이렇게 해서 전기차는 2022년까지 누적 기준으로 43만 대, 수소차의 경우 2030년까지 85만 대를 보급한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자율주행차는 서울시와 국토교통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최근 상암동에 5G 기반의 관제센터와 테스트 베드를 조성해 시민 체험 운행과 함께 기술 검증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 올 하반기에는 전국 고속도로에 자율주행차 운행에 필수적인 3차원(3D) 정밀도로지도를 구축할 계획이다. 정밀도로지도는 자율주행차가 스스로 위치를 파악하고 도로·교통 규제를 인지할 수 있도록 사전에 구축한 3차원 공간 정보다. 차에 내장된 센서 정보와 정밀도로지도가 결합하면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인 자율주행이 가능하다. 정부는 올해 안에 판교 제로시티와 대구 수성구에서 자율주행 셔틀 시범 운영을 추진한다.
‘의약품과 의료기기 제조, 의료 및 건강관리 서비스’를 포괄하는 바이오헬스는 정부가 의외로 성장 잠재력이 크다고 판단하는 분야다. “지금이 바이오헬스 세계시장에서 앞서갈 최적의 기회다. 2030년까지 제약·의료기기 세계시장 점유율 6%와 5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해 바이오헬스를 5대 수출 주력 산업으로 육성하겠다.” 문재인 대통령이 5월 22일 충북 오송에서 열린 ‘바이오헬스 국가 비전 선포식’에 참석해 발표한 내용이다.

l▶5월 22일 문재인 대통령이 충북 청주시 오송 CV센터에서 열린 ‘바이오헬스 국가비전 선포식’에서 인사말을 하고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중견·중소기업 중심, 수출 주력으로
정부는 2018년 세계 바이오시밀러(특허 기간이 만료된 복제의약품) 시장의 3분의 2를 국내 기업이 차지했고, 의약품과 의료기기 수출은 매년 20%씩 늘어나는 점 등을 들어 2030년 수출 500억 달러 목표 달성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바이오헬스의 생산과 수출이 정부의 목표대로 증가하면 2018년 89만 명 수준인 관련 분야 일자리는 2022년 97만 명, 2030년에는 117만 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정부의 바이오헬스 산업 육성 방안은 주로 중견·중소기업을 겨냥한다. 우선 연간 2조 6000억 원 수준인 정부 R&D 투자를 2025년까지 연간 4조 원 이상으로 확대한다. 스케일업 전용 펀드를 통해 앞으로 5년 동안 2조 원 이상을 바이오헬스 분야에 투자한다는 계획도 내놨다. 자금이 없어서 혁신적인 신약이나 의료기기 개발을 중단하는 일이 없도록 정부가 전폭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또 국민 100만 명의 유전체 정보 등을 담은 ‘국가 바이오 빅데이터’를 구축하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보유하고 있는 6조 건 이상의 공공 빅데이터를 익명 처리해 올해 안에 민간에 개방한다. 개인정보 유출의 논란이 뒤따르지만 희귀·난치 질환의 원인을 규명하고 혁신적인 치료제 개발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정부는 기대한다.
 
정부가 선정한 3대 핵심 산업은 기술의 융복합, 스마트화 등으로 혁신이 가속화하는 분야다. 이런 분야에서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정확한 수요와 사업성 예측을 전제로 투자를 결정하는 방식은 통하기 어렵다. 앞선 글로벌 기업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트렌드를 스스로 만들어가려는 개척 정신으로 도전해야 한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발굴해서 역량을 쏟아붓는 일은 위험이 뒤따른다. 그러나 갈 길이 멀고 험하다고 도전을 주저하거나 멈추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을 수 없다.

박순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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