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폐간·구속에 탄핵·기자대회로 맞서

2019.07.01 공감 최신호 보기


ㅣ▶1927년 <조선지광> 73호에 공산주의 이론가 노정환(안광천의 필명)이 쓴 ‘신간회와 그에 대한 임무’의 일부. ‘×’ 표기등 검열로 인해 실제 분량이 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는 처음부터 한국인의 눈과 귀를 철저히 틀어막았다. 식민권력이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것만 보고 들을 것을 강요했다. 3·1운동을 일으킨 한국인은 지하신문, 각종 유인물 등 인쇄 매체를 돌려 읽으며 식민권력의 눈 가리고 아웅식 언론 탄압에 일격을 가했다. 이에 놀란 조선군 참모부는 만세시위가 잦아들 무렵 ‘피차간에 의사를 소통하고 융화를 위한 수단으로서 어느 정도까지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는 게 통치상 더 유익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조선총독부는 1919년 가을 한국어 신문 발행을 허가한다고 발표했다. 바로 10건이 넘는 발행 허가 신청서가 접수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중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시대일보>로 개제) 3종을 허가했다. 또 조선총독부는 <개벽> <신천지> <신생활> <조선지광> <동명> 등의 잡지 창간을 허가했고, 1922년부터는 이들 잡지가 시사 문제를 다루도록 허용했다. 하지만 신문, 잡지의 논설과 기사 내용을 사전에 일일이 검열해 조선총독부 입장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삭제나 압수 처분을 내렸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간을 시키기도 했다.

ㅣ▶조선총독부는 언론인 탄압을 통해 <신생활>의 박희도 사장(왼쪽)과 김명식 주필을 구속했다.│한겨레

총독부 지원 친일단체 나서 협박
조선총독부는 언론인 탄압도 불사했다. <신생활>이 1922년 11월호에 실을 예정이었던 ‘러시아혁명 5주년 기념’ ‘민족운동과 무산계급의 전술’ 등의 글을 문제 삼아 잡지를 아예 폐간시켰다. 박희도 사장, 김명식 주필, 신일용·유진희 기자는 구속했다. 동시에 <신천지>에 대해서도 ‘일본 위정자에게 여하노라’라는 기사를 문제 삼아 백대진 주간과 인쇄를 맡은 장재흡을 구속했다.
필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자 언론은 크게 반발했다.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조선총독부가 언론인을 구속한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라고 비판했다. 언론에 문제가 있다면 행정처분으로도 가능한데 굳이 사법권을 발동해 구속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졌다. 필화 사건 이후 조선총독부의 언론 탄압을 기만적이라 비판하며 언론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언론자유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언론은 현대인의 권리이기 때문이었다.

1924년 6월 7일 열린 언론집회압박탄핵대회는 언론인 최초의 언론자유투쟁이었다. 각파유지연맹 회원들이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이사 김성수를 협박한 사건이 발단이었다. 각파유지연맹은 1924년 3월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으며 결성된 친일단체였다. 각파유지연맹은 창립총회에서 독립사상과 사회주의를 비난하며 조선총독부를 돕자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각파유지연맹을 ‘총독정치의 선전 기관’이라며 비판했다. 그러자 각파유지연맹원들이 송진우와 김성수에게 몰려와 사설을 취소한다는 각서를 쓰도록 협박했다.
결국 송진우는 각서를 썼고 김성수는 3000원을 줄 것을 약속했다. 곧바로 김성수가 마루야마 경무국장을 찾아가 각파유지연맹에 돈을 전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송진우가 쓴 각서 사진을 실었다. 일종의 망신 주기였다. 이에 <동아일보>는 협박 사건의 전말을 보도했으나 위신 추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동아일보> 기자단은 송진우를 비롯한 간부 5명에 대한 불신임을 의결했고 송진우와 김성수의 사표는 수리되었다.

ㅣ▶1921년 <개벽> 5월호에 실린 극작가 현철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번역 연재한 <하믈레트> 2 1922년 <개벽> 6월호에 실린 <사랑의 선물> 광고문안│한겨레

당일 ‘치안 방해·보안법 위반’으로 금지
친일단체의 언론인 협박 사건에 이어 조선총독부가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의 집회를 금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또한 각파유지연맹과 연관된 일이었다. 각파유지연맹원인 박춘금이 사람들에게 일본으로 일하러 갈 수 있게 해준다며 자신이 이끄는 노동상애회에 입회하도록 하고 돈을 받은 사실이 발각되자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이 함께 이를 규탄하는 강연회를 계획했다. 그러자 경찰이 강연회를 금지시켰다.
마침내 1924년 6월 7일 신문사·잡지사는 물론 청년단체·노동단체·여성단체·교육단체·형평단체 등 31개 단체 대표 100여 명이 언론집회압박탄핵회(이하 탄핵회)를 결성했다. 탄핵회는 다음 날 5명의 탄핵실행조사위원을 선정하고 언론 및 집회 관련 압박에 대한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 탄핵회는 실태 조사를 바탕으로 6월 20일 언론집회압박탄핵대회를 갖고자 했다. 그런데 당일 경찰이 이 대회가 치안을 방해할 염려가 있고 보안법에도 위반된다며 금지를 통보했다. 당일 통보로 인해 이 사실을 모르는 청중은 대회장에 몰려들었고 경찰은 탄핵회 관련자들을 연행했다가 석방했다. 탄핵회는 6월 28일 다시 대회를 열었다. 1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언론 및 집회에 대한 압박 사례 실태 조사를 보고했고 국내외에서 7월 20일을 기해 일제히 언론 집회 압박을 탄핵하기 위한 연설회와 시위를 벌일 것을 결정하고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하지만 7월 20일 연설회와 시위 역시 경찰의 금지로 무산되었다.
1925년에는 전조선기자대회(이하 대회)가 열렸다. 기자들 스스로 언론 자유 획득을 위해 결속력을 높이고자 하는 취지에서 열렸다. 대회 개최를 결의한 단체는 무명회였다. 무명회는 1921년 11월 27일 창립한 언론인 결사였다. 회원 자격은 신문·잡지·통신에 근무하는 한국인 기자에게 있었다. 1924년 11월 19일 신문사 사회부 기자 20여 명이 조직한 철필구락부도 대회 운영을 도왔다.

“언론 압박 넘어 인권유린” 규탄
대회는 1925년 4월 15일부터 3일간 서울의 천도교기념관에서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참가 신청이 쇄도해 700여 명이 모였다. 첫날 회의에서는 의장에 <조선일보> 사장인 이상재, 부의장에 <조선일보> 주필인 안재홍을 선출했다. 이튿날에는 ‘언론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구속하는 일체 법규의 철폐를 기함’ 등의 내용을 담은 결의문을 채택하고 무명회가 소집할 경우 매년 혹은 격년으로 대회를 열 것을 결정했다. 대회는 마지막 날 야유회를 즐기며 막을 내렸다.
탄핵회와 대회 이후에는 지역마다 기자단이 결성되었다. 군별로 기자단을 조직했고 도별 연합체가 결성되기도 했다. 지역 기자단은 지역별로 기자대회를 열고 기자의 권익 옹호와 언론의 신장을 꾀했다. 경찰이 명예훼손이나 보안법 위반으로 기자를 구금하거나 무단으로 신문을 압류하면 기자단 명의로 항의했다. 지역 기자단도 언론 탄압을 피할 수는 없었다. 1926년 12월 함경남도 고원에서 열린 제4회 함남기자대회에서는 기자단이 정치사회 문제를 의제로 올려 토의하려다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이에 대한 항의 표시로 탄핵 강연회를 열었다가 20여 명이 검거되었다.

당시 언론인 중에는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당하는 경우가 상당수 있었다. 이럴 경우 조선총독부는 이를 언론 탄압의 기회로 활용했다. 1925년 11월 <시대일보> 지방부장인 홍남표가 함흥경찰서에서 온 경찰에 연행되었다. <시대일보> 10월 30일자 지방 면에서 악덕 지주로 지목한 김승환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기 때문이었다.
무명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이 사건은 언론 압박은 물론 인권유린’이라 규정하고, 김승환의 비행과 경찰 당국의 횡포를 철저히 조사해 폭로하고 여론을 환기시킬 것을 결의했다. 철필구락부도 총회를 열고 경찰 당국의 태도를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11월 20일 함흥에서는 함남기자대회가 열려 경찰 횡포를 비판하고 김승환을 성토했다. 하지만 함흥지방법원은 홍남표에게 징역 6월형을 선고했다. 한국인이라면 언론 및 집회에 대한 압박과 탄압이 남발되는 현상을 보면서 일본 식민권력의 통치하에서는 권리를 지켜낼 자유조차 없다는 것을 실감해야 했다.

ㅣ김정인_ 춘천교육대 사회과교육과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와 현대 대학사를 연구하며, 주요 저서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대학과 권력> <오늘과 마주한 3·1운동>이 있다.


관련기사

페이지 맨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