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스님·주민 무장 항일투쟁 ‘산파’

2019.07.08 최신호 보기


l▶봉려관 스님 진영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가 뜨겁다. 100년 전 연령·계층·성별을 뛰어넘어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선조들의 구국 행진을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기억을 담고자 뛰고 있다. 올해는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다. 독립운동의 그날, 각계각층에서 구국의 대열에 섰던 여성을 조명하는 가운데 유독 불교계 여성 독립운동가는 다뤄지지 않았다. 그러면 불교계 여성은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일까?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불교계는 영풍정 불교연구회, 통상회를 개최하고 각 사찰에 ‘일반 승려는 제 힘에 알맞은 출의(出義)를 할 것’이라고 통지했다. 이에 총무 이보담과 평의장 홍월초, 유지 선사 150여 명이 결의했는데, 그 주에는 비구니 스님도 있었다. 종남산 미타사 여승 취해(翠海) 스님 등 40명이 의연금을 각출해 8원을 기성회에 전달한 것이다.
그리고 비구니 스님의 독립운동에 대한 흔적은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불교계 비구니 스님의 독립운동을 확인하기 어려운 것은 남겨진 자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불교계에서는 소리 없이 조용히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관례화된 가운데 비구니 스님의 희생도 그 선상에 있다. 필자가 지난 6~7년간 제주 지역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비구니 스님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l▶관음사 전경

조직망 갖추고 곤봉·화승총 등 준비
제주도 화북리 출생의 봉려관 스님(1865~1938)은 근대 제주 불교계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제주에서의 활동 이력은 놀라울 정도다. 1908년 관음사 창건, 1911년 법정사 창건, 1918년 대흥사 제주포교당 허가, 1923년 불법사 창건, 1927년 백련사 창건, 1937년 월정사 창건 등 여성의 몸으로 돌담을 쌓으며 시작한 절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제주 근대 불교를 일으킨 것이다. 그 배경에는 제주 출신인 스님의 출생과 제주가 감내해야 했던 시대 변화가 연동되어 있다.

1900년 이후 제주는 외부인과 제주민의 대립과 갈등이 고조됐는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제주와 일본의 갈등은 극대화되었다. 그 가운데 제주에서는 신문물 유입과 종교, 일본의 어장 침탈, 이재수의 난, 제주 해녀의 저항 등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근대화와 일제 강점의 영향으로 제주에 변화가 있는 시기, 봉려관 스님은 해월굴에서 수행하며 맨손으로 절을 짓기 시작했다. 1911년 법정사 창건과 스님의 항일투쟁 이면에는 항일 독립자금이 있었다. 1918년에 무오법정사항일항쟁을 주도한 김연일, 강민수, 방동화, 정구용, 김인수, 김용중, 강림호 스님 등이 법정사에서 항일운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 봉려관 스님의 법정사 창건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뒷바라지가 있었지만, 비구니 스님의 활동이라는 이유로 지금껏 가려져왔다.

l▶봉려관 스님 행적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불교계 독립운동으로는 규모가 큰 투쟁이었다. 1918년 10월 7일 승려들이 국권 회복을 위해 일으킨 독립운동은 법정사 인근에 있는 서귀포시 도순리 주민과 하원리·월평리·영남리 등의 주민 700여 명이 합류해 제주 최대 항일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더욱 주목할 것은 법정사 항일운동이 1919년 3·1운동보다 먼저 일어난 항일투쟁이라는 점이다. 스님과 주민들이 마음을 합해 제주도 내 일본 관리의 불합리한 처우와 일제의 감시, 탄압 등에 대해 격문을 발표한 뒤 항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법정사 창건과 오랜 기간 독립운동을 지원한 역할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법정사 승려들은 독립운동을 사전에 계획하고 관련 조직망을 갖추었으며 곤봉·화승총 등 무기도 준비했다. 그 시기의 열악했던 제주 환경을 감안하면 승려들의 항일투쟁은 이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일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외부로부터 독립자금을 조달하고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던 봉려관 스님 덕분이다.

l▶해월굴 표지

해남 대흥사 심적암 참사 보고 결심
왜 봉려관 스님은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일까? 그 배경을 살펴보면 봉려관 스님이 출가 수계를 받은 해남 대흥사 심적암과의 연관성이 주목된다. 심적암의 의병과 스님의 처절한 죽음에 대한 목격은 봉려관 스님으로 하여금 독립운동 대열에 서게 했다. 1909년 7월 9일 새벽 대흥사 심적암에 일본 경찰이 총칼을 들고 나타났다. 이날 심적암 스님 5명을 포함해 항일의병 30여 명이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의병과 스님 22명 전사, 8명 포로, 화승총 47점, 군도 5점, 30~40여 명 도피’로 기록된 심적암은 전라도 의병 마지막 근거지이자 참사 현장이었다.
1909년 심적암 사건 이후, 봉려관 스님은 항일운동 거점지로서 법정사 창건을 서둘렀다. 그리고 강창규, 방동화, 김연일 등 스님들이 법정사에서 교류하며 제주도 내 항일투쟁은 본격화되었다. 봉려관 스님의 활동 소식이 들리자, 오사카에 거주하던 제주민의 항일자금이 유입되기 시작했고 이에 봉려관 스님은 육지를 오가며 탁발과 보시로 받은 불사금으로 독립자금을 모았다. 불교의 전파와 제주민의 활동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제주불교부인회’와 ‘제주불교소녀회’를 창립해 여성 계몽활동을 했다.

1925년 제주에는 중앙포교당이 창건되면서 관음정진이 더 본격화됐는데, 그중에서도 관음사 내에 해월학원을 설립해 여성 교육에 힘을 쏟았다. 독립운동가의 뒤에서 소리 없이 지원활동을 이어오며 지역민과 소통했던 봉려관 스님은 갑자기 의문사하면서 그의 활동은 묻히고 말았다. 1938년 5월 29일 점심 공양을 마치고 오후에 관음사에서 버섯을 채취해 먹던 중 의문사한 것과 스님의 유골이 한참 지난 뒤에야 한라산 관음사 근처 산중에서 유골 항아리로 발견된 정황은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근대 제주 불교를 재건하고 제주 최초의 비구니로서 독립운동을 했던 봉려관 스님. 그의 활동을 살펴보며,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장 선포문 제3조에 명시된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의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는 내용을 떠올린다.

l심옥주_ 전 부산대 조교수이며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국회인성교육실천포럼 자문위원, 여성독립운동학교 대표다. 제15회 유관순상을 수상했으며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추진위원회 위원, 국가보훈처 사료수집 전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알리다> <윤희순 평전> <윤희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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