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백정 ‘인간 해방·평등’ 인권선언

2019.06.17 공감 최신호 보기


;▶경남 진주의 형평운동 기념탑

1894년 봄,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칠반천인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패랭이를 벗게 할 것’을 주장했다. 그해 여름에 들어선 갑오개혁 정부는 천민 해방을 단행했다. 이때 소를 잡고 가죽을 다루며 천대와 멸시 속에 살던 백정의 신분 해방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백정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까지 차별이 이어지면서 백정 출신의 자녀들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진주에서 처음 형평운동이 일어난 계기도 이 때문이었다. 진주에 사는 이학찬은 백정 출신의 자산가였다. 그는 자녀를 학교에 입학시키려 했으나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설령 허가를 받더라도 나중에 알려지면 배척을 받아 그만두어야 했다. 이런 원망스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40만 백정 출신에게 희망을 주고자 이학찬은 직접 사회적 차별의 철폐를 요구하는 형평운동에 나섰다.
형평운동의 출범에 자극을 준 것은 1922년 일본에서 일어난 수평운동이었다. 일본에서는 ‘에다’라고 불리는 부락민이 천민으로 차별을 받고 있었다. 1871년에 에다 해방령이 반포됐지만, 이후 40여 년간 부락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나라현의 부락민 단체인 청년동지회가 수평사를 창립하고 ‘절대 해방과 직업의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l▶형평운동을 이끈 강상호 선생(왼쪽)과 그의 동생 강영호 선생. 강영호 선생은 진주 소년운동을 주도했다.│형평운동기념사업회

호적에서 백정 신분 표시 삭제 요구
형평사 창립대회는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열렸다. 이때 발표한 ‘형평사 주지’에는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인간으로서 권리를 누리려는 백정 출신들의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권장하여 우리도 참다운 인간이 되기를 바람이 본사(本社)의 주지다.’
‘형평사 주지’는 일제강점기에 가장 대표적인 인권선언이었다. 인간다운 대우를 받기 위해 차별받는 약자인 백정 출신이 스스로 일어서 인간 해방과 평등 세상을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형평사는 백정 출신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인이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도록 했다. 형평운동을 백정 출신에 대한 차별 철폐 운동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 전반의 차별 철폐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인간다운 대우를 요구하는 형평사의 인권운동에 언론은 물론 청년·노동·농민 단체가 적극적으로 나서 지지하고 지원했다. 이런 호응 속에 형평사는 287개의 지사와 분사, 3만 2000여 명의 사원을 거느린 주요한 사회단체로 자리매김했다.

형평사는 백정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고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평등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결성됐다. 백정 출신에게도 인권이 있음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겠다는 집단적 저항운동으로서 형평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형평사는 차별 철폐 운동에 적극 나섰다. 가장 먼저 호적에서 백정이라는 신분 표시를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조선총독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방관청이 관행적으로 호적에 백정 신분을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형평사는 지역별로 호적 정정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형평운동의 진원지인 경상남도에서는 형평사의 요구를 받아들여 도 차원에서 각 군청에 호적 정정을 지시했다. 전라북도 익산군 황등면은 형평사원이 면장과 직접 호적 정정을 교섭했다. 한편 관청에 대해서는 관리들의 백정 출신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을 철폐할 것을 요구했다. 형평사는 관리들이 형평사원들에게 무례한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각 관청과 교섭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l▶형평사 제6회 정기전국대회 포스터│진주시청

자녀 입학 방해 땐 조직적으로 대항
백정 출신에 대한 차별 중 형평사원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아동교육 차별이었다. 우선 형평사는 학령아동의 취학에 힘썼다. 형평사원의 자녀 입학을 방해하는 경우, 전 사원이 결속해 이에 대항하고 대책을 마련했다. 또 때를 놓치거나 차별로 인해 진학하지 못한 자녀를 위한 강습소를 설치했다. 야학도 형평사원의 자녀 교육에 한몫했다. 백정 출신들이 무엇보다 자녀들이 교육을 통해 세상에 눈뜨고 실력을 쌓는 것도 차별 철폐로 가는 중요한 수단이라 생각했기에 형평사가 여기에 쏟는 관심은 각별했다.
형평사는 자녀 교육과 함께 사원에 대해서는 사회인으로서 기본 소양을 갖추기 위한 계몽에 나섰다. 차별이나 무시당하지 않고 동등한 대우를 받으려면 그에 걸맞은 소양을 갖춰야 한다는 인식에서였다. 신문 잡지를 구독하는 일과 강습회·연설회가 권장됐다. 이를 사원 교양이라 불렀는데 모든 지사와 분사에서 추진했다.

형평사가 창립될 때부터 일어난 반형평운동은 형평운동 전 기간에 걸쳐 전개됐다.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당연시하던 양반 출신이나 관리, 그리고 농민들이 반형평운동에 가담했다. 반형평운동은 형평사원에 대한 개별적 또는 집단적인 물리적 폭력의 형태로 나타났다. 형평사는 반형평운동이 일어나면 진상조사위원 혹은 특파원을 파견하고 응원대나 결사대를 조직해 도왔다. 그리고 경고장을 발송하고 조선총독부에 재발 방지를 요구하고 상해폭력죄로 고소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대응했다. 1925년 경상북도 예천군에 자리한 형평사 예천분사의 2주년 창립 기념식에서 예천청년회장 김석희는 공공연하게 형평사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
‘백정을 압박하는 것이 하등의 죄악이 될 것이 없다. 어느 시대, 국가를 물론하고 국법이 있는 것이다. 그 국법을 어기다가 백정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백정을 압박하는 것이 결코 개인의 죄악이나 사회의 죄악이 아니다.’
이 발언을 기화로 예천에서는 수천 명이 며칠 동안 예천 형평분사와 이를 돕기 위해 형평분사에 단체 가입했던 신흥청년회를 습격하고 형평사원의 집을 수색해 남녀를 가리지 않고 구타하는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1925년 8월 16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준엄하게 지탄했다.
‘형평사원과 농민 간에 차별이 있으면 몇만 분의 일이 있으며, 조선인이라고 하는 공동의 비참한 운명을 지닌 마당에 무엇이 얼마만큼 다른 것일까? 하물며 서로 협력하고 해방운동의 기세를 일으켜 생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아내기에 여력이 없는 이때에 이 싸움은 참을 수 없는 분노만을 일으킨다.’

l▶해방 이후 1947년께 야산 이달(왼쪽 둘째) 선생이 전북 이리 송학동 후배 이상춘씨의 집에서 함께 한 모습. 야산과 이씨는 형평운동을 같이하며 독립자금을 모아 전달한 선후배 사이였다.│한겨레

총독부 탄압 표적…협조 단체로 전락
반형평운동에 맞서 형평사는 안으로 더욱 공고히 단결하는 한편, 밖으로는 함께 연대할 제휴 세력을 찾았다. 형평사는 예천 사건 이후 사회단체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각종 사회운동에 가담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형평운동에 대한 지지기반은 더욱 확장되었다.
한편 1920년대 사회운동이 그러했듯, 형평운동가 중에도 사회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급진파가 출현했다. 급진파들은 ‘백정에 대한 인권유린이나 사회적 차별은 자본주의의 소산이므로 노동자·농민의 계급투쟁과 제휴해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정치투쟁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보편적이고 순수한 인권운동만으로 백정 계급의 해방이 요원하다는 것이었다.
급진파는 1928년 무렵 형평사를 이끄는 주류로 떠올랐으나 결국 탄압의 표적이 되었다. 1932년 말부터 조선총독부가 급진파 100여 명을 검거하면서 형평사는 차츰 조선총독부에 협조하는 단체로 전락했고, 마침내 1935년 친일 융화를 표방하는 대동회로 개편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백정 출신들은 스스로 나서 차별 철폐와 인권 해방 운동을 전개했고 사회운동과 적극적으로 연대하며 주요 사회운동 세력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런 노력은 결국 백정 출신이라는 낙인과 차별을 없애는 데 기여했다. 여기에 일본의 지배와 차별을 받는 민족으로서 우리 안에서는 절대 차별이 존재해선 안 된다는 평등과 인권 의식이 확산되며 백정의 ‘핏줄’은 역사에서 지워져갔다.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대격변을 거치면서 백정의 후손은 분명히 존재할 터인데, 누가 백정 후손인지 알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신분제의 최하위에 위치했던 천민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수평운동을 먼저 시작한 일본에는 아직 부락민이라는 천민이 있으며 여전히 차별받고 있다.

l김정인_ 춘천교육대 사회과교육과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와 현대 대학사를 연구하며, 주요 저서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대학과 권력> <오늘과 마주한 3·1운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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