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라는 이름은 고지 위에 28만발의 포탄이 떨어져 고지 위가 파헤쳐져, 하늘에서 보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6·25전쟁 이후 붙힌 이름이다. 6.25전쟁 최대 격전지인 백마고지 전승비 앞에 있는 백마상
‘철원 DMZ 둘레길’이 6월 1일부터 민간에 개방됐다.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백마고지가 자리한 곳이다. 4월에 개방한 DMZ 평화의 길 고성 구간에 이은 두 번째 DMZ 개방이다. 5월 31일, 민간 개방을 하루 앞두고 특별한 손님이 이곳에 초대됐다. 백마고지 전투에 직접 참전한 세 명의 역전 용사다. 모두 나이가 90이거나 90을 바라본다. 누구보다 착잡한 심정으로 70여 년 만에 전투 현장을 바라보고 걸었다. 그들은 백마고지 전투를 어떻게 치렀고,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들과 함께 시간을 되돌려 전쟁 속으로 들어가본다.
▶백마고지 승리를 기념하는 전승비
말이 없다. 그냥 조용하다. 숨죽이고 바라본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철조망 건너 펼쳐진 평야. 강물이 흐른다. 다리가 있다. 바로 저 고지다. 그때는 그냥 고지였다. 나무도 풀도 없었다. 무려 28만여 발의 포탄을 양쪽에서 쏘아댔다. 어떤 생명체도 살아날 수 없었다. 명령에 따라 비탈진 땅을 목숨 걸고 기어올랐다. 명령에 따라 뛰어 내려왔다. 열흘 동안 무려 12번이나 정상의 주인이 바뀌었다. 삶과 죽음은 경계가 없었다. 숨을 계속 쉴 수 있으면 살아남은 것이고, 포탄과 총탄에 육신이 찢어지고 흩어지면 죽은 것이다.
백마고지 전투였다. 평생을 따라다니는 악몽이다. 이제 나이 89세. 무려 70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꿈에서 그날이 재현된다.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비틀면서 괴로워하다 눈을 뜨곤 한다.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중공군이 꽹과리와 괴성을 지르며 새까맣게 몰려온다. 마구 총을 쏘았다. 중공군들은 마치 죽음을 모르는 좀비처럼 치고 올라온다. 총알도 떨어졌다. 퇴각 명령이 내려졌다. 몸을 돌려 도망가려는 순간 중공군이 뒤를 덮친다. ‘악’ 비명 소리가 나며 중공군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순간 눈을 뜬다. 또 그 꿈이다.
▶백마고지 참전용사 세 명의 노병이 백마고지가 보이는 화살머리고지에서 전방을 바라보며 당시 치열한 전투 순간을 회고하고있다. 왼쪽부터 박명호, 이건모, 김영민 어르신.
“차라리 겁도 안 났다, 겁낼 틈이 없었다”
박명호 어르신은 백마고지참전전우회 회장이다. 6·25전쟁이 터질 당시 19세. 남양주가 고향인 그는 서울적십자병원에 취직해 근무 중이었다. 제2국민병으로 징집됐다. 중공군이 6·25전쟁에 개입되며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정부는 약 50만 명의 장정들을 긴급 군인으로 징집했다. 그러나 졸속으로 운영되며 지휘 통솔이 허술했다. 제대로 훈련도 이뤄지지 않고 우왕좌왕했다. 1951년 1·4후퇴 당시 이들은 보름간 걸어서 서울에서 부산으로 후퇴했다. 하루에 주먹밥 한 덩어리로 배를 채워야 했고, 가마니를 덮고 자는 혹독한 환경에서 동사자와 아사자가 1000여 명 발생했다. 결국 간부들이 거액을 착복하고 양곡을 부정처분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건’이다. 박명호도 걸어 걸어서 부산까지 갔다. 갖은 고생을 겪어야 했다. 1951년 5월 정식 군인으로 편입됐다. 처음엔 박격포를 담당하다 소총병이 됐다. 9사단 28연대에 배속돼 강원도 김화고지 전투에 투입됐다. 유엔군에 무려 58번 점령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난공불락의 고지였다. 9사단은 이틀 만에 이 고지를 점령하고 중공군을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됐다.
“차라리 겁도 안 났어요. 아니, 겁을 낼 틈이 없었죠.” 옆에 있던 동료가 줄줄이 죽어나갔다. 그도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고, 왼쪽 다리 허벅지와 왼쪽 어깨에 포탄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당했다.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에 참호를 뛰어나가다 보면 아침에 같이 밥을 먹은 동료가 ‘푹’ 하고 쓰러지곤 했다. ‘빗발치는 총탄’이라는 것이 실감됐다. 피를 흘리고 신음 소리를 내며 죽어가는 동료를 두고 전진해야 했다.
▶백마고지에서 숨진 국군들의 이름이 새겨진 위령탑
“실제로 중공군을 총으로 쏘아 죽였나요?”
“그럼, 조준 사격도 했어.”
“몇 명이나 총으로 죽였는지 기억나시나요?”
“기억나지, 내 총에 맞아 죽어가던 그들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 아마도 7~8명 될 거야.”
“중공군과 육박전도 치렀나요?”
“밤새 육박전을 하다 날이 새곤 했어.”
“몇 번이나 육박전을 벌였나요?”
“5~6번일 거야.”
▶박명호 어르신으로부터 당시 전투 상황을 설명듣고 있는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왼쪽)
전쟁 영화의 치열한 전투 장면이 그에게는 현실이었고, 삶과 죽음의 현장이었다. “전투를 치른 다음 날 아침에 중대장이 인원 보고를 했어. 180명 중대원 가운데 전사 70명, 부상 50명, 행방불명 30명, 현재 인원 30명. 그러니까 180명 가운데 100명이 죽거나 행방불명됐고, 30명만 다시 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지.”
▶처음 열린 철원의 백마고지 DMZ 평화의 길에 있는 전망대. 철책선 뒤의 하천이 남북한을 두번 왔다갔다하는 역곡천이다.
중부전선 심장부로 ‘철의 삼각지대’
6·25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였던 백마고지 전투를 새겨보자.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북서쪽으로 약 12㎞ 지점에 있는 해발 395m의 백마고지는 애초 395고지로 불렸다. 국군과 중공군이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심한 포격으로 산등성이가 허옇게 벗겨져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백마(白馬)가 쓰러져 누운 듯한 형상을 해 전쟁이 끝난 뒤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됐다. 1951년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됐다.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기로 정한 뒤 한국·유엔군과 북한·중공군은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려 했다. 백마고지는 중부전선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철의 삼각지대(철원·김화·평강)’ 중 하나인 철원평야와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 당시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9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간 한국군 9사단과 중공군 제38군 3개 사단은 이 고지에 28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목숨을 잃거나 다친 국군은 3500여 명, 중공군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고지 주인도 24차례나 바뀌었다.
▶5월 31일 철원 백마고지 DMZ 평화의 길 참관에 참여한 참전용사와 민간인들이 통일의 염원을 담은 글귀를 써서 철책에 부착하고 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 일대에 2000여 발의 포탄을 투하하며 공격을 개시했다. 중공군은 제38군 예하의 4만 5000명 병사를 동원했다. 열흘간 혈전을 치른 끝에 제9사단이 중공군을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21만 9954발의 포탄을, 중공군은 5만 5000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백마고지 전투를 마치고 분대장이 된 박명호는 6·25전쟁에서 두 번째로 격렬한 전투로 꼽히는 저격능선 전투에 투입됐다. 8개월간 전투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그는 1955년에 일등중사로 제대했고, 30세에 결혼했다. 슬하에 2남 3녀의 자녀를 두고 여러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그는 여생을 ‘백마고지전투참전전우회’를 이끌며 살아간다.
▶박명호 어르신이 써붙힌 소망의 글
“시간도 모르고 명령 따라 진격-후퇴”
이건모(90) 어르신은 백마고지전투참전전우회 부회장이다. 22세의 나이에 입대해 백마고지 전투와 저격능선 전투를 치르고 10년간 군 생활을 하다가 일등 이등상사로 제대했다. 6·25전쟁 발발 당시 그는 체신부 공무원이었다. 1952년 8월에 입대해 간단한 훈련을 받고 기관총병으로 두 달 만에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됐다. 소총병보다는 약간 뒤에서 적들을 향해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여기저기 포탄이 떨어지는 고지에서 그는 큰 부상 없이 살아남았다.
“낮에는 유엔군의 비행기가 포탄을 쏟아부었어요. 중공군은 낮엔 참호 속에 숨어 있다가 밤만 되면 대포를 쏘며 저항했어요. 마치 화려한 불꽃놀이를 하듯 엄청난 화력이 백마고지에 집중되곤 했어요. 손목시계가 없어 시간이 어찌 흘러가는지도 몰랐어요. 진격 명령이 나면 앞으로 돌진했고, 후퇴 명령이 떨어지면 뒤로 돌아 뛰었어요.”
▶백마고지 전투 기념관에 보관 중인 철모
66년의 세월이 흘러 5월 31일, 백마고지 격전의 현장에 와보니 역곡천 위 다리가 기억났다. “당시에는 저 다리 이름이 충성교였어요. 백마고지에서 정신없이 뛰어 내려와 저 다리 밑에서 몸을 숨겼던 기억이 나네요. 마침 다리 근처에 있던 민가로 다가가니 한 아주머니가 주먹밥을 주더군요. 오랜 배고픔을 달래줄 주먹밥이었는데, 그만 쉬었어요. 못 먹고 아쉬워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그 다리가 백마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역곡천은 W자로 북한과 남한을 두 번씩 넘나들며 흐른다.
“전쟁 이후 처음 백마고지를 직접 와보니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슬퍼. 아주 슬퍼. 아직도 저 고지에는 수많은 전사자들이 땅속에 묻혀 있어.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지. 다들 집에서는 귀한 자식인데…. 지금이라도 유해를 발굴해서 가족들 품에 돌려줘야 하는데….”
1980년대 초반 백마고지전투참전전우회가 만들어졌을 때 전국에서 700~800명의 옛 전우가 모였다. 이제는 수십 명에 그친다. 다들 먼저 갔다.
제대 후 결혼해서 남매를 낳고 건설회사 등에 다니던 이 씨는 철책선을 두 손으로 꼭 잡는다. 정말 산천은 의구하다.
▶철원지역의 초등학생들도 분단의 비극을 느끼기 위해 행사에 참여했다.
“어머니 심정도 모르고… 지금도 미안”
김영민(87) 어르신도 백마고지전투참전전우회 부회장이다. 18세에 입대했으니 거의 막내였다. 서울 경기공고 재학 중에 학도병으로 징집됐다. 소총수로 보직을 받고 서부전선 전투에 투입됐다. 1사단 15연대에 배속됐다가 심한 동상으로 후방 군병원에서 7개월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 대구 보충대를 거쳐 28연대에 배속됐다. 어느 날, 전라도로 피란 간 어머니가 며칠을 걸어서 부대에 면회를 오셨다. “어머니는 나를 보시자마자 온몸을 더듬으며 부상당한 곳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시더군. 어린 아들이 전선에 갔으니 얼마나 걱정이 많으셨을까? 당시 나는 어려서 어머니의 심정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어. 지금도 미안해.”
서부전선의 금촌에서 소총수로 전투를 몇 차례 치른 뒤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됐다. 백마고지 전투 당시 그는 보급병이었다. “직접 중공군과 마주보고 총을 쏘지는 않았어. 후방에서 보급품을 전달해주고, 진지 공사를 할 때는 소나무를 베어서 공급했지.”
▶화살머리 고지의 경비병
5년을 근무하고 일등중사로 제대한 뒤 홍익대 법과에 진학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큰 과자공장을 물려받았다. ‘강백회’ 회장을 오랫동안 맡고 있다. 강백회는 강원도 출신의 백마고지 참전용사 모임이다.
“처음엔 강백회 회원이 50여 명이었어. 이제는 모두 모여도 7~8명이야. 다들 먼저 갔어.”
어린 학도병은 군 복무 때 대표 축구선수였다고 한다. “공을 잘 찼어. 전투가 멈추고 휴식하는 동안 공을 차곤 했어. 제대 후에도 오랫동안 축구를 좋아했지. 이제는 무릎관절이 아파서 축구는 못해.”
세 명의 옛 전우는 백마고지가 보이는 화살머리고지에서 산하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적막감이 흐른다. 화살머리고지는 9·19남북군사합의에 따라 현재 유해 발굴 작업이 이뤄지는 지역이다.
철원/글·사진 이길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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