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이 동학혁명 직전까지 살았던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의 전봉준 고택
“목숨이 아깝다면 지금이라도 이 방을 나가도 좋소.” 침묵이 흘렀다. 침 삼키는 소리만 들린다. “두렵지 않소. 무슨 결정이 나든 따르겠소.” 결연한 목소리다. “나는 끝까지 녹두장군과 함께하겠소.” “나도요.” “나도요.” 좁은 방에 모여 앉은 20명의 사나이들은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목숨까지 건 결의에 모두 참여하겠다고 맹세했다. 반역이다. 역적의 길이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가족과 나라를 구하겠다는 불같은 의지가 활활 타고 있었다.
전봉준은 “그럼 동지들의 뜻이 모여졌으니 백성들에게 우리의 뜻을 알립시다. 누가 밖에 나가서 사발 하나 가져오시오.” “이 밤중에 사발은 왜?” “다 뜻이 있습니다.” 전봉준은 빈 사발을 흰 종이 위에 엎고 동그랗게 원을 그렸다. “이 원 밖으로 각자의 이름을 삥 돌려 적습니다. 그럼 우리의 계획이 미리 발각 나더라도 주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용의주도하다. 전봉준은 격문을 흰 종이 한쪽에 쓰기 시작했다.
“매일 난망(亂亡)을 부르던 민중은 곳곳에 모여서 말하되, 난리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됐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하며 기일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이때 도인들은 선후책을 토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 집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모여서 일의 순서를 결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Ⅰ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Ⅱ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Ⅲ 군수에게 아첨하며 인민을 수탈한 탐관오리를 징계할 것.
Ⅳ 전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진격할 것.
▶정읍시 만석보 근처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 상징 조형물
동학혁명 올해 법정기념일로 지정
전봉준의 격문이 완성되자 서명이 이어졌다. 마침내 탐관오리 조병갑을 처단하고 고부 군민의 원한을 풀어주면서 나라를 뒤집는 일에 뜻을 모은 것이다. 이는 곧 동학혁명의 시작이었다. 시대를 바꾸는 혁명의 기운이 세차게 불기 시작한 것이다.
▶동학 접주였던 전봉준이 동학교도, 농민들과 처음 혁명 거사를 위해 사발통문을 작성했던 장소. 사발통문은 주모자를 알아볼 수 없게 둥글게 서명한다.
지금부터 126년 전인 1893년 11월 어느 날 한밤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갔다.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의 송두호 집 안방. 덩치는 작지만 눈빛이 무서운 전봉준을 중심으로 20명이 무거운 분위기에서 사발통문에 서명하는 순간이다. 살짝 전봉준에게 질문했다. “목숨을 걸고 처단할 만큼 못된 관리입니까?” “아니, 어디에 사시는 뉘시길래 그 악행을 모른단 말입니까? 나 원 참.”
고부는 기름지고 넓은 평야에 해안을 끼고 있어 농수산물이 풍부했다.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부임하면서 원래 농민이 쌓았던 제방을 허물고 새로운 제방을 쌓는다며 품삯 한 푼 주지 않고 강제로 일을 시켰다. 만석보다. 그 보를 쌓는다며 농민들에게 700가마의 수세를 거뒀다. 태안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며 1000냥의 돈을 뜯었고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는 2000냥의 조의금을 강제로 거뒀다. 형제끼리 싸움했다고 벌금을 내게 했고, 이웃하고 사이가 안 좋다고 벌금을 매겼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조병갑의 학정에 항의하다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었다. 동학 접주였던 아들 전봉준의 인간적인 원한도 깊었다. 그러나 이 사발통문은 조병갑이 11월 말 익산군수로 발령나며 실현되지 못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벽의 부조
다시 지금으로 돌아왔다. 6월 19일 오전 11시 사발통문이 작성된 마을 입구에는 ‘동학혁명모의탑’이 서 있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처음으로 법정기념일이 됐다. 동학농민혁명 흔적을 찾아 나선 길에 이우원(69)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장이 동행했다. 그는 연세대 신학대를 졸업하고 사업을 하다 40대에 천도교 선도사가 됐다. “동학혁명의 구체적인 시작점과 목표를 알 수 있는 문서입니다. 동학혁명이 처음부터 계획적인 혁명운동이고, 썩은 조선의 전복을 목표로 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문서입니다.”
▶탐관오리 조병갑을 처형하고 한양으로 진격하자는 혁명의 의지를 담은 사발통문. 여기에 서명한 20명 가운데 10명은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 땅의 오늘을 만든 저항 정신의 뿌리”
이 사발통문은 1968년 12월 송두호의 후손인 송준섭의 마루 밑에 70여 년 동안 묻혀 있던 족보에서 발견됐다. 서명한 20명 중에는 전봉준과 같은 30대가 13명, 40대가 3명, 10대가 2명, 50대와 60대가 각각 1명씩이다. 이 가운데 10명은 다음 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동학혁명에서 관군에 붙잡혀 참수나 교수형을 당했다. 나머지는 대부분 천도교 지도자로 살아갔다. 사발통문이 작성된 집 입구에는 ‘동학농민혁명모의장소, 사발통문 작성의 집’이라고 크게 쓰여 있다.
▶사발통문이 작성된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 마을 입구의 동학혁명모의탑
근처에 있는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으로 발길을 옮겼다. 1994년 9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무명의 동학 농민군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위령탑이다. 사발통문을 작성했던 주산마을 녹두회관 앞에 있다. 목숨을 잃은 동료를 안고 절규하는, 죽창을 든 농민군을 형상화한 높이 5m의 주탑, 농민군의 얼굴과 죽창들이 부조로 새겨진 23개의 보조탑으로 이뤄졌다.
“죽창을 들고 신식 무기에 대항하면서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수만 명의 무명 농민들과 동학교도들이 이 땅의 오늘을 만든 저항 정신을 뿌렸어요. 신분과 성별, 나이를 뛰어넘어 인간은 평등하다는 놀라운 인간 사랑의 정신이 그런 용기를 가능케 한 거죠.”
▶이우원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장이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을 설명하고 있다.
다음 목적지는 조병갑 군수의 학정 현장인 고부관아. 지금은 고부초등학교로 변해 있었다. 당시 아주 큰 관아였음이 운동장 크기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여러 개의 동헌과 객사는 다 사라지고 한쪽의 향교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말살정책으로 다 헐렸다고 한다.
사발통문이 작성된 두 달 뒤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다시 부임하며 혁명의 불길은 활활 타올랐다. 1894년 1월 10일 봉기가 시작됐고, 다음 날 새벽에 고부관아가 접수됐다. 조병갑은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달아났다. 운동장 한가운데 서니 횃불을 들고 관아로 뛰어든 그날 농민들의 함성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고개를 돌리니 살겠다고 도망가는 조병갑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근처에 있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
봉기 불 댕긴 말목장터엔 안내판
이번에 전봉준의 고택을 찾았다.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 있는 이 집은 1878년 지어져 동학혁명 당시 전봉준이 살던 집이다. 원래 있던 방 1칸, 부엌 1칸, 광 1칸의 소박한 집을 번듯하게 복원했다. 집 주위에 흙담을 두르고 한옆으로는 집터만 한 마당까지 내어 잔디를 심어놓았다. 1855년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에서 태어난 전봉준은 양반 계층에 속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몰락해 몹시 가난했다. 생계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타지로 떠돌며 살았고, 동학혁명 직전까지 조소마을에 살며 동학의 고부 접주로 있었다. 고택에는 방 한쪽에 전봉준의 사진만 달랑 걸려 있다. 한눈에 봐도 성의 없이 복원했다는 느낌이다. 흔한 고택 소개 책자 하나 없다.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 상징조형물
아쉬움을 품은 채 말목장터로 향했다. 부안, 태인, 정읍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있는 장터로, 고부 봉기의 불이 시작된 곳이다.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날아가보자. 1893년 1월 10일 밤 미리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 말목장터로 모여들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농민들의 손에는 쇠스랑, 낫, 괭이, 죽창이 들려 있다. 흰 수염이 난 노인과 흰 수건을 머리에 둘러쓴 아주머니도 있다. 전봉준이 나타났다.
전봉준이 당당하게 선 채 “여러분” 하고 외치자 모두 조용해졌다. 덩치가 작아 어릴 때부터 ‘녹두’라는 별명을 듣고 자란 전봉준이었다. 5척(150㎝)의 키다. “우리는 탐관오리의 행패 앞에 당하기만 했습니다.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동이 트기 전에 고부관아로 쳐들어가 우리 세상을 만들어봅시다. 여러분.”
우렁찬 전봉준의 연설에 농민들은 함성으로 화답했다. 혁명군들은 고부관아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20여 리 떨어진 관아까지 가면서 수천 명으로 늘었다. 1월 11일 새벽 조병갑은 농민들이 밀려온다는 말에 변장을 한 채 도망갔고, 그 밑의 관리들도 누구 하나 맞서지 못했다. 고부관아가 혁명군들의 손에 넘어왔다. 전봉준은 무기고를 부수고 화승총을 확보했다. 감옥을 열어 억울한 이들을 풀어주었고, 관아의 곡식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조병갑이 갖고 있던 토지 문서와 노비 문서도 불태웠다. 농민들은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만석보 근처 제방에서 이우원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장(왼쪽)과 박대길 부안군 문화관광과 전문위원이 동학혁명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혁명의 성공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삼거리에는 안내판이 있고 차량들이 바삐 교차한다. 만석보는 이제 흔적만 있다. 너른 평야에 강물이 흐른다. 당시 농민들이 만석보를 허무는 장면을 상상하며 백산으로 향했다. 당시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는 노래가 널리 퍼졌다. 동학혁명군이 훈련하다 자리에 앉으면 죽창이 산처럼 솟아나고, 일어서면 혁명군의 흰옷이 온 산을 뒤덮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조병갑 군수가 폭정을 휘둘렀던 고부관아는 현재 향교만 남았고, 초등학교로 변했다.
고부관아를 접수한 혁명군은 백산으로 주둔지를 옮긴다. 백산은 해발 47m로, 나지막하나 사방이 들판으로 둘러싸여 있어 이곳에 올라서서 보면 주변의 수십 리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는 동학혁명 백산창의비가 있고 사방이 훤히 보이는 정자가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안에 전시된 전봉준 취조 장면
“방탄소년단 노래에 동학사상 담겨”
정자에서 이 관장은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방탄소년단(BTS)의 노래에 동학의 놀라운 사상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방탄소년단 노래 가운데 하나인 ‘에피파니’의 가사다. “…빛나는 나를 소중한 내 영혼을 이제야 깨달아 so I love me/ 좀 부족해도 너무 아름다운 걸/ 조금은 뭉툭하고 부족할지 몰라/ 수줍은 광채 따윈 안 보일지 몰라/ 하지만 이대로의 내가 곧 나인 걸/ 지금껏 살아온 내 팔과 다리 심장 영혼을/ 사랑하고 싶어”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이 있는 주산마을 녹두회관 2층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소개문
방탄소년단의 팬덤인 ‘아미’임을 자처하는 이 관장은 “내가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고 사랑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동학사상이 방탄소년단의 가사에 스며들어 전 세계 젊은이들을 감동시키고 있다”고 단언한다. 에피파니(epiphany)는 그리스어로 ‘귀한 것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글·사진 이길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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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