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9일 용마폭포공원 스포츠클라이밍경기장에서 열린 남자 주니어 난이도 경기 예선에서 엄성민(원광대 산악부) 선수가 혼신을 다해 홀드에 손을 뻗고 있다.
앳된 얼굴의 선수 한 명이 암벽을 오르다가 떨어졌다. 객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일제히 염려와 안타까움을 담은 “악” 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두꺼운 매트가 깔려 있기 때문에 다칠 일은 없었다. 툴툴 털고 일어난 선수는 상기된 표정으로 방금 매달렸던 인공암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바둑의 묘수풀이를 하는 모양새다.
이곳은 제10회 고미영컵 전국 청소년 스포츠클라이밍대회가 열리고 있는 서울 중랑구 용마폭포공원 스포츠클라이밍경기장이다. 6월 29일과 30일 양일간 진행된 이 대회는 2019년 세계유스선수권대회 청소년 국가대표 선발전을 겸해 열렸다. 난이도, 속도, 볼더링 등 세 종목의 경기가 펼쳐졌다. 이 대회는 2009년 낭가파르바트 등정 후 하산 도중 불의의 사고로 숨진 산악인 고 고미영 씨의 도전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여자유스B 난이도에서 우승을 차지한 정지민(온양신정중) 선수가 180도에 가까운 인공암벽에 매달려 경기를 하고 있다.
볼더링 종목은 4~5m 높이의 루트를 등반하는 것으로 바닥에 충격을 흡수하는 매트리스를 깔고 로프 없이 오르는 경기다. 볼더링에서는 문제풀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루트마다 출발 지점부터 완등 지점까지 오르기 위한 홀드의 모양, 크기, 순서, 간격이 다르고 대회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문제와 마주친 선수들은 출제된 문제를 풀기에 앞서 머릿속으로 설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여자유스A 볼더링에 출전한 피예나(한광고) 선수가 손가락 끝으로 홀드를 잡고 공중에서 회전하듯 다음 홀드로 뛰고 있다.
국가대표 선발전 겸한 고미영컵 대회
이번 대회의 루트세터장인 이창현(47) 씨는 대회를 지켜보면서 “대한산악연맹 주최 대회는 루트세터 자격증이 있어야 대회 루트를 설계할 수 있다. 순위 경쟁 종목이니 골고루 순위가 나오도록 한다. 한 곳에서 많이 떨어지면 곤란하다. 관중이 있는 경기니 긴장감과 동시에 보는 재미도 줘야 하는 것이 핵심이다. 떨어질 듯하면서 올라가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먼저 경기를 마친 선수들과 가족들이 탄성과 아쉬움의 함성을 지르면서 경기중인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볼더링이 열리는 동안 경기장 정면의 오른편 암장에선 속도 종목이 열렸다. 15m 높이, 경사각 95도의 암장을 평지처럼 기어 올라가는데 남자 유스A부의 전하람(포항 세화고) 선수가 6.250초의 기록으로 1위를 차지했다. 이 종목의 세계기록은 남자가 5.48초이며 여자는 7.101초다. 무협 영화에서 무공이 높은 고수들이 담장을 훌쩍 타고 오르는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가장 넓은 벽에서는 난이도 (리드) 종목이 열렸다. 높이 15m 이상, 경사각 90~180도의 벽에 설치된 퀵드로에 로프를 걸면서 올라가는 경기로, 정해진 시간 안에 오른 높이로 순위를 매긴다. 90도가 수직 벽이니 90도를 넘어가면 누워서 매달리는 자세가 나오기 때문에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끝까지 오르는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대부분 도중에 허공으로 떨어졌다.
▶여자유스B 볼더링에 출전한 정예진(용두중) 선수가 완등지점까지 도착하여 성공한 다음 뛰어내리기에 앞서 미소를 짓고 있다.│정세환 작가
이번 대회의 청중들은 출전 선수들의 가족과 지인, 그리고 이미 경기를 마친 다른 선수들이다. 인공암벽에 매달린 선수들이 고비를 만나 주춤하면 일제히 “가자, 가자, 가자”를 외쳤고 중간에 떨어지면 빼놓지 않고 “괜찮아. 잘했어”를 연호했다. 다른 종목보다 유난히 선수 간의 연대 의식이 강한 것 같았다. 국내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스포츠클라이밍 대회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산악 전문 사진가 강레아 작가는 “클라이밍 선수들이 자기 경기가 끝나면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선수를 응원해주는 이유는 아마도 이 운동이 상대와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인 거 같다. 이 운동은 공포를 느낄 때 분비되는 호르몬과 어떤 것을 성취했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이 계속 교차해서 나오므로 중독성이 상당히 강한 편이다. 생활체육이든 엘리트급이든 그들은 절제된 삶을 살고 어떻게 보면 거의 구도자와 비슷하다. 그들을 오랫동안 찍어온 나는 그들이 마치 니체가 말하는 아이와도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추락이라는 위험의 순간을 벗어나 어떤 목표를 향해 온몸과 정신을 한곳에 몰입하는 클라이머들이야말로 자유인이라 생각한다”라고 귀띔했다.
▶여자유스B 볼더링에 출전한 윤다솜(백석중) 선수가 등반에 앞서 문제를 어떻게 풀지 계산하고 있다.│노창길 작가
단숨에 제2 김자인으로 떠오른 유망주
대회가 끝난 뒤 몇몇 선수를 만났다. 여자 유스B(2004년 1월 1일~2005년 12월 31일 출생) 난이도 종목에서 1위를 한 정지민(온양 신정중 3) 선수도 다른 선수들처럼 어릴 때부터 유난히 어딘가에 매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공원에 있는 인공암벽을 올라봤는데 어른도 못 가는 코스를 올라가는 것을 보고 관리인이 “이거 제대로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해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정 선수는 “처음 시작했던 어렸을 무렵에 떨어져서 한 번 울고 난 다음부터는 전혀 무섭지 않아요. 좋은 점이 너무 많아요. 힘이 세지고 재미있고 성취감도 느끼고 친구도 많이 생겼어요. 이 운동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인성이 좋아 서로 돈독해지고 격려해줍니다. 한국 선수 중에선 자인 언니를 존경하고 외국 선수로는 얀냐(슬로베니아)를 좋아해요”라고 말했다. 곁에 있던 어머니 임정남 씨는 “본인이 워낙 좋아하니까 밀어주고 있다. 다른 것은 모르겠고 사춘기는 순조롭게 넘긴 것 같다”라고 말했다. 사실 정지민 선수는 2018년 6월 서울 반포한강공원에서 열렸던 스파이더 한강클라이밍 챔피언십대회에서 김자인, 사솔, 서채현 등 한국의 강자들과 카티아 카챠, 안드레 차레테 등 세계적 선수들이 모두 참가한 여자 엘리트부 종목의 우승자다. 토너먼트 방식이라 정지민 선수가 직접 김자인과 맞붙지는 않았지만 결승에서 슬로베니아의 카디치를 간발의 차이로 제치고 당당히 우승해 단숨에 제2의 김자인으로 떠오른 유망주다. 내년부터는 일반부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 때문에 눈여겨봐야 할 선수 중의 한 명이다.
▶여자유스D 난이도에 출전한 김윤주(충무초) 선수가 완등 직전 홀드에서 떨어지면서 안타까워하고 있다. 김 선수는 이 종목 결승에서 42+까지 올라 2위를 차지했다.
남자 주니어부 난이도 종목에서 2위를 한 이강륜(일산국제컨벤션고 1) 선수는 늦게 클라이밍을 시작했다. 이 선수의 어머니가 다이어트 삼아 3년 정도 클라이밍을 배웠다. 이 선수가 중학교 1학년 무렵 그동안 해오던 태권도나 수영을 그만두고 휴대폰 게임에만 몰두하는 것을 본 어머니가 “남자가 운동 하나는 해야지”라면서 클라이밍 센터에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이 선수는 “안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한 달 치 돈을 내고) 이미 등록을 했다고 했어요. 아깝잖아요? 그래서 다니기 시작했지요. 한 달이 지났는데 센터 선생님께서 진지하게 운동선수 하면 좋겠다고 권유하셨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사실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에 계속하는 거예요.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친구도 많이 생겼어요. 이제는 자신감이 듭니다”라고 말했다.
글·사진 곽윤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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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