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표지
아들이 독서 학원에서 가져온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표지를 보았다. “아니, 이건 표지가 스포일러잖아?” 이 소설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결말 부분에서 읽을 때 그 반전의 묘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미 그걸 암시하는 내용을 표지에 담다니!
왠지 전에 본 이 책의 표지나 영화 포스터도 비슷했던 거 같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해외 책들도 대부분 콘셉트가 비슷했다. <마징가 Z>의 악당 캐릭터 아수라 백작처럼 반쪽 얼굴은 지킬, 반쪽 얼굴은 하이드로 묘사하는 것이다.
책 표지든 영화 포스터든 이런 방식이 대부분이어서 이것이 이 책을 표현하는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이 된 것이다. “그럼 스포일러는 어떻게 할 건데?”라고 묻는다면, 이제 이 책이 너무 유명해서 지킬이 하이드라는 건 상식이 돼버렸다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 연극 포스터(1887년)
이 책이 출판된 해는 1886년이다. 다음 해에 연극 무대로 올려졌다. 그 연극의 포스터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19세기에 나온 포스터치곤 꽤 어려운 기술을 부렸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합성해 지킬의 몸에 유령 같은 하이드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역시 스포일러다. 그때는 ‘스포일러’라는 개념이 없어서 그랬을까?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니 ‘스포일러’라는 단어가 영화 용어로 인쇄 미디어에서 처음 사용된 건 1971년이다. 덕 케니라는 코미디 작가가 ‘스포일러’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영화들을 위한 스포일러 리스트를 작성했다고 한다. 스포일러가 본격적으로 쓰인 건 인터넷 시대가 도래한 1990년대 중반이다. 인터넷 시대가 열려 대중이 좀 더 손쉽게 영화 평론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영화 평론가들은 글에 ‘스포일러 경고(spoiler warnings)’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솔 바스가 디자인한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 포스터(1955년)
1971년 코미디 작가 케니가 첫 사용
엄밀한 의미에서 스포일러는 반전이 있는 영화의 그 반전을 미리 알려줘 영화 보는 재미를 망치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인 영화로 1995년에 개봉된 <유주얼 서스펙트>가 있다. 이 영화는 가장 범인 같지 않은 사람이 결말 부분에서 범인으로 밝혀질 때 관객들이 충격을 받는 영화다. 그러니 범인을 미리 알아버리면 영화가 영 재미가 없다. 반전의 충격이 영화의 핵심 흥행 요소일 때 스포일러는 그야말로 독이다.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1960년작 <사이코> 역시 사이코가 누구인가라는 것이 영화의 극적인 반전 요소다. 히치콕은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이 그것을 흘리지 않게 극도로 경계했다. “만약 당신이 비밀을 지킬 수 없다면, 제발 <사이코>를 본 뒤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 이 말은 이 영화 마케팅의 핵심 문구였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제작사 마블은 #DontSpoilTheEndgame을 전파하고 있다.
하지만 반전이 영화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해도 영화의 내용 일부를 아는 것 역시 영화를 볼 때 흥미가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과거의 영화들은 오히려 그런 요소를 포스터를 통해 흘림으로써 관객의 호기심을 자아내려고 했다.
▶<로즈메리 베이비> 포스터(1968년)
1950년대까지 영화사들은 영화의 특정 장면 여러 컷을 콜라주하는 방식으로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이런 방식에서 탈피해 혁신을 일으킨 사람이 영상 디자인의 개척자인 솔 바스다.
그는 영화의 특정 장면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영화의 내용 일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내용을 함축해서 은유적으로 표현해야 관객의 흥미를 끌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955년작인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의 포스터를 보자. 이 영화는 도박사이자 마약중독자인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도박사로서 빠른 손놀림을 자랑하는 팔, 하지만 마약중독으로 주사를 맞는 그 팔을 일그러진 모습으로 표현했다. 이런 접근 방식이 할리우드 영화 포스터로 곧바로 퍼지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수준이 높은 예술적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0년대가 되자 할리우드 영화에서 이런 흐름을 따르는 포스터가 심심치 않게 나타났다. 그것은 영화의 스틸 이미지를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포스터용으로 별도의 사진을 찍어서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여러 영화 장면으로 구성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포스터(1961년)
1968년작 <로즈메리 베이비>를 보면, 음산한 분위기로 추측과 연상을 유도하고 있다. 이런 간접적 표현으로 영화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주연배우의 모습이 나오더라도 그것은 영화 속 장면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 영화 속 장면이더라도 영화에 대한 약간의 단서만 줄 뿐이다.
한국 영화 포스터 역시 과거에는 영화 장면들을 콜라주하는 방식을 아주 오랫동안 써왔다. 스포일러에 대한 개념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1994년작 <게임의 법칙>이다. 이 포스터는 영화의 결정적 장면이랄 수 있는, 주인공이 전화 부스에서 총에 맞아 죽는 스틸 이미지를 사용했다.
오늘날처럼 스포일러가 보편화된 시대였다면 걸러졌을 디자인이다. 최근 한국 영화 포스터는 한결같은데 주인공들, 다시 말해 영화의 흥행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인 스타들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다. 스포일러는 전혀 없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포스터에서는 영화에 대한 호기심도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스타가 나오지 않는 저예산 독립영화에서 함축이나 은유의 방식을 쓴다.
▶<게임의 법칙> 포스터(1995년)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정보 홍수
이런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사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다. 포스터는 더 이상 영화 홍보의 주요한 매체가 아니다. 무엇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편화로 영상 이미지, 네티즌들이 퍼 나르는 SNS 포스팅이 주요 홍보 수단이 되었다. 정보의 과잉으로 이미 스포일러가 넘쳐흐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TV의 영화 프로그램, 또는 유튜브의 영화 해설해주는 영상을 보면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알려준다. 영화 스틸 이미지 몇 개, 포스터 외에는 그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전혀 찾아볼 수 없던 시절, 스틸 이미지와 포스터는 영화에 대한 기대감은 물론 그 영화를 신비롭게 해주었다.
포스터에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더라도 오늘날처럼 과잉 이미지, 과잉 정보의 시대보다 아직 보지 못한 영화에 대한 갈망은 더욱 치열했던 것이다.
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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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