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석(명지대 건축학부교수) 국가건축정책위원이 5월 2일 경기도 용인시 명지대 자연 캠퍼스에서 <위클리 공감>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박유리 기자
박인석 국가건축정책위원 인터뷰
4월 15일 경제 기반 SOC(사회간접자본)에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SOC로 ‘생활SOC 3개년 계획’을 발표한 정부는 2022년까지 국비 30조 원, 지방비 18조 원 등 총 48조 원을 투자해 체육관, 도서관, 보육시설 같은 생활밀착형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기로 했다. 기존의 사회간접자본이 도로·철도 등 경제 기반 시설을 의미한다면, 생활SOC는 삶의 질을 높여주는 시설과 일상생활의 기본 전제가 되는 안전시설을 말한다. 정부는 생활SOC 3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공공건축물의 디자인 향상을 위해 총괄 건축가·공공 건축가를 두고, 설계 공모 대상 또한 2억 원에서 1억 원 이상으로 확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생활SOC 정책이 실제 삶에 뿌리내리려면 공공건축은 동네 안으로 어떻게 스며들어야 할까. 박인석(명지대 건축학부 교수) 국가건축정책위원을 경기도 용인시 남동에 자리한 명지대 자연캠퍼스에서 5월 2일 만났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로에 자리한 휘경 스마일 어린이집
공공건축물 설계 방식 달라져야
-생활SOC 정책이 실제 삶의 질을 높이려면 공공건축물 설계 방식도 달라져야 할 것 같다. 가격 입찰 중심으로 이뤄지던 기존의 공공건축물 설계 방식에서, 디자인 중심의 설계 공모 대상을 확대키로 했다. 이를 통해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개성 또한 향상될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시설을 보완해준다는 점에서 생활SOC는 굉장히 좋은 정책이다. 아파트 단지와 아파트 없는 동네의 격차가 점차 양극화돼가고 있다. 아파트 단지는 고급화하는 데 반해 동네에서는 놀이터를 찾기 어렵고 골목은 차들로 꽉 차서 주차장을 방불케 하며 공공건축물은 대부분 남루하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건축물의 양만 늘려서는 안 된다. 왜 똑같은 공공건축물만 늘어나는지, 이 중심을 들여다보면 공공건축물을 설계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보인다. 어떻게 설계하냐면, 95%가 가격 입찰 방식이다. 마치 복사지 사듯 말이다. 제일 싸게 하겠다는 사람한테 주면 결국 싸구려 설계로 공공건축물이 지어진다. 가뜩이나 동네가 근린생활시설, 다가구주택,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간판으로 꽉 차 있는데 공공건축이 더 망치는 꼴이다. 가격 입찰보다 못한 방식은 농산어촌 개발이나 도시재생, 어촌 뉴딜 같은 지역 사업에 포함된 건축물이 설계되는 방식이다. 도로·방파제 등 토목 시설물과 마을회관·도서관 등 건축물을 포함한 모든 설계를 ‘기본계획 및 실시설계 용역’으로 한데 묶어 가격 입찰에 부친다. 용역을 수주한 엔지니어링 업체는 이 중 건축물 설계를 하청업체에 준다.
-경북 영주, 서울은 공공건축물의 중요성을 깨닫고 가격 입찰 중심에서 선회한 도시다.
=우리나라도 일부 도시에서는 신중하게 입찰해 보석 같은 공공건축물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한 번 설계 잘한다고 도시가 확 좋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점진적으로 좋아질 수 있다. 작고 후진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데 비용이 엄청나게 드는 것도 아니다. 서울시의 경우 공공건축물 설계를 공공 건축가 100여 명 가운데 선정해서 맡기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영주시는 인구 12만 명에 불과한데 공공 건축가가 5, 6명 정도 있다. 영주에서 서울의 공공 건축가를 불러서 작업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가 옛날의 한국이 아니다.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증가한 만큼 공공건축의 질 또한 달라져야 한다. 한국에는 이미 세계 어디 내놔도 남부럽지 않은 설계자가 굉장히 많다. 이 사회가 그 사람들의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 사람들도 일이 없고 공공건축물 설계는 엉뚱하게 싸구려 설계로 이뤄지고 있는 거다.
▶서울 종로구 화동에 자리한 북촌마을안내소 및 편의시설. 돌계단 길을 따라 올라서면 서울교육박물관을 만나게 된다. 서울교육박물관 뒤편에는 정독도서관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북촌마을안내소가 정독도서관과 서울교육박물관을 외부와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국내서도 보석 같은 공공건축물 설계 시작
-건축가로서 똑같이 생긴 공공건축물을 바라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시민 개개인이 사회와 공공 환경에 갖는 존중감, 친근함 같은 것이 중요하지 않나. 공공건축물을 보고 ‘정부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와 같은 느낌이 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민의식이 우리 사회의 미래와 직결돼 있다. 삼성, 방탄소년단처럼 시장에서의 성공에 대해 사람들은 존중감을 가진다. 매일매일 생활 속에 들어오는 공공적인 이벤트들, 그 가운데 가장 가까운 게 공공건축물인데 보석같이 설계됐으면 좋겠다. 어떤 기업의 반도체가 잘돼서 성공하는 것은 먼 일이지만, 우리 아이가 들어갈 어린이집이 멋지게 지어지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우리 아이가 어린이집에 만족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공공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진다. 나는 정말 남루한 것들을 보면 범죄행위라는 생각마저 든다. 국민 세금으로 유지하는 이 사회를 존중하지 않고 깔보게 하는 나쁜 짓이다.
-좋은 건축물은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사람들 간의 소통에 이르게 하지 않을까. 우리는 건축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공공건축물은 아직 건설의 시대에 머무는 것 같다.
=건축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우리는 아직 잘 모른다. 아직도 공공건축물은 ‘건설의 시대’에 있다고 본다. 파출소(지구대) 건물이 있으면 되는 것이고, 어린이집 수가 모자라서 그렇지 설계가 나쁘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왜냐? 좋은 것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사적 영역에서는 기호의 감각이라는 게 톱클래스 수준에 와 있다. 한국에서 사적 영역에서는 디자인, 설계를 엄청 따진다. 그런데 공공에서만 무감각하다.
최근 서울시에서 꿈담 교실(꿈을 담은 교실)을 만들었다. 설계자들이 몇 달 동안 선생님과 씨름해가며 완성한 설계다. 교육부가 서울시의 꿈담 교실을 보고 벤치마킹해서 전국에 하겠다고 나선다. 걱정이 뭐냐면, 좋은 설계자 찾는 노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거다. 만약 이 교실을 가격 입찰했다고 생각해봐라. 그럼 설계비 1500만 원을 받으면 딱 그만큼의 설계를 한다. 페인트, 도배지만 바뀔 뿐이다. 좋은 설계자가 많은 서울시니 가능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한다. 그럼 소도시 영주에서는 어떻게 공공건축물을 아름답게 짓겠나? 좋은 설계자를 찾아내 매칭해야 하는 섬세한 행정이 필요하다. 시간이 걸린다. 생활SOC 정책도 정부가 양적 성과를 내지 않으면 (국민들로부터) 비판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을 것이다. ‘뭐 한다더니 왜 감감무소식이냐?’ 이런 비판들. 그렇다면 ‘투 트랙’ 전략도 있지 않나. 한쪽에서는 좋은 설계를 계속 해나가고, 다른 쪽에서는 생활SOC 효과가 성과로 빠르게 나타나는 전략을 구사할 수도 있지 않나.
▶경북 영주시의 조제보건진료소는 노란 들판과 건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카페 같은 보건소의 ㄱ자 모양 지붕이 현대적인 건축미를 드러낸다. 내부는 주민들의 소통 공간 마련을 위해 온돌방으로 지어졌다.
삶의 질 높이는 공공건축물 꿈꿔
-2017년 공공건축물에 대한 책 <건축이 바꾼다>를 출간했다. 같은 모양의 버스 정류장, 가로등, 한결같은 어린이집의 남루함을 지적했다. 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 놀이터다. 책을 보면 천편일률적인 놀이터의 기원을 찾아가는데, 1979년 개정된 ‘주택건설 기준에 관한 규칙’에서 그네, 미끄럼틀, 철봉의 종류와 개수를 지정한 것을 지적했다. 이 규정이 1991년 폐지됐는데도 놀이터는 여전히 그대로다. 10년 넘게 지속된 규제와 놀이시설 안전인증법으로 인해 놀이 설치물 시장도 한정된 제품을 찍어내는 데 익숙해진 것으로 보인다.
=놀이터, 학교만큼 중요한 건물이 어디 있겠나? 심성을 키우는 공간인데 한국에서는 두 개가 가장 뒤처진 건축에 속한다. 기껏 하는 게 사각형으로 잘라놓고 놀이터 오종 복합 시설 같은 미끄럼틀, 철봉, 시소 놓고 풀 심고. 유럽 가면 놀이터도 다양하고 어린이 교육 학자들도 인공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환경이 더 좋다고 한다. 반면 어떤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이런 환경 속에서도 새로운 놀이터를 만들어낸다. 순천시에 있는 ‘기적의 놀이터’다. 공공건축상을 받은 놀이터에 갔더니 순천시 담당 공무원이 놀이터에 대해 설명하더라. 언덕에 잡초가 있어 어린이들이 구르며 놀고 터널, 미끄럼틀도 있고 죽은 나무도 있다고. ‘아니, 어떻게 이런 설계를 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놀이터는 일단 다 표준화돼 있지 않느냐고. 돈이 더 들지 않았느냐고도 물었다. 그랬더니 아니라더라. 시설물 사는 데 돈이 덜 들어서 훨씬 싸게 했다고 하더라. 기적의 놀이터 보면서 든 생각이 하려고 들면 할 수 있다는 거다. 놀이터 설계도 하청을 주기 때문에 늘 똑같은 게 나오는 거다. 좋은 설계를 하는 해결책은 간단하다. 설계 잘하는 사람들한테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그럼 기를 쓰고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영주, 서울 외에 다른 지자체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있나.
=서울시, 영주시는 예전부터 (공공기관이 건축과 관련한 정책을 만들고 시행, 관리하는 과정에서 전문적인 조언을 해주는) 총괄 건축가를 두고 있었다. 부산시, 광주시 등 7~8곳의 지자체도 이런 제도를 시작하고 있다. 지자체장이 의지만 있다면 할 수 있다. 다만 그걸 전담하는 행정조직이 있어야 한다. 또 공공건축물 설계를 가격 입찰이 아닌 공모로 진행하면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들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있는데, 공모 말고 다른 방식도 있다. 설계자의 질을 평가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가장 간단한 것은, 최근 설계 실적을 평가하는 것이다. 이 정도 평가에 돈이 엄청 많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영주시 청소년 문화 활동공간. 영주시의회 별관을 비보이 연습실로 개조했다. 이 공간의 문이 열리면 시의회 주차장은 객석이 되고, 비보이 연습실은 무대가 된다.│박인석
좋은 공공건축물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일본 구마모토현이 1988년 시작한 ‘구마모토 아트폴리스’는 후세에 남길 수 있는 역사적 건축물을 목표로 공공청사, 교량 등 대형 건축물부터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도시 건축물 하나하나에 우수한 디자인을 입혀 도시를 발전시킨 성공적 사례다. 구마모토 아트폴리스는 크든 작든, 모든 건축물 설계를 가격 입찰이 아닌 수의계약으로 진행했다. 한국에서는 수의계약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지만 일본에서 어떻게 이런 과정이 가능했을까. 박 교수는 이에 대해 “사회적 신뢰”라고 말했다. 좋은 설계자를 찾는 노력을 사회가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시민이 신뢰한다는 것. 좋은 공공건축물은 섬세한 행정과 이에 대한 사회적 지지와 신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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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