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보에서 결사대 활동하고 민중 속으로

2019.05.13 최신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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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9년 3·1운동은 일제 식민지하에서 전개된 최대 규모의 민족독립운동이다. 특히 3·1운동은 한국 여성사에서 한 획을 긋는 분수령이 되었다. 민중적이고 거족적인 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참여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강원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원 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0일 철원부터 시작해 김화, 화천, 횡성, 원주, 춘천 등으로 확대되었고, 4월 1일에는 강릉, 3일 통천·양구, 4일 이천·평창·양양, 7일 정선, 10일 울진, 15일 삼척·회양, 18일 간성, 21일 영월 등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강원 지역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2만 6713명에 달했고, 그중 학생은 2037명으로 8%를 차지했다. 기소된 인원을 살펴보면 9441명 가운데 여성이 587명, 유죄판결을 받았던 8471명 중 여성은 153명으로 비록 남성의 10분의 1 수준이지만 여성의 활동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물론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전국 여성의 참여율과 비교하면 강원 지역은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산지가 많고 대도시와 멀었던 지리적 환경과 유교적 성향이 강했던 지역 특성을 고려한다면 여성의 참여는 재해석될 수 있다. 더욱이 강원 양양 3·1만세운동의 불씨가 된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이는 여학생이었으니 더욱 의미가 깊다. 목숨을 걸고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여학생 조화벽, 그의 손에는 가죽 가방이 들려 있었다.

ㅣ▶조화벽의 가죽 가방│여성사전시관

개신교 집안서 태어나 개화사상 눈떠
조화벽(1895년 10월 17일∼1975년 9월 3일)은 양양감리교회 전도사였던 부친 조영순과 모친 전미흠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1910년 원산 성경학교를 졸업한 뒤 1912년 원산 루씨여학교를 거쳐 개성의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다. 개신교 집안에서 성장하며 개화사상에 일찍 깨어 있었던 조화벽은 가족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개성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3·1운동을 기점으로 조화벽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개성 3·1만세운동과 양양 3·1만세운동의 참여, 그리고 유관순 일가와의 인연은 평생을 독립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여성들도 남성과 함께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1년 8월 23일 ‘조선교육령’이 발표되면서 한국 역사 관련 교과목이 탄압당하고, 1915년 ‘기독교 학교의 개정 교육령에 의한 결의문’이 발표되며 일본총독부는 교육계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탄압 속에 3·1만세운동은 민족공동체를 자각한 민중의 저항이었다. 그 가운데 여성계의 참여는 공동체라는 유대 의식을 깨달은 행동이었다. 1919년 2월 28일 개성 지역에 독립선언서 200여 장이 전달되면서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은 비밀결사대를 조직한다.
호수돈여학교의 ‘호수돈 비밀결사대’는 충교예배당 전도부인인 어윤희와 호수돈 부속 남부소학교 교사인 권애라·장정심·조숙경이 주요 인물이었고 조화벽·이향화·권명범·이영지·류정희·김정숙 등 후배들이 합류하면서 결사대로 꾸려졌다. 2월 28일 북부예배당 목사 강조원이 오화영에게서 독립선언서 200여 장을 받았다. 그 시기에 서울에서 박희도의 밀영을 받은 이화 출신 안병숙이 개성 동정을 살피기 위해 도착했다. 당시 학생들은 권애라에게서 선언서가 개성에도 도착했고 보관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리고 어윤희와 논의한 뒤 만세 준비가 시작되었다.

ㅣ▶양양감리교회 1층. 조화벽의 기도실이 있던 곳이다.

가죽 가방 안 버선목 솜 사이에 감춰
호수돈 비밀결사대는 학교 구본관 4층의 기도실에 모여 준비와 절차를 의논하면서 각자 80명의 기숙생을 포섭하기로 약속했다. 그들은 4층의 커튼을 뜯어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어 준비했다. 3월 3일. 아침이 되자 학생들은 퇴학원서를 써놓고 만세운동에 뛰어들었다. 호수돈 비밀결사대의 총지휘자는 조숙경이었다. 세 대열을 이루어 행진하기로 사전 계획을 세웠고 중부는 이향화, 동부는 조숙경, 서부는 권명범이 앞장섰다. 조화벽을 포함한 다른 학생들은 대장의 암호 지시에 대기하고 있었다. 당일 아침에 기도회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세 대열을 이루면서 학생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거리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행진을 하던 중 한 학생이 시민들을 향해 민족자결주의를 외치며 연설을 하기 시작했고, 다른 학생들도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지켜보던 개성시민 1000여 명이 합세하면서 개성 만세운동의 불꽃이 일어났다. 일본 헌병은 총을 겨누고 위협하면서 학생들을 헌병대 마당으로 연행했지만 다행히 개성군수는 학생들을 훈계 후 석방했다.
전국적으로 3·1만세운동이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저지했다. 그러자 학생들 중 일부는 고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고향에 시국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조화벽도 고향 양양으로 향했다. 강원도는 외부와 소통이 원활한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향에 이 소식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일제의 검열과 감시가 삼엄한 가운데 조화벽은 가죽 가방에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고향으로 향했다. 개성에서 경원 열차를 타고 원산에 도착한 뒤, 다시 뱃길을 이용해 대포항에 도착했다. 조화벽이 대포항에 도착하자 경찰은 소지물을 전부 압수하고 관사로 끌고 갔다. 심문을 하기 시작했지만 가방의 버선목 솜 사이에 숨겨둔 독립선언서는 다행히 발견되지 않았고 조화벽은 풀려났다.

ㅣ▶양양 정명학원 2회 졸업식

정명학원 설립해 애국인재 양성
조화벽이 목숨을 걸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는 양양감리교회의 청년 지도자인 김필선과 김주호 등에게 전달되어 양양 만세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양양 3·1만세운동은 3·1운동을 계기로 보수적인 유교 세력과 기독교 세력, 중재 세력 모두가 통합되는 연합적인 만세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군수 및 일본의 감시로 발각되어 고전을 겪었지만 4월 4일 양양 장날, 개성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 이후 조화벽은 양구로 피신해 신분을 숨겼다. 누에고치를 하는 등 은신한 뒤 다시 학교로 복귀해서 호수돈여학교의 고등과를 마쳤다. 그리고 공주 영명여학교 교사로 부임하는데, 이때 공주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었던 유관순 집안과 인연을 맺는다. 어린 유관순의 동생을 돌보면서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인연이 되어 1925년 혼인을 했다. 이후 조화벽은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여성운동, 노동자 권익보호, 교육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그중에서도 올바른 국가 의식과 민족의식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애국 계몽활동에 투신한다. 공주 영명여학교, 서울 배화여학교, 개성 호수돈여학교, 원산 루씨여학교, 진성여학교, 그리고 양양 정명학원 등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독립 정신을 전파했다. 또한 급여의 일부를 떼어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자금으로 내놓았다.
조화벽은 민중 속으로 스며든 애국계몽 운동가였다. 원산항에서 생활이 어려웠던 선박 노동자들을 위해 조직한 ‘해원상구회’의 부회장을 맡아 원산항 승선원의 어려운 현실을 대변하는 데 앞장섰다. 이후 고향 양양으로 돌아온 조화벽은 1932년 정명학원을 설립해 애국 인재 양성에 힘썼다. 정명학원은 1935년 4월에 개원한 뒤 일제의 탄압으로 1944년 폐교할 때까지 6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가죽 가방의 소녀 조화벽’.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소녀는 애국계몽 운동가로 성장했고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헌신했다. 소녀가 이룬 기적, 그 순수한 애국심을 떠올려본다.

ㅣ심옥주_ 전 부산대 조교수이며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국회인성교육실천포럼 자문위원, 여성독립운동학교 대표다. 제15회 유관순상을 수상했으며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추진위원회 위원, 국가보훈처 사료수집 전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알리다> <윤희순 평전> <윤희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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