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4일 강원도 강릉시 오죽헌에서 만난 김문겸 씨│박유리 기자
6월 3~10일 열리는 강릉 단오제 홍보 영상은 전통 축제답지 않게 다소 파격적이다. 국내 무언극 가운데 최초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관노가면극의 시시딱딱이가 전통 탈을 쓰고 비보잉을 한다. 제례, 굿, 관노가면극 등이 어우러진 강릉 단오제에서 시시딱딱이의 역할은 공동체의 안녕과 화합을 이루는 일종의 신이다. 무서운 탈을 쓰고 있지만, 사람들에게 장난을 치거나 화해시키기도 하는 역할. 홍보 동영상에 출연하는 이는 강릉 단오제 관노가면극 이수자 김문겸(36) 씨다.
그가 22세에 어르신들만 있던 관노가면극보존회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다들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냐는 시선을 보냈다. 이제는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관노가면극을 가르치는 한편 천년의 축제 단오제를 이끄는 주역이 됐다. 그를 5월 24일 강원도 강릉시 오죽헌에서 만났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인 관노가면극은 강릉 단오제 때 행해지는 탈놀이로, 공동체의 태평을 기원하는 제의이자 축제다.
▶강릉시 일대를 한 바퀴 도는 영신행차 행렬│강릉단오제위원회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 지정
“관청의 노비들이 벌이는 연희인데, 다른 탈춤들과 다르게 5과장까지 이야기로 연결된 극 형식의 탈춤이에요. 1과장에서 장자마리라는 캐릭터가 나와 마당을 개시하고, 2과장은 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사랑 마당, 3과장은 둘 사이를 갈라놓는 시시딱딱이의 훼방 마당, 4과장은 소매각시의 자살 소동, 5과장은 서낭에게 각시를 소생시켜 달라고 빈 후 살아난다는 화해 마당으로 구성돼 있어요.”
시시딱딱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무언극과 관련 깊다. 두 명의 시시딱딱이가 칼을 서로 딱딱 부딪치면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별다른 대사 없이 “시시~” 바람 소리를 낸다. 그는 시시딱딱이나 양반 역할을 주로 맡는다. 처음부터 전통문화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과 학교 복도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데 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렀다. 혼이 나는 줄 알았는데 뜻밖의 추천을 받았다. 관노가면극 등 전통문화를 가르치는 특별활동반 선생님이 동아리 활동을 제안한 것. 17세의 나이에 친구들과 어울려 강릉 단오제 행사의 하나인 영신행차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주신을 제단에 모시는 풍습으로 농악대가 앞에서 신명을 올리면 수많은 시민이 등불을 든 채 뒤따르는 장관 행렬이 펼쳐진다. 2시간 30분 동안 강릉 시내를 도는데 당시 기온이 30℃를 넘어서 의상이 땀으로 젖을 만큼 더웠다.
▶마을의 잡귀를 쫓아내는 강릉 지탈굿│강릉단오제위원회
“악기를 치면서 행진을 하는데 세대 간에 거리감 없이 엉켜서 놀았던 즐거운 기억이 있어요. 그때 일본 등 각국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는데 그들과도 어울려서 놀았죠. 거기서 만난 일본 친구와는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요. 땀범벅이 될 만큼 더웠는데 항상 영신행차 마치면 폭죽을 터뜨리거든요. 하늘을 보는데 너무 예쁜 거예요. 그때 느꼈던 감정이 남아서 지금까지 단오제에 참여하는 것 같아요.”
무언극의 매력은 무엇일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비롯해 자신의 감정을 즉시 전달할 수 있는 시대에 말 대신 행동과 춤으로 보여주는 무대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무언극을 보는 관객은 같은 장면을 보고도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한 무대를 바라보지만 관객들은 저마다 다른, 자신만의 극장을 만나는 셈이다. 말이 없는 만큼 광대들은 몸짓 하나에도 혼을 싣는다. 관노가면극의 또 다른 백미는 즉흥성이다. 관객이 무대에 참여하거나 광대들이 그들을 무대로 불러들이기도 한다. 이야기는 그때마다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코미디 프로그램처럼 관객을 바보로 만드는 형식의 공연을 많이 해요. 극중에서 각시가 죽었을 때 우리 힘으로 안 되니까 관객을 데리고 와서 신께 빌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시시딱딱이가 각시와 양반 사이를 갈라놓을 때 관객을 끌어들여서 양반을 도와주라고 시키기도 하죠. 어떤 꼬마는 양반을 때리고 ‘나쁘다’고 말한 적도 있어요. 에피소드가 해마다 달라지죠. 어떤 분은 심지어 극에 들어와서 양반을 밀치고 각시랑 놀기도 했는데, 저희는 가만히 내버려둬요. 관객분들이 즐겨야 하니까요. 여자 역할을 하는 광대들도 사실 다 남자거든요. 탈을 벗으면 반전이 일어나는 재미도 있어요.”
그는 해외 공연 중 이집트 무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이슬람 문화권이다 보니 무속 신앙적 요소가 들어간 관노가면극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조심스러웠다. 신에게 비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국내 공연처럼 관객들을 무대에 참여시켰다.
▶관노가면극의 한 장면│강릉단오제위원회
문화 다른 이집트 공연도 큰 호응
관객 반응이 뜨거워서 공연 마감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끝이 났다. 해외 공연 중에 시시딱딱이 탈의 턱 부분이 깨진 적도 있었다. 그는 탈과 최대한 비슷하게 입 모양을 하고 공연을 이어갔다. 관객들은 다행히 탈이 깨진 것을 사고가 아닌 설정으로 받아들였다.
오랫동안 관노가면극보존회 어르신들과 공연을 하면서 지금은 서로 호흡이 척척 맞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어르신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르신 광대들은 공연이 없을 때는 실제 농사일을 하는데, 이런 습관 때문에 해외 공연을 가면 항상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났다. 김 씨가 일어나지 못할 때면 “젊은 사람이 잠이 많다”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가 금방 포기할 줄 알고, 어르신 광대들이 “너는 양반 말고 시시딱딱이만 하라”고 말했다. 그의 끈기를 시험한 것이다. 그렇게 관노가면극과 인연을 맺은 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앞으로도 그는 전통의 맥을 이을 생각이다.
“‘농후하다’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는데, 어르신들이 그냥 손만 올리는데도 소맷자락에서 멋이 나와요. 삶이 녹아든 춤이라서 그런지 저희는 따라 추기가 쉽지 않아요. 어디서 배운게 아니라, 농사일을 하면서 즉흥적으로 추신 거죠. 남의 것이 아닌 자기 춤을 추세요. 어르신들은 즉흥적으로 많이 추다 보니 변수가 자주 발생하죠. 이제는 그분들의 손가락만 변해도 맞춰서 출 수 있게 됐어요. 세련되기보다는 투박하고 단순한데, 흉내 내기는 어려운 게 관노가면극의 춤이죠.”
관노가면극은 단오제 기간 내내 강릉 남대천 단오공연장 아리마당에서 열린다. 관노가면극을 비롯해 제례와 굿 등 세 가지가 단오제의 대표적인 요소다. 제례라는 유교 의식, 무속적 요소인 굿, 토속신과 불교가 모두 어우러진 축제다. 이렇듯 단오제의 주축을 이루는 가치는 통합과 화합이다.
“본격적인 축제에 앞서 단오제에 쓰일 술을 미리 빚는 ‘신주 빚기’ 행사는 5월 9일 열렸는데요. 이때 제례부가 앞에 서고 뒤에 굿을 하는 무격부, 그다음 관노가면부가 따라가요. 시민들이 이들에게 쌀을 주면, 그 쌀로 술을 빚는 거죠. 제례부가 가마를 씻고 나서 무격부가 와서 부정을 없애는 굿을 해요. 다시 제례부가 신주에 쌀을 담지요. 단오제는 굉장히 통합적인 문화예요. 관노가면극도 마을의 풍년, 풍어를 바라는 뜻에서 했던 마을 단위의 탈춤이거든요. 혼자 하는 활동이 중시되는 시대지만, 이럴수록 화합과 통합의 가치를 지향하는 축제가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김문겸 씨가 탈을 쓰고 오죽헌 앞에 서 있다.│박유리 기자
젊은 층 참여 많아 세대교체
강릉 단오제는 단일 축제로 유일하게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등록됐고, 2005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삼국지>의 동이전에 기록된 우리 민족의 제천 의례가 강릉 단오제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민속 문화를 버려야 할 낡은 것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무녀들은 시기적으로 어려울 때 압박의 눈을 피해 강릉 남대천 등에서 소규모로 단오제를 치렀다고 한다.
현재 강릉에서는 단오제를 앞두고 축제 준비에 한창이지만, 대형 산불로 인한 피해 복구 또한 이어지고 있다. 4월 4일 강릉시 옥계면 남양리 한 야산에서 난 산불이 강풍을 타고 인근 동해시 망상동으로 확산했다. 산림청 등에 따르면 화재로 숲과 주택 등이 타면서 610억 상당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김 씨 또한 산불이 난 옥계면에 살고 있다. 김 씨와 친할머니의 집도 하마터면 화염에 휩싸일 뻔했다.
“산불로 이재민이 발생해 조심스럽긴 하지만 관광객이 많이 오셔서 지역 경제에 도움을 주었으면 해요. 여름철마다 옥계해수욕장에서 축제를 열고 연날리기 행사를 해요. 옥계 오일장에서는 상시 관노가면극 공연이 열린답니다. 제가 주민분들을 지도해 열리는 공연이에요.”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그는 단오제를 준비하러 급히 이동했다. 김 씨를 필두로 이제 관노가면극에서도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공연에 참여하는 인원은 16~18명. 이 가운데 10대 1명, 20대 3명, 30대 5명이 참여하면서 ‘천년의 축제’ 단오제도 한층 더 젊어질 모양이다.
글 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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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