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꽃사슴│한겨레
저는 장남입니다. 세 동생에 비해 터무니없이 많은 혜택을 받고 자랐죠. 부모님이 동생들보다는 저를 잘 먹이려고 애쓰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스타일이 많이 달랐습니다. 미국을 유난히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미군 부대에서 치즈와 항생제를 구해 제게 마구 투여했고, 민간요법을 신뢰하시는 어머니는 녹용을 많이 먹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 주장에 따르면 항생제 덕분에) 저는 잔병치레를 하지 않고 (어머니 주장에 따르면 녹용 덕분에) 건강하게 자랐습니다.(절대로 따라 하지 마세요!)
주는 대로 먹으면서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동생들에게 미안해서는 아니고 녹용이 사슴뿔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어느 날 어머니에게 사슴이 불쌍하다고 말했더니 “정모야, 손톱 깎을 때나 이발할 때 아프니?”라고 되물으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자연스럽게 이해했습니다. ‘사슴도 뿔을 자를 때는 시원하겠구나’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제 이야기에 제대로 된 답을 주는 대신 다른 질문으로 제 주의를 돌렸을 뿐입니다. 알고 봤더니 사슴도 뿔을 자를 때는 아프다고 합니다.
사슴뿔이 자랄 때는 피가 공급되고 신경이 연결돼 있습니다. 특히 녹용은 새로 돋은 연한 뿔이잖아요. 영양분이 많이 공급되는 시기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녹용이 그냥 손톱이나 머리카락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왜 그 많은 돈을 주고 먹겠습니까? 당연히 녹용을 채취할 때 사슴은 많이 아픕니다. 그래서 마취 주사를 놓고 지혈제를 사용하기도 하죠. 수의사의 참관을 의무로 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물론 녹각은 다릅니다. 뻣뻣하게 굳어서 저절로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녹용, 뿔이 있어 슬픈 사슴
그런데 그 많은 녹용이 다 어디에서 왔을까요? 분명한 것은 제가 먹은 녹용은 우리나라 자연산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반도에는 네 종류의 사슴이 살고 있습니다. 백두산사슴, 대륙사슴, 노루와 고라니가 바로 그것입니다. 백두산사슴은 와피티사슴의 만주 아종이라고 합니다. 와피티사슴이 뭔지 모르니 그냥 백두산사슴이라고 기억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름만 봐도 남한에는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대륙사슴은 ‘꽃사슴’이라고도 불립니다. 목과 등에 하얀 점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죠. 원래는 전국에 살았던 사슴입니다. 한라산 꼭대기에 있는 호수 이름이 백록담(白鹿潭)이잖아요. 흰 사슴이 물을 마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이 따로 구역을 지정해서 키웠습니다. 왕에게 녹용을 바치기 위해서였죠. 조선 왕실이 무너지자 너도나도 대륙사슴을 사냥했습니다. 결국 1910년에 제주에서 사라졌고 1940년대에는 남한에서 아주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녹용 때문에 한반도에서 절멸한 비운의 사슴이죠.
녹용은 뿔이 암컷에게는 없고 수컷에게만 있는 종류의 사슴의 것으로만 씁니다. 덕분에 암컷에도 뿔이 나는 순록(루돌프 사슴)에게서는 녹용을 채취하지 않지요.(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의학계에서는 약성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신 고기로 먹습니다. 노루는 수컷에게만 뿔이 있는 사슴입니다. 하지만 노루의 뿔은 녹용으로 쓰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노루는 시베리아노루라고도 합니다. 뿔이 사슴뿔보다는 염소 뿔처럼 소박합니다. 가지가 많지 않죠. 다섯 살은 되어야 가지가 세 개 이상이 됩니다. 노루의 천적은 호랑이, 표범, 곰, 늑대, 독수리입니다. 노루에게 현재의 한반도는 제법 살기 좋은 곳이겠죠. 하지만 의외의 복병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노루 고기는 육질이 연하고 감칠맛이 납니다. 구이나 육포의 좋은 재료입니다. 우리나라에 제법 많습니다. 멸종위기종이 아니죠. ‘관심 필요’ 단계일 뿐입니다.
한반도의 사슴 네 가지 가운데 마지막 하나는 고라니입니다. 고라니는 노루와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엉덩이가 하야면 노루입니다.(꽃사슴도 엉덩이가 하얗지만 한국의 자연에 꽃사슴은 이제 없습니다.) 야생 상태에서 뿔이 있으면 노루 수컷입니다. 뿔이 없으면 암컷이거나 고라니죠. 또 하나의 중요한 구분법은 송곳니입니다. 입 바깥으로 길게 나온 송곳니가 있으면 고라니입니다.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왕산리 큰골길 인근 산중턱에서 고라니 가족이 눈을 헤치며 산을 오르고 있다.│한겨레
로드킬 고라니 한 해 6만 마리
고라니는 국제적으로는 멸종위기 ‘취약’종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수렵 대상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고라니는 멧토끼와 더불어 한반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포유류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 개체수의 60%가 남한에 있습니다. 대략 60만 마리가 살고 있지요. 천적인 호랑이와 표범, 늑대는 이미 절멸했습니다. 남한 최고 포식자인 삵이나 족제비는 고라니를 사냥하지 못합니다. 고라니 몸무게가 10~22kg으로 제법 크거든요.
노루나 고라니는 풀과 관목의 줄기를 뜯어먹고 삽니다. 적당한 크기의 영역이 필요하죠. 새끼는 어느 정도 자라거나 다음 새끼가 태어날 때가 되면 어미 곁을 떠나야 합니다. 이때 새끼들은 최악의 천적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자동차입니다. 매년 고라니 열 마리 가운데 한 마리가 로드킬을 당합니다. 자동차에 치여 죽는 것이지요. 그 수가 무려 6만 마리에 이릅니다. 자동차 도로 km당 매년 0.61마리의 고라니가 희생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 고라니는 로드킬을 당해야 할까요? 로드킬을 당하는 고라니는 대부분 한 살 미만의 새끼입니다. 어미 곁을 떠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야 할 때입니다. 한국에서는 자동차 도로를 건너지 않고는 새로운 영역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진화 과정에 자동차에 대한 대비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새끼라서 자동차에 대한 경험도 없습니다. 밤에 차량 불빛에 노출된 고라니는 일시적으로 눈이 멀게 됩니다. 차를 피할 수가 없지요.
고라니 로드킬은 단지 고라니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사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고라니를 차로 친 운전자는 어떨까요? 자동차에도 충격이 생기지만 더 큰 충격은 운전자가 받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수가 매년 6만 명에 달하지요. 고라니와 운전자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고라니가 도로로 뛰어들지 못하게 도로에 울타리를 쳐야 합니다. 그리고 도로가 생길 때마다 최소한의 야생동물 이동로를 만들어야 하지요. 돈은 들지만 그게 고라니와 사람 모두를 살리는 길입니다.
이정모_ 현재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생화학을 전공하고 대학교수를 거쳐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을 지냈다. <250만 분의 1>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내 방에서 콩나물 농사짓기> 등 읽기 편하고 재미있는 과학 도서와 에세이 등 60여 권의 저서를 냈고 인기 강연자이자 칼럼니스트로도 맹활약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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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