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미 작가가 미국의 한 소녀인 마리아와 그녀의 물건들을 찍은 사진은 2006년에 시작해 2009년, 2015년에 촬영했다.
핑크색은 여성의 기호다. 이것은 주어진 것일까, 타고난 것일까? 그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알려주는 사진이 있다. 바로 사진작가 윤정미의 작품이다.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나나랜드: 나답게 산다>에서 윤정미 작가의 ‘핑크 & 블루 프로젝트’ 작품을 보자. 첫 번째 사진에는 아주 어린 소녀가 온통 핑크색인 자신의 소유물들에 둘러싸여 있다. 핑크색 옷들, 핑크색 신, 핑크색 장난감…. 그다음 사진은 같은 소녀가 조금 성장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핑크색과 함께 파란색 소유물이 절반을 차지한다. 세 번째 사진에는 같은 소녀가 청소년이 되었다. 이제는 핑크색을 거의 볼 수 없다.
▶윤정미 작가가 미국의 한 소녀인 마리아와 그녀의 물건들을 찍은 사진은 2006년에 시작해 2009년, 2015년에 촬영했다.
이 여자아이의 사진들을 보면 핑크색에 대한 집착이 어린 시절에만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집착은 그 소녀의 타고난 본성일까? 유아 시장에서는 유독 핑크색-여자아이, 파란색-남자아이 등식을 고집한다. 또 유아일 때는 옷이나 장난감에 대한 선택이 아이보다 어른인 부모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이 소녀의 핑크색 취향은 사회적 환경과 부모에 따른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윤정미 작가가 미국의 한 소녀인 마리아와 그녀의 물건들을 찍은 사진은 2006년에 시작해 2009년, 2015년에 촬영했다.
핑크색 또는 빨간색이 여성을 상징하는 것은 사회적 산물이며, 따라서 그것은 역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이라는 것은 특정 시대에만 해당하는 것이라 보편성이 없다는 뜻이다. 과거 유럽 귀족사회에서 빨간색은 남자아이들에게 더 많이 입혔다. 여자아이들에게는 흰색을 주로 입혔다. 이는 안토니 반 다이크가 17세기에 그린 영국 왕실의 왕자와 공주 그림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안토니 반 다이크의 <찰스 1세의 다섯 아이들>, 1637년
옛 유럽 귀족사회 남자아이는 빨간색
1937년에 제작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속 백설공주 역시 파란색 상의를 입고 있다. 핑크, 빨강이 여성을 상징하고, 파랑이 남성을 상징하는 오늘날의 기호현상은 20세기 중반 이후 확립된 것이다. 장난감 제조업체들은 남성과 여성의 기호를 달리하는 것이 장난감 판매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여동생은 오빠의 장난감을, 남동생은 누나의 장난감을 물려받을 수 없으므로 다시 사야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신화론(Mythologies)>에서 현대 문명의 다양한 미디어, 즉 저널리즘, 광고, 영화, 예술 작품에 의해 역사적인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둔갑한다고 주장했다. 즉 특정 시대와 특정 지역에 국한되는 어떤 기호현상이 자연스러운 것, 다시 말해 타고난 것이 된다는 뜻이다. 핑크색이나 빨간색이 여성을 상징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시대, 즉 20세기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러한 이론을 언어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주장한 ‘언어의 자의성’에서 발전시켰다.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언어는 사회적 약속일 뿐 절대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새를 가리키는 이름은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에서 전혀 다르다. 언어는 자연적인 것,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다. 그렇다면 특정 사물에 붙게 되는 상징과 기호 작용 역시 자의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양 회화에서 많이 그려지는 ‘수태고지’를 보자. 성모마리아가 처녀로 임신을 했다. 가브리엘 천사가 그녀에게 찾아와 그 임신이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알려준다. 무수히 많이 제작된 ‘수태고지’ 그림에는 비둘기가 반드시 등장한다.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한다. 그리고 성모마리아 옆에는 늘 흰색 백합이 함께 그려진다. 흰색 백합은 성모의 순결을 상징한다.
▶남성용 면도기와 여성용 면도기
설거지는 여자, 하늘이 정해놓은 일?
검은색은 더러워졌다는 것이 잘 표시 나지 않는 데 반해 흰색은 어떤 색보다 오염을 금방 드러낸다. 따라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이 흰색의 특징이다. 여성의 순결을 흰색의 성격과 연결 지었다. 이로써 상징과 기호는 단지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것을 넘어서 기능에 봉사한다. 즉 어떤 규범과 이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장난감이 대표적이다. 남자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은 주로 전쟁놀이, 이동 수단, 도시 건설과 관련된다. 반면 여자아이들은 아이 돌보기, 주방놀이, 인형 등이다. 장난감은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분명하게 나누고 그 역할에 알맞도록 적응시킨다.
그 역할은 분명 역사적인 것인데도 보편적인 것, 본래적인 것,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한국의 어떤 주방 세제 광고에서는 50년 동안 엄마가 변함없이 주방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정치인이 말한 것처럼 이런 광고를 보고 자란 사람들은 커서 “설거지는 여자가… 하늘이 정해놓은 일”이라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은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졌다고 말하지만, 그 선택이란 사회적인 제한을 받는 한에서의 자유로움이다. 디자이너 역시 그런 제한 안에서 특정 사물을 디자인한다. 면도기는 남성용, 여성용이 기능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지만 남성용 면도기는 좀 더 딱딱한 형태의 차가운 색 계열로 디자인하고, 여성용 면도기는 부드러운 형태의 따뜻한 색 계열로 디자인한다. 디자인이란 이처럼 사회적 관념이 구체화된 것이다. 사회적 관념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한다.
2007년, 캐나다의 한 학교에서 전학 온 남학생이 핑크색 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학교 학생인 데이비드 셰퍼드와 트래비스 프라이스는 이런 집단 괴롭힘에 항의해 핑크색 셔츠 50개를 구입해 학생들에게 입게 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캐나다 사회는 두 학생의 용기 있는 행동을 기려 매년 ‘핑크 셔츠 데이’를 제정해 ‘반따돌림(anti-bullying)’ 행사를 하고 있다. 사회적 고정관념에 대한 저항이란 이렇듯 통념이 된 기호 작용을 전복시키는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어떠한 기호든 그것은 그저 일시적이고 역사적일 뿐이다.
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뉴스레터 구독신청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