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단체 조직·규합하고 농촌계몽 앞장

2019.04.29 최신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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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사업을 하다 보니 우리 농민들이 사랑하던 농토를 버리고 만주를 향해 피란길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한숨과 눈물로 그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일제의 극악무도함을 생각하다 가슴에 피가 맺혀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 황애덕 애국지사는 만주를 향했다. 일제가 우리 동포들을 북만주 개척사업에 ‘농노’로 끌어들이고 농민들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에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 만주 일대에 마적떼가 있어서 마음대로 여행할 수 없다고 주위에서 만류했지만 그녀의 고집을 꺾기는 힘들었다. 황애덕은 하얼빈에 도착해서 황하수 근처에 조그만 방을 얻고 만주로 들어갈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1931년 만주 침략을 기점으로 일제는 민족운동 탄압을 강화했고, 북만주 개척사업에 동원된 농민들의 삶은 참혹했다. 굶주림과 노동, 수탈이 지속되었지만 누구도 불평을 소리 내 말하지 못했다.

이화학당 진학, 애국여성동지회 결성
황애덕이 “당신들은 어찌해서 이런 곤욕을 참고 있느냐”라고 묻자, 그들은 “우리가 이곳에 올 때 이미 계약을 하고 왔기 때문에 떠날 수가 없다”라고 답했다. 이에 황애덕은 “아무 걱정 말고 뛰어나와 한인의 자유농장을 만들자”라고 제안했다. 만주에서 열악했던 지역인 ‘경성현’이라는 곳에서 신개척 농장 ‘백현리 농장’이 만들어졌다.
‘네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황애덕은 국내뿐 아니라 일본,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생전에 그의 강단 있는 행동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황애덕(黃愛德, 황에스터, 황애시덕)은 1892년 4월 19일 평양 출생으로 부친 황석청과 모친 홍유례 사이에서 1남 6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모친 홍유례는 다섯째를 낳으며 극심한 산고를 겪었는데, 그때 서양 여의사 홀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 인연으로 모친은 평양 남산현 감리교회를 다니며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부모님은 개화된 지식인이었다. 해외 선교사뿐만 아니라 문명개화에 관심을 가진 독립운동가 안창호, 조만식 등 지식인과도 폭넓은 교류를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성장한 황애덕은 민족의 현실을 가늠할 수 있었고 배움에 대한 열의도 강해졌다. 6형제 모두 학교 뒷바라지를 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황애덕은 학교를 가기 위해 단식투쟁을 했고, 진학한 정진소학교에서도 2년 반 만에 졸업하며 배움의 열의를 불태웠다. 집안과 인연이 된 여의사 홀의 주선으로 고등과는 이화학당에 진학했는데, 그곳에서 신마실라, 박인덕, 신준려 등 신여성들과 만났다. 그리고 뜻있는 여성 지식인들과 애국여성동지회를 결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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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해 나라 일 해야 하니 혼인 못해”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황애덕은 평양 숭의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그곳에서 황애덕은 비밀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한다. 동료인 김경희, 안정석과 함께 조직한 송죽회(松竹會)는 의기 있는 선후배가 모여 전국 지부로 확대되었다. 3·1운동 이후에는 서북 지방의 애국부인회를 통합해 ‘대한애국부인회’로 발족되었고, 일본 유학을 간 뒤에도 송죽회 성격의 비밀단체를 주도했다. 송죽회는 지방 부인회를 흡수하면서 100명이 넘는 회원을 확보하며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의 결혼 권유에 황애덕은 결단을 내렸다. “저는 좀 더 공부해 나라의 일을 해야 하니까 혼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의사를 밝힌 것이다. 황애덕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17년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국제 정세 변화와 조국의 현실은 심각하기만 했다. 그래서 김마리아·나혜석·정자영·유영준 등과 함께 일본에서 도쿄 여자유학생회를 조직했다. 2·8독립선언의 현장에서 김마리아, 현덕신, 정자영, 유영준, 나혜석, 노영근, 성목진 등이 참여한 가운데 황애덕은 주동자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짧은 저고리에 또각거리는 가죽 구두, 시계를 착용하고 늘 당당했던 황애덕! 그의 일생은 독립과 애국이었다. 그리고 젊은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넣는 교육자였다. 황애덕의 활동은 일본, 미국, 중국, 만주 곳곳에서 확인된다. 2·8독립선언 이후 황애덕은 김마리아·나혜석·박인덕·손정순·안숙자·신순려 등 11명과 이화학당에 모여 여성계의 3·1운동 참여를 논의했다. 개성·평양 등 전국 여성계의 적극 참여를 권하며 만세운동에 뛰어들었을 시기, 모임의 간사로 선출되어 중책을 맡았다. 끊임없이 전개되는 만세운동과 그곳에서 만세를 소리쳤던 수많은 인파 속에 황애덕은 서 있었다. 그리고 3월 5일 서울 일대의 만세시위 현장에서 황애덕은 김마리아·박인덕 등과 체포되었다. 하지만 체포된 여학생들은 당당했다. <신한민보>는 1919년 6월 7일자에 심문을 받으면서도 당당했던 여학생들의 모습을 “감옥 중에서 무쌍한 수욕을 당하면서 왜놈 검사의 취조를 받되 조금도 겁나함이 없이 용감 활발한 태도로 정당한 도리를 들어 항변하매…”라고 표현했다.
황애덕은 1919년 3월 19일부터 8월까지 옥고를 치렀고, 출옥한 뒤에도 김마리아와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도모한다는 이유로 다시 옥고를 겪었다. 1925년 가출옥한 뒤 황애덕은 이화학당 대학부 3학년에 편입해 사감 겸 교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 위원장으로 전국 지방단체를 순방했다. 조국의 현실을 마주하며 미래를 생각하게 된 황애덕의 변화는 미국 유학에서였다.

해방 이후에도 고아·여성 자립 도와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교육학 석사과정을 거쳐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에서 농촌 연구를 하며 황애덕은 우리 농촌의 현실을 생각했다. 서구의 선진화된 기술을 보면서 농촌계몽의 필요성과 농촌계몽이 국가 발전을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입국한 뒤 한국의 농촌계몽을 위해 농촌지도자 양성에 앞장섰다. 협성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농촌사업지도교육과’를 신설했고 농촌계몽을 강조했다. 농촌 일대에 청년과 부녀자, 농민을 대상으로 영농 기술, 농촌 위생, 건강법을 가르치며 농촌계몽 사업을 확대했다. 그때 황애덕은 수원과 수안에 최용신, 김노득을 파송하는 등 제자 양성과 농촌계몽운동의 뒷바라지에 심혈을 기울였다. 1932년 12월 ‘조선직업부인협회’를 개편하며 여성의 직업과 기술의 관련성을 강조하고 여성의 변화를 주장했다. 황애덕은 교회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농촌의 문명 퇴치, 의식 개혁,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황애덕은 시대보다 앞선 지식인이었다. 국가 발전의 기반 산업과 미래 발전을 위해 고심했던 흔적이 곳곳에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의 활동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6·25전쟁 이후 고아와 여성의 자립을 위해 ‘한미종합고등기술학교’를 설립했고, 한국 기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선두 대열에 섰다. 황애덕은 역사의 변환기에서 조국의 미래를 걱정했고, 또 실천했던 여성이었다. 송죽결사대부터 2·8독립선언, 일본·미국·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애국계몽운동과 농촌계몽운동, 여성 단체를 규합하는 등 근현대 역사의 중요한 자리에 서 있었던 황애덕. 대한애국부인회부터 간호협회, 애국부인회, 여성문제연구회 등 한국 여성을 결집하는 ‘여성단체총협의회’를 조직해 한국 여성이 올곧게 서는 데 힘을 기울였다. ‘조국 독립’과 ‘국가 부강’을 위해 일생을 바친 여성 독립운동가 황애덕을 기억한다.

l심옥주_ 전 부산대 조교수이며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국회인성교육실천포럼 자문위원, 여성독립운동학교 대표다. 제15회 유관순상을 수상했으며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추진위원회 위원, 국가보훈처 사료수집 전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알리다> <윤희순 평전> <윤희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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