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도 스웨덴 못지않게 사회적 대타협의 전통을 자랑하는 나라다. 네덜란드의 사회적 타협은 ‘폴더 모델’이라고 불린다. 네덜란드어로 폴더(Polder)는 ‘간척’이라는 뜻이다. 해수면보다 낮은 땅에서 살아온 네덜란드 조상들이 서로 힘을 모아 간척지를 개척해 바다의 위협에 맞선 것처럼 국가적 위기가 발생하면 사회적 대타협으로 극복한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폴더 모델은 1982년 말, 네덜란드 노동총연맹(FNV)과 사용자연맹(VNO) 주도로 체결된 바세나르 협약이다.
자원 수출에 의존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재정 지출을 늘려온 국가가 수출 둔화로 경제위기에 빠지는 현상을 ‘네덜란드 병’ 또는 ‘자원의 저주’라고 한다. 네덜란드는 1950년대 말부터 북해 유전의 천연가스 개발에 힘입어 한동안 호황을 누리다가 1970년대 들어 통화가치 상승에 따른 대외 경쟁력 약화, 수출 감소, 물가 상승, 경기 침체, 실업률 증가 등 복합적 경제위기에 빠진다. 1960년대 연평균 5.4%를 기록하던 네덜란드 경제성장률은 1970년대에는 2.9%로 떨어지고, 급기야 1980년대 초에는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바세나르 협약은 노동의 유연성을 높이는 대신 일자리 창출에 노사정이 총력을 쏟는 데 초점을 맞췄다. 구체적으로는 물가연동 임금인상제의 단계적 폐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 시간제 일자리와 유연근무제의 확대, 노사 중앙교섭의 강화, 노조의 경영 참여 보장, 고용을 늘리는 기업에 대한 세금 감면과 보조금 확대 등에 합의했다.
바세나르 협약은 구체적인 합의 사항을 자세히 규정했다기보다는 오랫동안 쌓아온 노사 간 신뢰를 바탕으로 새로운 고용정책과 산업정책 방향을 공동으로 도출하고 합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노사 간 합의 과정에 직접 개입하진 않았지만 자문기구인 사회경제협의회(SER)를 통해 지속적으로 후속 사회적 대화를 촉진하는 동시에 법과 제도로 합의 사항을 구체화했다.
고용률 계속 올라 2000년대 70%대
바세나르 협약은 경제위기 극복의 발판을 넘어 1990년대 이후 네덜란드의 안정적인 경제성장과 고용 창출에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1990년대 네덜란드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3%를 넘어 2%대 초반에 머문 유럽 다른 국가들을 앞질렀다. 무엇보다 뚜렷한 가시적인 성과는 고용률 상승이다. 바세나르 협약 체결 직전인 1981년 네덜란드의 고용률은 55%에 머물렀으나 1991년 60%를 넘어섰고, 2000년대 들어서는 70% 아래로 떨어진 적이 한 번도 없다. 2017년 기준 고용률은 74.6%로 OECD 회원국 평균 70%보다 훨씬 높다. 기업들은 임금과 노동시간의 유연성을 얻는 대가로 경기 침체기에도 최대한 고용을 지키려는 노력을 보였다. 예컨대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대외 의존도가 높은 네덜란드도 큰 타격을 받았으나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실업률은 3.1%에서 4.4%로 소폭 상승하는 데 그쳤다.
네덜란드 노동정책은 임금보다 일자리를 중시한다. 또 노사정 협상을 통해 노동시간 줄이기와 근무 형태의 유연화를 장려하는 정책을 꾸준히 펴온 결과 일과 삶의 조화가 돋보인다. OECD가 산출한 2017년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생활의 균형)’ 지수는 10점 만점에 9.3점으로, 35개 조사 대상국 중 1위다. 2016년 기준 네덜란드 노동자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1430시간으로, OECD 평균 1763 시간에 견줘 333시간이나 짧다. 법정 노동시간(주간 40시간)이 짧은데도 초과근무를 하는 노동자의 비율이 0.45%에 불과해 OECD 회원국(평균 13%) 가운데 압도적으로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폴더 모델 위협 2가지 흐름 지적도
물론 네덜란드의 유연한 노동시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파트타임 노동자와 자영업의 급증이 비판을 받는 주된 이유다. ‘노동의 개인주의화 현상’이 너무 빠르게 진행돼 사회적 합의주의의 기반이 흔들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8년 7월 서울에서 열린 국제노동고용관계학회 토론회에 초청 연사로 방한한 마틴 퀴네 암스테르담대 교수는 2000년대 들어 폴더 모델을 위협하는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소개했다. “하나는 사회적 논의 과정에 힘의 중심축이 점차 기업(사용자) 쪽으로 이동하면서 임금 억제 전략이 자연스럽게 관철되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연금의 책임 부담이 기업에서 노동자에게로 전가되고 있는 것”이라고 마틴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무엇보다 자영업의 증가와 고용 형태의 다양화, 유연 계약의 증가 등으로 사회적 대화를 통한 교섭이 이뤄지더라도 협약 적용 대상이 줄어드는 문제가 발생하는 게 큰 문제다. 게다가 노조 조직률의 지속적 하락과 기존 노사 단체의 내부 균열 등으로 전반적으로 중앙교섭의 힘이 약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이런 폴더 모델의 약화는 불평등 심화와 불완전 고용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스웨덴과 네덜란드의 사회적 대타협은 시기와 역사적 배경이 서로 다르다. 사회·경제적인 전후 맥락도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익이 부딪치는 계층끼리 사회적 대화를 통해 양보와 타협의 정신으로 공통의 과제를 도출하고 해법을 찾았다는 점은 같다. 스웨덴과 네덜란드의 사례를 보면, 사회적 대화의 형태와 방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할 수밖에 없다. 시장경제의 성숙, 민주주의의 발전, 더 높은 수준의 국민복지 실현과 동행하면서 사회적 대화는 진화한다. 시장 지상주의와 시장 만능주의에 편향된 국가는 스웨덴과 네덜란드의 사회적 대화 모델에서 배울 점이 많다.
박순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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